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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조각공원의 야외 조각작품들 사진 (2008. 2. 10)

道雨 2008. 2. 11. 15:46

 

 

 

                UN 조각공원의 야외 조각작품들 사진 (2008. 2. 10)

 

 

 

* 부산박물관 옆에 야외조각공원이 있습니다. 국내외의 조각가들의 작품이 수십점 설치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구경을 하고 나서, 산책을 겸하여  이곳에 들러 조각 작품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각각의 작품들 앞에는 제목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했습니다.

  각자 마음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세요....

 

 

 

 

 

 

 

 

 

 

 

*** 부산박물관 주변에는 유엔기념공원(유엔묘지), 수목공원(수목원), 조각공원, 문화회관 등이 모여있어서 가히 부산의 문화중심지라고 할 만 합니다.

  휴일 가족나들이로 적당한 곳이니 방문해 보시길...

*** 부산박물관에서는 오후 1시30분, 오후 3시30분에 관람객을 위하여 해설을 해주십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연세가 지긋하신 해설사님께서 문화재 비화를 곁들여가며 재미있게 설명을 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부산시민의 날'은 10월 5일인데, 1592년 음력 9월 1일(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5일)에 있었던 부산포해전의 승리를 기념하여 제정된 것이라고 한다.

 

 

 

***  부산포 해전(釜山浦海戰)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전선을 격파한 싸움.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제3차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8월 중순에 이르러 일본군은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무라, 오카모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수 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조선군측에서는 일본군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형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이 본국으로의 철군을 준비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경상감사 김수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일본군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해상통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8월 25일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여 판옥선 일흔네 척, 협선 아흔두 척 등 총 166척으로 통합함대를 편성하였다.
  이 순신·이억기·원균 등 세 수사가 거느린 조선 수군은 부산포의 일본군 본진을 공격하여 타격을 가하기로 작전 계획을 세웠다. 당시 부산포에서는 하시바군 주력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수군 8000여명이 함선 430여 척을 보유하고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9월 1일 새벽, 조선 수군 함대 160척은 가덕도를 떠나 절영도에 이르는 동안 모두 스물네 척의 일본군 전함을 격침시켰다. 일본 수군 선단은 조선 수군이 공격하자, 변변히 응전조차 해보지도 못하고 배를 버려둔 채 육지로 달아나기에만 급급하였다.
  부산포 앞바다의 절영도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 수군 선단 사백여 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육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 수군 통합함대가 절영도 서북단을 통과하여 부산포로 들어가자, 초량 방면에서 일본 수군의 대형 전함 4척이 출현하여 조선 수군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조선 수군측에서는 일제히 돌진하여 적선 4척을 격침시켰다.
  조선 수군의 본대는 이러한 승세를 타고 장사진을 펼치면서 종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의 형세에 압도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육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활을 쏘아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각종 총통 사격을 집중하였다.
  이순신은 이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군 전선 100여 척을 격파한 뒤, 왜군과의 전투를 중지하고 부산포를 떠나 가덕도로 물러났다가, 9월 2일에 각기 본거지로 귀환하였다.
  조선군이 육지에 올라간 왜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육전이 해전에 비해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
  일본 수군은 이 부산포 해전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이후로 그 기세가 더욱 위축되어 더 이상 적극적인 해상활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직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기지를 보호하기에만 급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