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경북 성주 지역 답사 사진(2009. 10. 4)

道雨 2009. 10. 6. 16:33

 

 

                            경북 성주 지역 답사 사진(2009. 10. 4)

 

 

 

* 세종대왕 왕자태실에서 기념사진 한 컷.

 

 

 

 

 

 

한가위 연휴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북 성주 지역의 답사를 겸하기로 하였다.

몇 년 전(2002년 겨울)에 돌아보기는 했지만, 상당한 시일이 지났고, 그 때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움이 남아있었던 터이기도 하였다.  

원래 계획에 없었던 답사인지라 답사책이나 지도, 자료를 준비하지 못해 찾는데 애로가 있기도 했지만, 내비게이션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런대로 만족한 답사가 되었다.

 

예전에 갔던 곳을 일부 제외시키기도 하고, 전에는 가보지 않은 곳도 몇 곳(성주 향교, 성산동 고분군, 회연서원) 추가로 답사하였다.

 

 

성주지역 답사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추가로 현풍의 석빙고를 답사하였다.

 

 

이날의 답사코스는 다음과 같다.

 

세종대왕자태실 - 한개마을 - 동방사터 7층석탑 - 성주 향교 - 성산동 고분군 - 회연서원 - 법수사터 3층석탑 - 현풍 석빙고

 

 

 

 

 

* 태실 입구 주차장에 설치된 태실 안내 현수막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세종대왕의 아들 20명(혹은 19명이라고도 한다) 중 유일하게, 맏아들이며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문종의 태무덤만이 이곳에 없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 있어 태를 봉안한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三國史記)』의 김유신의 장태(藏胎)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고려의 왕실에서 태봉안 양식(胎奉安 樣式)이 성립된 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태봉(胎峰)에 태를 봉안하기 위한 석물구성은 우리나라에서만 행해졌던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라 할 수 있으며, 세종대왕자태실은 왕과 태장에 대한 태실만을 조성하던 고려시대의 태봉안 양식이 변화하여, 왕과 왕비 및 그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기 시작한 조선시대 최초의 왕자태실로 그 의미가 높다 할 것이다.

 

태실의 조성 및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찾아지는 태실 관련 기록에서 언급된, 산맥이 연결된 높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에 홀로 우뚝 솟은 반구형(半球形)의 형태를 한 최적의 입지조건인 곳에 자리잡고 있다.

 

 

 

 

* 세종대왕자태실 전체 모습.

왼쪽 줄(앞줄)은 세종대왕의 서자인 군(君)들의 태무덤이고, 오른쪽 줄(뒷줄)은 세종대왕의 적자인 대군(大君)들과 적손인 단종의 태무덤이다.

남녀의 구별을 두어서인지, 공주나 옹주들의 태무덤은 이곳에 없다. 

오른쪽 줄(적자들) 맨 앞의 것이 수양대군(진양대군, 세조)의 태무덤이고, 그 뒤로 차례로 안평대군, 임영대군 등, 형제 서열순으로 배치되어 있고, 맨 마지막에는 세종대왕의 원손인 단종의 태무덤이 있다.

왼쪽 줄(서자들) 맨 앞의 것은 서자들 중 맏인 화의군의 태무덤이고, 화의군 뒤로 역시 서자들만의 형제 서열에 따라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태무덤의 앞에는 각기 태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새겨넣은 비석이 서 있으며, 사진 중앙의 귀부를 갖춘 비석은 가봉비(加封碑)이다.

 

19기의 태무덤과 태비들은 모두 세종대왕 재위기간 중 세워진 것들이며, 가봉비만 유일하게 세조 재위 기간 중에 세워졌다.

 

이곳의 공식명칭은 '성주세종대왕자태실'로서 사적 제444호이다.

2003년 3월 6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에서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되었으니, 예전에 왔을 때 보다는 격이 높아진 것이다.

 

그런데 명칭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종대왕자태실'이라고 붙여쓰니 어감이 좀 이상하다. '세종대왕 왕자태실'로 함이 더 어울릴 듯 하다.

또한 '태실(胎室)'이라는 명칭도 이상하긴 하다.

보통 태실이라 하면 독립된 건물이나, 방(실내)이 연상되는데, 이곳에는 석물로 되어 야외에 있으니 태실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러한 석물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것은 부도라고 생각되는데, 태를 넣어둔 석물은 태무덤이나 태석(胎石) 또는  태묘(胎墓), 태석 앞의 비석은 태비(胎碑), 태석이 모여있는 곳은 태석밭 또는 태석군(胎石群), 태석(밭)이 봉우리에 있을 경우 태봉(胎峰)이라고 호칭함이 타당할 듯 싶다.

