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창녕 지방 답사 사진(2009. 11. 8)

道雨 2009. 11. 9. 14:35

 

 

 

                        창녕 지방 답사 사진 (2009. 11. 8)

 

 

단풍 구경 삼아, 집사람과 주부독서회원 두 분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일요일 나들이로 창녕 지방 답사를 다녀왔다.  

몇 년 전에 두 번 답사를 다녀온 곳인데, 비교적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다시 한 번 찾은 것이다.

 

 

비사벌이라고도 하는,  비화가야의 고장 창녕이다. 경우에 따라 6가야에 포함되기도 하고, 또 제외되기도 하는 애매한 지위의 비화가야지만, 지역에 남아있는 거대한 고분군을 보면, 고대에 그 세력이 자못 컸음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지리적으로 낙동강의 동쪽에 있으며, 555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화왕산의 억새로 유명한 고장이며, 람사협약의 대표적인 습지 우포늪, 또 부곡온천 등의 자연유산도 자랑꺼리지만, 제2의 경주라고도 불리우는 것처럼 문화재 또한 다양하고 많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창녕 지방(교동, 송현동 고분군)의 고분 몇 개에서 발굴된 화차 2량 분량 이상의 유물이 발굴 보고서도 없이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수많은 고분이 도굴되어, 정작 교동 고분군 옆에 건립된 창녕박물관에는 변변한 유물 하나 전시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라 아쉽기가 그지 없다.

 

 

* 교동, 송현동 고분군.

원래 하나의 고분군이지만, 가운데 도로가 나면서 행정구역이 분리되었다. 교동 고분군은 사적 80호, 송현동 고분군은 사적 81호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고분이 150기 이상이었는데, 그동안 도굴 및 농경지화, 황폐화 등으로 현재는 30여기만 남아있다. 

일제 강점 초기인 1918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야쓰이 사이이치의 주도로 교동고분군의 일부와 송현동 제89, 91호분의 발굴이 이루어진 바 있는데, 이때 마차 20대, 화차 2량이 넘는 양의 엄청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따른 보고서 한 장 간행되지 않았고, 출토 유물도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고 말았다.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야 유물 가운데 출토지가 창녕으로 확인된 것이 적지 않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금동관, 금동제 관모, 금은장식환두대도처럼, 왕이나 그에 버금가는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 등도 있다고 한다. 

 

 

 

* 국보 제33호인 신라 진흥왕 척경비.

비화가야는 진흥왕 16년(555)에 신라 영토에 편입되었는데, 이로부터 6년 후인 561년에 진흥왕이 신하들을 대동하고 이곳 창녕까지 행차하여 확대된 국경을 확인하고, 점령지에 대한 새로운 정책과 생각을 피력한 사실을 기록하여 새겨 놓은 기념비이다.

진흥왕 순수비 넷 가운데 하나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다.

이 비는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었는데, 소풍 온 한 초등학생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1914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으로 창녕의 고적을 조사하던 도리이 류조가 신라시대의 비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1924년에 현재의 위치인 만옥정공원 안으로 옮겨왔다.

 

 

 

 

 

* 만옥정공원 안에 있는 퇴천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규모는 작지만 비례가 잘 잡혀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 만옥정 공원 안에 있는 창녕 객사. 

 

 

 

* 만옥정 공원 안의 퇴천리 삼층석탑. 

기와 지붕 위로 멀리 교동 고분군의 모습이 보인다. 

만옥정 공원 안에는 이 외에도 대원군 시절의 척화비가 옮겨져 있고, 고을 수령들의 선정비들이 모여있으며, 작은 공연장 시설도 건립되어 있다.

만옥정공원은 주택가 주거지역의 공원으로 문화재, 공연시설, 체육시설, 나무 등이 잘 어우러진 공원으로 분위기가 아주 좋은 곳이다.

 

 

 

* 거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창녕 석빙고. 보물 제310호이다.

입구는 철문을 달아놓고 자물쇠를 채워서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해설 능력을 갖춘 문화유산지킴이를 두면, 일자리도 창출되고 문화재 보호도 되고, 방문객도 안을 볼 수 있어 좋으련만,...... 이렇게 잠가 놓으니 아쉽다.  

 

 

 

 

* 이름도 어려운 '탑금당치성문기비'인데, 일종의 사적비(事積碑)로서 보물 제227호이다. 

이 비에 씌어진 비문의 주된 내용은 신라 혜공왕 7년(771) 부터 헌덕왕 2년(810) 까지 40년 동안 어느 스님이 인양사를 비롯한 여러 절에서 이룩한 많은 불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불사의 내용으로는 금당이나 그 밖의 절 건물을 새로 짓거나 고친 일, 탑을 세우거나 수리한 일, 불상, 종, 풍탁, 정례석, 계단 따위를 만든 일, 여러 절에 시주한 일 등이 골고루 들어 있다.

특이한 것은 비액(碑額)이나 제명(題銘)이 없이 앞면과 옆면에 바로 본문이 새겨져 있으며, 뒤쪽에는 스님의 인물상을 새겨 놓았다.

 

 

 

* '탑금당치성문기비'의 뒷면에 새겨진 인물상. 이 비에 새겨진 내용의 주인공인 스님으로 추정된다.

