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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엄마의 편지 (안동 지역 답사)

道雨 2009. 10. 20. 18:53

 

 

                        

                            원이 엄마의 편지

                        -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그 애절한 사부곡

 

 

 

 

 

 

 

 

전 세계 23개 언어로 28개국에서 동시 발행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7년 11월호에 소개된 '원이 엄마'의 편지와 미투리는 전 세계인들에게 놀람과 함께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사연은, 일찍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애절한 편지와 더불어 삼과 머리카락을 섞어 짠 미투리로 대변된다.

 

명문가의 종택과 성리학 등, 딱딱한 유교문화로 대변되는 안동 지방에서 모든 이에게 훈훈하고도 애닯은 감동을 주는 원이 엄마의 편지는, 이제 안동 지역 답사나 관광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원이 엄마의 편지와 미투리를 소재로 한 소설, 국악가요, 뮤지컬, 기념물 및 조각상, DVD, 영화 등, 여러가지 콘텐츠로 개발되거나 진행 중에 있다.

 

 

 

 

* 지난 일요일(2009. 10. 18), '원이 엄마의 편지와 고성 이씨'를 주제로 하여 안동지방 답사를 다녀왔다.

고성 이씨의 종택인 임청각을 비롯하여 귀래정, 반구정, 어은정, 소호헌을 돌아보았으며, 곁들여 인근에 있는 안동민속박물관, 의성 김씨 종택, 영호루 등을 찾았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월영교인데, 안동댐 아래쪽에 낙동강을 가로질러 연결한 나무다리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로 알려져 있다. 월영교를 건너면 안동 석빙고, 안동민속박물관, 드라마 촬영세트장 등이 있다.

 

 

*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월영교와 월영정 

 

 

* 안동 석빙고(보물 제305호).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우려가 있어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인데, 입구가 옆 쪽으로 뚫려있으면서 큰 편이다. 임금에게 낙동가에서 잡히는 빙어를 진상하기 위하여 축조되었다고 한다.

 

 

* 고성 이씨의 종택인 임청각. 임청각은 보물 제182호이다.

조선 전기(1519년에 지어짐)의 건축물로서 안동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이며, 원래 아흔아홉칸 집이었으나, 일제 시대에 옆의 중앙선 철도부설로 인하여 절반 정도가 잘려나갔다.

예전에는 안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지금은 개방하여 들어가 살펴 볼 수있다. 

 

 

* 임청각의 사랑채. 군자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 얼핏 보면 행랑채로 보이는데, 안에서 들어가 보면 이곳은 안채에 딸린 곳간으로 되어있다.  

 

 

** 상해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은 고성이씨 임청각의 종손으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임청각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조상의 위패를 파묻은 뒤, 40여 명의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로 가서 서로군정서, 신흥학교를 창설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하였으며,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하였다. 

석주의 친족 중 9명이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처가 쪽 까지 합하면 47명이 훈장을 받았다고 함.

 

 

* 국보 제16호인 신세동7층전탑. 

일부분이나마 기와가 남아있어, 원래는 각 층마다 기와지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에 콘크리트로 보수를 해놓아 보기 흉한 모습이며, 1층 몸돌의 감실도 나무판자로 막아놓았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들이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이다. 오른 쪽으로는 중앙선 철도가 지나고 있다.

 

 

*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 

 

 

* 귀래정의 모습.

앞에 큰 도로가 나는 바람에 뒤로 옮겨 새로 지어졌으며, 정면이 아닌 뒤로 들어가게 되는 구조로 되어버렸다.

이응태의 묘 발굴작업 후 유물 수습이 이 귀래정 마당에서 야간 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 귀래정에는 안동국악단 소속의 자원봉사자가 국화차를 대접하면서, 이응태 묘의 발굴작업 당시 촬영된 비디오를 보여주고, 원이엄마의 애절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자원봉사해주시는  정**씨.

안동국악단 소속으로, 국화차를 대접해주고, 기념 사진도 찍어주시면서, 안동국악단 카페에 들어오시면 사진을 퍼갈 수 있다고 합니다.

 

 

* 확대 복제되어 액자에 걸린 원이엄마의 한글 편지. 

남편인 이응태의 장례 중에 쓴 편지인데, 겉면에 제목을 쓰고는 종이를 뒤집어 본문 내용을 써 나가다가, 종이가 모자라자 돌려서 쓰고, 또 모자라자 거꾸로 돌려 썼다. 그리고 마지막 날짜와 발신자는 다시 앞으로 돌려서 썼다.