태를 항아리에 넣어 실내에 안치했을 경우에는, 현재와 같이 태실(胎室)을 그대로 사용해도 되겠다.

문화재청 관계자들이라면 이러한 명칭에 대해 연구해봄직하다.

 

 

 

 

 

* 가봉비와 수양대군의 태실.

제일 뒤에 있는 것이 수양대군(진양대군, 세조)의 태무덤이고, 그 앞에 작은 비석이 태비이다. 거북이 받치고 있는 것이 가봉비(加封碑)이고, 그 앞에 몸돌이 없이 기단만 있는 것은 세종대왕의 서자인 화의군 영의 태무덤이다.

가봉비는 세조가 왕이 된 후에 자신의 태를 다른 곳에 옮기지 않고 이곳에 그대로 두면서, 이 태실의 격을 높여 태봉(胎峰)으로 부르게 했다는 내용 등, 세조를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한 비석으로, 당시 예조판서였던 홍윤성이 지었으며, 1462년(세조 8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지금 이 비석에는 글씨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세조의 왕위찬탈(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음)을 몹쓸 짓이라고 생각한 백성들이 비석의 글씨를 갈아버려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수양대군이 비록 권력은 빼앗았지만, 민심까지는 얻지 못한 것임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하겠다. 

 

이 가봉비의 비문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 태실의 모습.

태무덤의 몸돌이 없어진 것이 여럿(총 19기 중, 5기의 몸돌이 없다) 보인다. 이렇게 몸돌이 없어진 태무덤의 주인공들은 수양대군(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한,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 수양대군의 동복 및 이복 형제들이다.

태무덤에서조차 골육상쟁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우면서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단종의 태무덤이다. 이곳에 있는 태무덤 중에서 유일하게 세종대왕의 원손(손자)이다.

세종대왕의 적자들의 태무덤 중, 수양대군의 태무덤은 입구 쪽인 제일 오른쪽에 있고, 단종의 태무덤은 제일 왼쪽에 있으니 서로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다.

한편 이 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적자 중에 오로지 문종의 태무덤 만이 없다.  

단종의 태무덤과 가장 가까운 대군(영응대군)의 태무덤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세종대왕의 아들과 손자라는 구분을 두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혹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의 태무덤이 있던 자리가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했는데, 배치된 서열상으로는 맞지 않으며, 문종의 태무덤에 관한 자료를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에 관한 설화(펌글)
 
 
 
특급 명당엔 대부분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는 성주 태봉산도 예외가 아니다.
 
원래 이곳은 성주이씨의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소가 있던 곳이라 한다. 태실로 바뀐 과정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옛날 어느 도사가 이 자리를 잡아주며 ‘아무리 자손들이 잘되더라도 재실을 짓지 말 것이며, 주위의 나무도 베어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높은 벼슬길에 오른 후손들이 성묘를 할 때마다 너무 초라해 보이는 묘소에 결국 재실을 짓고 주위의 나무도 베어 시원하게 꾸미게 됐다.

 

그 후 세종대왕이 왕자들의 태실을 마련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그 임무를 맡았던 지관들이 이 부근을 지나갈 때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피한 곳이 그 재실이었다 한다.

지관들이 이장경의 묘가 명당임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했는데, 결국 왕의 명령으로 묘를 옮기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엔 이 자리가 아닌 인근에 묘소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태실지로 고시가 되면 왕릉 조성 때처럼 주위의 묘를 이장케 했기에 그 결과는 같다.

특히 이곳은 이장경의 후손인 이정녕이 당시 풍수학제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근에 묘소가 있음을 보고하지 않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태를 중요시한 것은 왕실이나 일반 백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백성들은 태반을 왕겨 속에 넣고 태워 그 재를 이른 새벽에 강물에 뿌렸다. 태어난 아기의 복을 빌면서 말이다.

왕실에선 왕손의 무병장수 이외 순조로운 왕업 계승 등을 기원하며 전국의 길지를 찾아 태를 봉안했다. 즉 동기감응에 따라 유골처럼 중요하게 취급했단 얘기가 된다.

때론 왕실을 위협하는 인물의 배출을 사전에 막고자 하는 의도로 일반인들의 묘를 수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성된 것이기에 태실은 당연히 명당일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왕릉은 거리제한에 묶여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태실은 전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그 차이엔 이러한 이유도 한몫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태실의 입지론 일반적인 명당의 제 조건 이외 충족시켜야 했던 것이 하나 더 있다. 반드시 돌혈(突穴), 즉 거북 등이나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태인 봉긋한 봉우리여야 했다는 것이다.

