윤증고택 답사사진 (2007. 11. 25)
* 이번 공주 다녀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들른 답사처가 바로 윤증 고택이다. 윤증고택은 행정상으로는 논산군 노성면 교촌리에 있지만, 이 앞에 들른 계룡산의 신원사 중악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 명재 윤증은 조선 현종, 숙종 대의 학자로서,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았지만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윤증은 임금이 40번 넘게 벼슬하라고 불렀어도 끝내 벼슬을 거부한 학자이다. 마지막에는 임금이 명재의 얼굴도보지 못한 상태에서 우의정을 준다고 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
벼슬을 하라고해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공부하는 선비를 처사라고 한다.
'정승 세명이 대제학 한 명만 못하고, 대제학 세명이 처사 한명만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일생동안 처사였던 명재를 가리킨다고 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처사는 두 명 있다고 한다. 바로 명재 윤증과, 지리산 밑에 살았던 남명 조식이다.
윤증고택은 우리나라의 정원문화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다. 소쇄원이나 세연정 등은 주택과는 떨어진 별서의 정원이고, 창덕궁의 후원이나 부용정은 궁궐의 정원이지만, 일반 사대부가의 정원으로는 함안의 무기연당, 영양의 서석지, 강릉의 선교장 등과 더불어 잘 알려진 곳이다.
대부분 한번쯤은 다녀온 곳이자만, 유독 윤증고택만은 부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기에, 이번 공주 신원사까지 온 김에 들러서 내려가고자 하였다.
* 넓은 사랑채 앞마당을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원래부터 없었는지 근래에 헐어냈는지 모르겠지만, 윤증고택에는 담장이 없다.
고택이 있는 이 마을은 파평윤씨 세거지이다.
** 윤증 고택의 사랑채에는 담장이 없고, 따라서 대문도 없다. 외부인이 곧바로 사랑채에 접근하거나 쳐다볼 수 있는 구조이다. 집안에 담벼락이 없다는 것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표시라고 하니, 가히 이 집안의 가풍을 짐작해 볼 수 있다(2009. 1. 21 내용 추가)
* 고택의 앞에 땅을 파고 석축을 쌓아 비교적 큰 규모의 방형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 뒤로 보이는 건물은 노성향교이다.
* 연못의 한 귀퉁이에 둥글게 석축을 쌓아 인공섬을 만들었다. 넓은 연못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두고 있는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나다)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서, 원도방지형(圓島方池形) 연못으로 불리운다. 조선 사대부가의 연못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원도방지형의 연못이 많다.
섬의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고택의 사랑채이다.
* 야트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삼고, 앞의 연못의 물을 둔 배산임수형의 윤증고택이 석양을 받고 있다.
* 노성향교 쪽에서 바라본 연못. 왼편으로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윤증고택이 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찻집(?)이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여러 개의 창문이 제각각 다른 살창모양이어서 눈으로 보는 맛이 있다.
고택에서 볼 때는 마치 야트막한 토성의 성벽이 왼편을 가려주는 형국이어서 자연스럽게 담장역할을 하는 듯이 여겨진다.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사랑채 앞 움푹 패여진 곳에 자리한 우물. 지금은 쓰이지 않아 뚜껑을 덮어 놓았다. 우물은 계속적으로 물을 퍼 내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데, 물이 계속 고여만 있으니 모기의 서식처가 된 듯, 겨울의 초입에 추운 날씨임에도 우물 주변에 많은 모기들이 날아다녔다.
* 우믈 주변을 장식한 괴석들.
* 가까이서 본 사랑채.
* 사랑채의 천정과 액자.
* 고택의 안채.
사랑채는 담장이 없지만, 사랑채의 뒷편에 있는 안채는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현재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담장 너머로 보이는 지붕들의 올망졸망 다양한 모습이 보기에 좋다.
* 사당채로 보이는 건물. 왼쪽은 안채의 담장이다. 사당 앞으로 수많은 장독들이 있다.
* 고택의 수많은 장독들.
* 장독들 뒤로 낮은 언덕과 고목이 자연스레 경계를 이루어 주고 있다.
* 낮은 언덕 위에서 바라본 고택 전경
* 낮은 언덕에서 바라본 고택과 수많은 장독 항아리들.
* 노성향교의 홍살문과 솟을삼문.
* 노성향교.
** 윤증[尹拯] : 1629(인조 7)~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
또한 아버지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내용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反目)을 '회니(懷泥)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윤증은 이산(泥山)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王覇竝用)고 비난했으며,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윤증의 배사(背師)문제는 의리·명분의 껍데기를 쓰고 노론·소론 간의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자의 사상적 견해,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놓여 있었다. 양자 모두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 입각한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 윤증고택을 마지막으로 하고, 귀가길에 오르는데, 우리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야하는데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쪽으로 향하다가 뒤늦게 잘못을 알고 다시 차를 되돌려 논산나들목으로 접어들 수 있었다.
호남고속도로가 25번 고속도로인데, 회덕에서 논산 간은 251번으로 되어 있어 나는 이것이 호남고속도로의 지선(이 때까지 나는 천안논산간 고속도로가 호남고속도로의 지선인 줄 알았다)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가 25번(호남고속도로 주선)이었던 것이다.
논산 나들목은 251번, 서논산 나들목은 25번고속도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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