 

 

** 원이 엄마의 편지 내용 전문 : 현대문으로 번역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갖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 남편의 병이 낫기를 빌면서 삼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를 안고 선 원이 엄마상(아가페상). 왼편에 있는 돌에는 원이 엄마의 편지내용을 새겨넣었다.

이 조각상의 이름을 외래어인 '아가페'라고 붙인 것은 유감스럽다. 그냥 '원이엄마'라고 했으면 더 정감있고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 원이 엄마의 편지 원본과 미투리, 이응태의 형 이몽태가 동생의 사망을 애도하면서 쓴 한시 등은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고 하는데, 토요일, 일요일은 휴관이라 관람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대학 박물관들은 휴일에 문을 닫는다. 사실 박물관 등은 휴일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데, 대학박물관은  휴관이다보니 전시된 유물을 관람할 수가 없다. 

대학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에 대해서 휴일에도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며, 복제된 유물을 다른 곳(유물 전시관, 민속박물관 등)에서도 전시하여, 관람객이 볼 수 있도록 한다면 더욱 좋겠다.

 

 

* 반구정 경내에 있는 고성이씨삼세유허비. 이수의 조각이 화려하면서 채색이 되어있다.

 

 

* 고성이씨삼세유허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

돌이 붉은 색을 띄고 있으며, 크기는 작지만 쇳덩이같은 단단한 느낌을 준다.  

 

 

* 반구정 재사의 모습.  

 

 

* 이곳은 임하댐 근처에 있는 의성김씨종택이다.  

보물 제4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6세기 말 학봉 김성일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그 곳 상류층 주택의 설계도를 가져와서 완성했기 때문에 그 배치나 구조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 많다고 한다.

(학봉 김성일의 종택은 다른 곳<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다)

 

 

* 영호루에 걸려있는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의 현판.  

낙동강의 남쪽에서 낙동강과 안동 시내를 바라보는 영호루에는 처마 밑으로 빙 둘러서, 고려 중기의 장군 김방경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글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그런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했던 정몽주와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을 세운 정도전의 현판이 기둥을 경계로 삼았지만 나란히 걸려있으니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영호루는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영남의 3대 누각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원래는 강 건너편에 있었는데, 홍수로 유실되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새로 지었다고 한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피난와서 있는 동안 영호루에 자주 올랐다고 하며, 난이 평정되고 개경으로 돌아온 뒤에 '영호루'라는 글씨를 써서 내렸다고 한다. 

공민왕이 쓴 영호루 현판은 홍수 때 두 번 유실되었는데, 한 번은 김해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또 한번은 선산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 소호헌에 있는 약봉태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약봉 서성이 이곳에서 잉태되었음을 알려준다.

약봉 서성의 어머니는 고성이씨 문중사람인데, 남편인 서해가 결혼 5년만인 23세로 요절하였음에도 약봉을 길러낸 명문가의 어머니로서 유명한 분이다.

소호헌은 조선 중기의 별당 건축으로, 본래 임청각의 이명이 다섯째 아들 이고를 분가시킬 때 지어준 것으로, 이고의 외동딸과 혼인한 서해에게로 물려내려졌다. 

 

** 약봉 서성은 6도의 관찰사를 두루 지내고, 이조판서를 제외한 모든 판서직을 역임하였으며, 약봉의 집안에서 정승만 모두 9명을 배출하였다. 

 

 

 

***   약봉 서성과 고성이씨 어머니 

           ---정승 9명 배출…‘인재산실’ 만들어

  

남편 삼년상 후 한양 이주 결단… 명문가 초석 다져


문과 합격자 105명에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9명, 대제학 6명, 당상관 28명, 정2품 이상 관리 34명, 종2품 15명. 3대 정승에 이어 3대 대제학 등 내리 6대에 걸쳐 최고위직 공무원 배출….


이른바 조선시대 ‘공무원 사관학교’를 방불케 할 정도다. 세간에서는 이를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서씨 가운데는 약봉(서성)이 유명하고, 홍씨 가운데는 모당(홍이상)이 유명하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행정의 달인’으로 꼽히는 약봉 서성(1558~1631) 가문이 배출한 인재 내력이다. 

 

약봉은 6도의 관찰사를 두루 지냈고, 이조판서를 제외한 모든 판서직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를 더욱 영화롭게 하는 것은 직계 후손들이 이룬 ‘업적’에 있다. 한 가문에서 정승 한 명도 나기 힘든데 무려 9명이나 배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배경과 비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450여 년 전 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자녀 교육을 위한 ‘결단의 리더십’에 있었다.