전국의 태실봉이나 태봉산이란 지명이 붙은 산은 모두가 이런 형태다. 마치 아이 가진 어머니의 배처럼 둥그스름하고 편안한 그런 산이다.

이곳 태봉산은 교과서적인 명당국세를 갖추고 있다. 주산이하 좌청룡, 우백호 등 주위의 산들이 모두 이 태실을 보듬고 있다. 어느 한곳도 배반된 곳이 없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내려온 물도 이 태실 앞에서 합해져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이룬다.

높이 솟구친 돌혈은 바람을 무서워한다. 하지만 이곳은 잘 짜여진 보국으로 그럴 염려도 없다. 그만큼 큰 자리다.

 

 

▨ 태실=조선시대 왕자나 공주의 태를 봉안한 곳. 당시 왕실에 아기가 출생하면 이를 관장할 관청이 임시로 설치되고 길일, 길지를 택해 태를 매장했다 한다. 태봉, 태실, 태장 등의 지명이 남아있는 곳은 대개 이 태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1920년대 말 일제는 태실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경기도 서삼릉으로 옮겼는데, 이는 조선 왕실의 위엄과 민족혼을 훼손시키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실은 드물다.

세종대왕자태실은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큰 규모이며, 비교적 온전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다.

 

 

 

 

 

 

* 한개마을의 고택. 

  누정 앞으로 휘영청 늘어진 능수버들이 눈길을 끈다.  

 

** 성주 한개마을은 성산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전형적인 집성촌이다.

 조선세종때에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이 곳에 이주하여 마을을 만들었다고 하며, 한옥 보존 마을이다. 마을 내의 주택들은 문화재자료 제354호 ‘극와고택’ 등 지방지정문화재 9동을 중심으로 전통한옥 구조가 잘 남아 있다.

이 마을의 담장은 크게 외곽담과 내곽담으로 나눌 수 있다.

외곽담은 마을의 가옥이 대체로 경사지에 위치한 관계로 산지에 접한 담과 측면담은 높은 반면 앞뒤 주택의 영역을 구획하는 담은 낮게 되어 있다.

내곽담은 주거건물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측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차단 또는 연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마을 담장의 주류인 토석담은 전통 한옥들과 잘 어우러져 자연스런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마을 속에 잘 동화되어 있다.

 

현재 이 마을의 특징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전통적인 토석담을 되살리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 성주 읍내 입구의 허한 곳에 세워진 동방사터 7층석탑.

성주의 지기(地氣)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방지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 동방사는 9세기 말 경, 통일신라 애장왕 때 세워진 대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며, 이 탑은 고려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동방사터 7층석탑의 전면 모습.

1층 몸돌에 작은 감실이 있으며,1, 2, 3 층의 지붕돌 네 귀통이의 풍탁이 걸리던 자리에는 작은 연꽃모양의 조각이 앙증맞게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층 기단부의 모습이 전통적인 탑의 기단부와는 많이 다른 것으로 보아 원래의 모습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탑의 규모와 상태, 몇 가지의 특징적인 양식, 지역적인 특색과 가치 등으로 볼 때 보물로 지정되어도 될 듯 한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제 60호)로 등록되어 있다.

현재는 7층 뿐이지만, 원래는 9층탑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 성주 향교의 모습.

오른쪽 부터 대성전(제향 공간)과 명륜당(학습 공간), 고직사가 횡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명륜당과 대성전이 향교 건물로서는 드물게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2008년 9월 3일, 보물 제1575호로 지정됨).

 

** 성주향교는 전면에서 볼 때 명륜당이 좌측에 자리하고 우측에 대성전이 위치하는 좌묘후학의 배치법을 지니고 있다.

대성전은 다포형식으로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문묘, 익산향교 대성전 외에 그 예가 드문 다포형식으로 중기의 수법들이 잘 보존되고 있다. 특히 다포건축이면서 천장을 설치하지 않았고, 다포이면서도 유교건축에 맞게 내부구성을 매우 간략하게 처리한 점 등은 주목된다.

명륜당은 전면 퇴칸을 두고 가운데 마루가 깔린 전형적인 중당협실형의 평면구성이다. 온돌방 상부는 다락을 설치하여 수장공간으로 활용한 듯하며 창호의 구성에서 고식들이 남아있다. 좌측 온돌방 측면에 문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지붕은 맞배로 처리하였다.