이와같이 비석에 인물상을 새긴 예는 찾아보기 힘든데, 아마 이것이 거의 유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 두 번의 답사에서 이 비는 찾아보질 못했는데, 이번 답사에서 처음으로 찾아 확인하고 사진에 담았다.

 

 

 

* 제2의 석가탑이라고도 불리는 술정리 동삼층석탑으로 국보 제34호이다. 

8세기 중후반의 삼층석탑의 완성기의 모습이 갖는 특징들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매우 기품 있는 탑이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이 탑의 주위에 집들이 가득 있어서 마치 동네 주민들의 공동 앞마당처럼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와보니 주변의 집들이 모두 철거되고, 발굴조사까지 마쳤다고 한다. 

이 멋진 탑에 관한 옛날의 기록이 없어서 이 곳에 있었을 절의 이름도 모르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혹자는 이곳에 있던 절이 탑금당치성문기비에 나오는 '인양사'라고 하기도 하는데, 내 생각에는 현재 탑금당치성문기비가 있는 일대가 인양사터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 술정리 동삼층석탑.

1965년에 이 탑을 수리하였을 때, 3층 몸돌 윗면에 뚫린 네모진 사리공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잔 모양의 사리용기, 유리로 된 담황색 사리병, 오색 구슬 9개가 그 속에 담겨 있었고, 사리병 안에는 흰 빛 사리 일곱알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사리는 탑을 다시 짜맞출 때 새로운 용기에 넣어 제자리에 안치시켰다. 청동으로 만든 사리용기를 포함한 나머지 유물들은 행방이 묘연하다가, 한 스님의 집념으로 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아내게 되었다.  

 

 

 

* 술정리 동삼층석탑의 문화재지킴이 혜일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 한 컷...

이 사진 속의 혜일 스님이 술정리 동삼층석탑의 청동제 사리용기 등을 찾아내게 한 주인공이며, 현재 창녕군에서 마련해준 작은 집(나중에 철거 대상임)에 스스로 동탑보호소 간판을 걸고 거처하면서, 문화재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직 이 석탑 만을 지키며, 시간이 되면 예불을 올리고 독경을 하신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하기 하루 전에는 이곳에서 '동탑제'가 열렸다고 하며, 우리에게 여러가지 자료를 건네주셨다.

 

** 혜일스님과 청동제 동탑사리용기에 관한 일화는 별도로 소개하려 한다.

 

 

 

* 중요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하병수 가옥. 

술정리 동삼층석탑의 뒷편에 있는데, 우리나라 민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가집이다. 종도리에 씌여진 묵서로 보아 영조 36년(1760)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은 벼가 아닌 억새로 되어있고, 못을 쓰지 않고 집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아기자기하게 잘 가꾸어진 예쁜 살림집이라고 방문객들 모두가 칭찬이 대단하였다. 

현재 사람이 살고있는 집이라 평소 문이 닫혀있지만, 문을 두드리면 연세 많으신 두 분 노인이 나와 마음 껏 구경하게 해주신다.

 

 

 

* 술정리 서삼층석탑으로 보물 제520호이다.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같은 절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술정리에 탑이 둘이 있는 까닭에 술정리 동탑과 서탑으로 서로 이름을 달리한 것이다.  

이곳도 예전에는 집 옆의 공터에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주변이 정화되고, 집들이 모두 철거되어 탑 만이 일대를 지키고 있다.

동탑에 비하여 크기나 높이가 약간 작고 더 훼손된 모습이지만, 균형이 잘 잡힌 통일신라시대의 탑이다.

 

 

 

* 우포늪 진입로 근처에 건립된 우포늪 생태관.  

 

 

 

*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우포늪. 흔히 국내 최고(最古)의 자연사박물관으로 일컬어진다.

탐조길이나 둑을 제외하고는 인공적인 조형물이 거의 보이질 않아 원시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 비가 오는 날씨라 그런지 날아다니는 새들은 보이지 않고, 떼를 지어 앉아 있다. 탐조하는 길까지 꾸룩꾸룩하는 새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 우포늪의 철새들. 몇 마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느껴진다.

 

 

* 더욱 원시적인 모습을 지닌 쪽지벌. 

 

 

* 수리 중인 영산 만년교. 보물 제564호이며, 조선 정조 4년(1780)에 만들어졌다.

만년교 주변은 '남산호국공원'으로 되어있는데, 임진왜란, 삼일운동, 한국전쟁 등과 관련한 기념비들이 있다. 

** 서울에서부터 불어온 3.1 만세운동이, 경남지방에서는 이곳 영산에서 제일 먼저 일어났으며, 매년 삼일절 문화행사로 영산줄다리기를 한다. 영산줄다리기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6호이다.   

 

 

* 사적 제169호인 영산 석빙고.

창녕 석빙고와 마찬가지로 입구의 문을 제외하면 거의 완벽한 원형을 갖추고 있다. 

예전에는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철문을 달아 들어갈 수는 없고, 랜턴으로 비추어 내부를 살펴보았다.

창녕 석빙고와 영산 석빙고는 동일한 종류이며 상태도 거의 비슷한데, 하나(창녕 석빙고)는 보물로, 다른 하나(영산 석빙고)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 참고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빙고는 모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현재 모두 6개가 남아 있다.

창녕, 영산, 현풍, 안동, 경주, 청도 등이다.  

영산 석빙고만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고, 나머지 5개의 석빙고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