집안을 일으켜 조선 최고의 인재 산실로 만든 이가 약봉의 어머니인 고성 이씨 부인이다. 이씨 부인은 고성 이씨 임청각의 종손인 이명의 다섯째 아들로 청풍군수를 지낸 이고의 무남독녀다.


이씨 부인은 장님이었다. 15세 때 눈병을 앓고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한다. 결혼마저 자칫 파혼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퇴계의 문하생이었던 함재 서해는 신부가 장님인 줄도 모르고 결혼 길에 나섰다 뒤늦게 이를 알았다. 그렇지만 서해는 이에 개의치 않고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인 서해가 결혼 5년만인 23세 때 요절하고 만 것이다. 당시 아들 약봉은 세 살이었다.


이씨 부인은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 후 일대 결단을 하게 된다. 이씨 부인은 친정 부모도 시댁 부모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사고무친이었다. 그나마 서울에 사는 약봉의 중씨(작은아버지)인 춘헌 서엄이 집안의 어른 역할을 했다. 이씨 부인은 ‘아비 없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중씨가 사는 한양으로 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더욱이 당시에는 잇단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벼슬아치들이 은둔하는 분위기였다. 만약 이씨 부인이 안동에 머물렀다면 약봉은 처사로 지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안동을 떠난 이씨 부인은 처음에는 청주에 몇 달 머물렀다. 그러다 다시 한양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그곳에 더 이상 머물러선 안 되고 한양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씨 부인의 결단력은 ‘어머니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친정 가문(임청각)에서 배운 가정교육의 영향력이 컸을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약현성당 자리)에 집을 지었다.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자녀 교육에 정성을 다했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이씨 부인은 약봉을 당시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약봉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약봉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공무원의 길로 들어섰다.

약봉은 자녀들에게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선(善)을 행하도록 하게 하라”면서 ‘물태위선(勿怠爲善)’을 가훈으로 삼게 했다. ‘착한 일을 하는 데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다.


약봉의 아들 4형제는 모두 일가를 이뤘다. 큰아들은 우의정에 오르고 그의 손자 문중은 영의정에 올랐다.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은 넷째아들 경주(선조의 딸과 결혼)의 후손에서 나왔다. 그의 후손에서만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을 배출했다.

약봉의 14세 종손인 서기원(83) 씨는 “벼슬을 했지만 약봉 후손 가운데 친일파는 없으며 서재필도 약봉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이씨 부인은 안동에서 안분지족하며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녀 교육을 위해 안동에서 서울로 이사를 단행하면서 대구 서씨 가문을 조선 최고의 인재 산실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 약봉 서성 어머니의 ‘승부수’

            --- 새로운 터전에 집지어 ‘부흥’ 발판 마련

  

앞서 살펴본 약봉 서성의 어머니인 고성 이씨 부인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에 온 후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다름 아닌 집짓기였다.

그런데 이씨 부인은 서울의 약현(지금의 중림동)에 터를 잡고 일반 사가(私家)의 규모를 뛰어넘는 무려 28칸짜리 집을 지었다.

가족이라고 해봐야 아들인 약봉과 어머니 단 둘에 불과했다. 그래서 친지들이 “식구도 적은 사가집이 대청 열두 칸이면 모두 28칸이나 되는데 너무 굉장한 규모이니 줄여서 짓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이씨 부인은 “그 집이 지금은 사가로서는 너무 크다고 하시겠으나, 몇 십 년 가지 아니하여 그 집이 클 것이 없고, 이후에 이 미망인이 죽은 후 삼년상에는 그 대청이 좁을 형편이고, 만약 손자 대를 내려가면 미망인의 제삿날은 오히려 그 대청이 부족하여 다시 그 마루 앞으로 딴 마루를 늘려야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씨 부인의 예측대로 한 세대가 지나자, 명절 때에는 그의 증손자들까지 수십 명에 달하는 등 집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이씨 부인은 칠순 때 53세의 약봉 이외에 중견 문신으로 활동한 37세의 경우와 국왕인 선조의 사위인 31세의 경주 등 4명의 손자와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을 두었다.

후손들에 이르러 정승이 8명에, 판서가 34명에 달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터전의 집을 짓는데서 시작된 것이다.


이씨 부인이 큰집을 짓게 된 것은 친정인 임청각의 영향을 들 수 있다. 고성 이씨가 안동에 처음으로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 이씨 부인의 할아버지(이증)이고, 임청각을 지은 이가 큰아버지인 이명(이증의 셋째 아들)이다.