대성전은 건립년대가 명확히 밝혀진 17세기 초기 다포식 건축물로 건축양식에서 당시의 모습들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명륜당 또한 평면구성과 창호수법 등에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현재 향교 정비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중이라 약간 어수선하다.


 

 

 

* 성산가야의 지배계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성산동 고분군의 모습. 

총 129기의 삼국시대와 가야시대의 무덤이 지정, 관리되고 있다고 하는데,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제86호)임에도 불구하고, 내비게이션에도 나와있지 않고, 진입로에 대한 교통 안내표지판도 불완전하여 찾아가는데 애를 먹었다.

현재 진입로와 주차장 등에 대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  성산동 고분군에 대한 문화재청 자료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소재 성산<星山>의 북사면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성주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5∼6세기경 성산가야 지배계층의 집단묘지이다. (참고로, 성주지역에는 금수면 명천리 고분군과 월항면 수죽·용각리 고분군이 성산리 고분군과 함께 3대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중에서 성산리 고분군이 주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해발 389.2m의 성산 정상부에는 이 당시의 방어산성인 성산산성이 있고, 이 산성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에는 군소 고분군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형 봉토분으로 군을 이루고 있는 것이 성산리 고분군이다. 현재 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은 70여기에 불과하나 완전 파괴되어 멸실되었거나 봉토가 삭평된 고분군을 포함하면 그 수는 수백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성산리 고분군은 1918년 일본인 학자 하마다 코오사쿠(빈전경작<濱田耕作>)·우메하라 스에지(매원말치<梅原末治>) 등이 3기를 첫 조사한 이래 1∼2회 더 조사가 있었는데, 1986∼87년 계명대학교에 의해 대형 봉토분 5기가 정식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유물 등 성산가야국의 문물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고분의 구조는 크게 석실과 1∼2개의 부곽으로 이루어진 다곽식으로, 석실은 할석축조와 판석축조의 두 유형으로 나뉘며 부곽은 모두 할석축조이다.

석실은 할석축조나 판석축조 모두 수혈식이며 석실 길이에 비해 너비가 너른 장방형을 보여, 인접 고령지역의 세장방형과는 대조를 이룬다.

부곽은 주석실 피장자의 부장품곽인데, 역시 평면형이 길이에 비해 너비가 매우 너른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부장품곽에는 100여개의 다종다양한 토기가 가득 채워져 있고 한 귀퉁이만이 빈자리로 남아 있어 노비 등의 순장자가 매 부곽마다 매장되어 있었던 것 같다.

성산리 고분군의 할석축조 및 판석축조의 구조는 대구지방의 내당동·비산동 고분군과 매우 상통하고 있고 출토유물 가운데 각종 토기양식도 흡사하여 양지방의 문화적 연계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한편 성산리 58호분 석실(판석조)에서 출토된 금제태환이식, 은제팔지, 은제반지, 금동제 행엽 등은 5∼6세기의 전형적인 신라제품으로 신라와 성산가야의 문화적 교류를 실증자료로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성산리 고분군은 고분구조나 출토유물의 양식이 바로 인접한 고령지역과는 너무나 판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같은 가야문화권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양 지역간의 문화적 관련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대구지방과 일찍이 접촉하면서 신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당시 신라와 대립관계에 있던 대가야와는 자연히 상당기간 문화적 단절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고분 앞에 들어선 작은 무덤들.  최근에 무덤을 쓰면서 이웃한 묘의 떼까지 보완한 듯 보인다.

이 외에도 돌로 석축을 두른 현대의 무덤 몇 기가 이질적인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 성산동 고분군에서 내려다 본 성주 읍의 모습.

성주(星州)라는 이름은, 이 고을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회연서원의 외부 모습. 성주 읍내에서도 상당히 멀리 떨어진 호젓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 한강 정구(寒岡 鄭逑)와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남명과 퇴계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퇴계는 영남좌도의 중심지인 안동에서, 남명은 영남우도의 중심지인 진주에서 각각 전국의 인재를 대상으로 강학(講學)을 하였다.


당시 남명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퇴계의 문하를 찾기도 하며, 퇴계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남명의 문하도 찾아, 일찍이 보기드문 학문의 성세를 이루었다.


이처럼 남명과 퇴계가 살았던 시대에 태어나, 두 사람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다시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수한 이가 있으니 바로 寒岡 鄭逑이다.


한강은 1543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유촌(柳村)에서 판서공 思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淸州이며, 자는 道可이다.

선대에는 서울서 살았는데, 조부 승지공 응상(應祥)이 한훤당 김굉필의 사위가 되자, 판서공이 현풍 외가에 와 있으면서 성주 이씨와 혼인을 한 관계로, 서울로부터 성주 유촌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러니까 동방 5현중 한사람이며, 小學童子라 불리는 한훤당 김굉필이 한강의 외증조부가 된다.