이명과 그 형제들, 그 아들들이 임청각과 강학과 풍류의 장소인 귀래정과 반구정을 지으면서 500년 ‘은둔형’ 명가의 터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씨 부인의 아버지 무금정 이고(이증의 다섯째 아들)는, 무남독녀인 딸을 약봉의 아버지인 함재 서해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에 있는 팔작지붕의 기와집과 사랑채(소호헌)를 물려주었다.

그는 자신이 못다 이룬 가문의 번성을 사위가 이루어주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사위 서해는 비록 23세로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의 손자인 약봉 서성이 마침내 그의 뜻을 이루었다.

 

 

 

**** 고성 이씨의 세보에는 안동 입향조인 이증(세조 때 현감을 지냈음)이 중앙정치(세조의 집권 등)에 염증을 느껴 귀향한 것으로 되어있으며, 이증의 아버지 이연은 귀양가서 사망한 것으로 조선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연의 여섯째 아들인 이증이 안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터전을 잡아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가 되었으며, 이증의 세째 아들인 이명(임청각)에 의해 종손의 자리가 이어졌다.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부친 이원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좌의정 이원(李原)은 자기의 집안 노비가 적지 아니한데, 한 명의 여종인 김장(金莊)을 김도련의 처에게서 사들였다는 것부터 벌써 믿기 어려우며, 또한 그의 처남인 최맹량(崔孟良)의 종의 아내인 도사가(都思加)는, 갑오년에 김도련이 벌써 소송에서 판결을 얻어 천민으로 되게 되었으니, 그의 소생인 네 사람은 맹량(孟良)의 노비가 아니요, 김도련에게서 증여받은 것이 분명하온대, 거짓 맹량에게서 전하여 받았다 하며, 또한 자식으로 거두어 기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좋고 나쁜 것을 상관하지 않고 모두 벼슬을 받게 하였으니, 곧지 못하며 바르지 못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무술년에 원(原)이 홍여방(洪汝方)과 부자 상인(商人)이었던 내은달(內隱達)의 딸을 서로 첩으로 들이려고 다투다가, 일이 발각되어 탄핵을 받았었는데, 태종(太宗)께서 그들이 모두 대신이므로 특히 용서하여 문제를 삼지 아니하고, 인하여 궁중에서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못하게 하셨는데, 태종께서 승하하시고 겨우 졸곡을 지내자마자, 원(原)은 공신이며 수상(首相)으로서 임금을 속이며 명령을 거스리고 마음대로 첩으로 삼았으니, 자못 임금의 수족과 같은 대신으로서의 의리가 없습니다.

함부로 관직을 받은 것 같은 사실은 사(赦)가 내리기 이전에 있던 것이며, 본시 문제를 삼을 만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가 사리에 어긋나게 남의 노비를 증여받아 부리고 있으며,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강제로 장가들어 첩을 삼은 사실은 사(赦)가 있기 때문에 이전에 관한 예(例)로 넘겨버릴 수 없는 일이오니, 바라옵건대 법에 의하여 철저히 징계하시와 뒷사람에게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명을 내려 공신의 녹권(錄券)과 직첩을 회수하고 자원에 따라 여산(礪山)에 안치하게 하였는데, 4년 후에 귀양사는 자리에서 죽었다.


원(原)의 자는 차산(次山), 경상도 고성현(固城縣) 출신이며, 밀직 부사 이강(李岡)의 아들이다.

아들이 7명인데, 이대(李臺)·이곡(李谷)·이질(李垤)·이비(李埤)·이장(李場)·이증(李增)·이지(李墀)다.

 

 

 

 

*****  능소화

 

 조두진의 소설 '능소화'는 원이 엄마의 편지를 소재로 하여 쓴 소설이다.

'명예', '지위', '여성'이라는 꽃말을 지닌 능소화는 예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조선시대에는 일명 '양반꽃', '어사화'라고도 하였으며, 상민이 집에다 심으면 양반들이 잡아다 곤장을 쳤다고도 한다.

궁녀의 애틋한 죽음 얘기, 능히 하늘을 이기는 소화라는 등, 전설도 꽤 많이 지니고 있다.

능소화는 선비와 같은 품위와 기개를 지녔다고 한다. 화단의 다른 꽃들이 대부분 진 뒤, 고고하게 피었다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통꽃 그대로 툭 떨어져 버린다.

비바람에 찢어져 흩어지느니 차라리 목을 꺾는 비장함이 선비의 정신과 닮아 있다고나 할까?

 

한방에서는 능소화의 꽃을 약재로 쓴다.  

맵고 약간 차가운 성질을 지녔으며, 어혈로 인한 월경 이상, 근종 등과  산후의 유방염, 혈열로 인한 피부 가려움증 등에 쓴다.

임신 중에는 쓰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