한훤당 김굉필을 모신 서원이 현풍에 있는 도동서원이다.

 

 

***  회연서원에 대한 문화재청 자료


한강 정구(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자들이 세운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짓고 회연서원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숙종 16년(1690)에 임금으로부터 ‘회연(檜淵)’이라는 이름과 토지·노비를 하사 받았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서원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서원 중의 하나로 선생의 문집판 『심경발휘』가 보관되어 있고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이다.


대경재·명의재·양현청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양현청은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고, 해마다 2차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문신(文臣)이며 학자(學者)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先生)이 선조 16년(1583) 건립하였으며, 숙종(肅宗) 16년(1690) 사액(賜額)되었다 한다.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은 선조 6년(1573)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을 거쳐, 선조 13년(1580) 창녕현감(昌寧縣監)에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우승지(右承旨), 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 성천부사(成川府使), 충주목사(忠州牧使), 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 병진(兵陳), 의약(醫藥), 풍수(風水)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많은 제자를 배출했고 당대(當代)의 명문장가(名文章家)로서 글씨도 잘 썼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1977년 사당(祠堂)과 동·서무(東·西)를 개축하고 담장을 쌓았다.


 

 

 

*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법수사터 3층석탑. 

통일신라시대(9세기로 추정)에 건립된 탑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의 규모도 크고,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3층석탑의 양식을 갖추고,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모습인데, 보물로 지정이 되지 않고 유형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의아하다. 

가까운 해인사에 워낙 국보와 보물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7년 전 겨울, 어둠 속에 찾아왔던 기억이 떠올라 더욱 친숙한 느낌이 든다. 

탑의 앞 쪽으로 불상의 좌대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석물이 있다.

 

법수사는 통일신라 말기(802년) 애장왕 때 창건된 사찰로, 9개의 금당, 8개의 종각, 1,000여 칸의 건물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었으며, 현재는 해인사로 가는 길목에 3층탑만이 홀로 남아,  절터를 지키고 있으며, 해인사쪽에서 고령이나 성주로 내려오는 운전자들에게 눈요기를 해 주는 보시를 베풀어주고 있다.

 

이 탑이 있는 곳은 가야산의 중턱으로 행정구역 상으로는 성주군에 속하지만, 합천군, 고령군 등, 세군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인사와 가깝다. 

 

 

 

* 가야산을 배경으로 서있는 법수사터 3층석탑.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 

 

 

* 석등 받침으로 추정되는 석물이 있다. 탑의 하층 기단부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 법수사터를 마지막으로 성주지역 답사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중에 현풍에 있는 석빙고를 찾아보았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빙고 중에 다른 지역에 있는 석빙고는 모두 가보았는데, 오직 현풍 석빙고만 아직까지 직접 확인해보질 못했던 터였다. 

 

석빙고는 현재 6개가 남아 전한다. 모두 18세기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청도 석빙고, 현풍 석빙고, 안동 석빙고, 경주 석빙고, 창녕 석빙고, 영산 석빙고가 그것이다.

 

 

 

* 현풍 석빙고의 전체 모습.

 

 

* 석빙고의 출입문. 

 

 

* 멀리 비슬산 줄기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석빙고는 얼음 채취 후, 운반과 저장, 배수가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하천 변에 위치해 있다.

 

 

 

 

 

###  한가위 연휴를 맞아 서울 큰집에서 단체로 영화(애자)를 보고, 추석 당일에는 차례를 지내고 , 투병 중인 청주 큰누나를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주지역 답사를 한 것이다. 

2002년 첫 답사(이 때는 김천과 성주 지역을 아울러 답사하였다) 이후, 7년 만의 성주 지역 답사였으며, 그 때 가보지 못한 곳도 몇 곳 추가되어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 인터넷에서 문종의 태실을 검색해보았더니, 경북 예천군 상이면 명봉리의 명봉사 뒷편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명봉사 경내에는 '문종대왕태실비'가 있다.

이 태실비는 원래 문종의 태실이 있었던 명봉사 뒷편의 산봉우리에 태실과 함께 있었는데, 태는 일제강점기에 발굴되어 옮겨지고, 비만 남아있던 것을 사찰 측에서 명봉사 경내로 옮겨놓은 것이라고한다.

문종대왕태실비는 1735년(영조 11)에 건립되었는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추신 :  2010년 5월 3일, 문화재청은 법수사터삼층석탑을 보물로 승격 지정 예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