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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 사진 6 (조랑말타기, 산굼부리, 다랑쉬오름)

道雨 2009. 8. 28. 17:09

 

 

 

         제주도 여행 사진 6 (조랑말타기, 산굼부리, 다랑쉬오름)

 

 

 

* 산굼부리 분화구 앞에서 기념사진.

 

 

 

 

 

성읍 민속마을 주변에는 조랑말 타는 곳이 많이 있다.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할인 티켓을 미리 끊어왔기 때문에 조랑말타운으로 정해져 있었다.

 

산굼부리는 분화구가 잘 형성된 곳이다. 분화구의 깊이가 한라산의 백록담 보다 깊다. 그러나 물은 고이지 않는다.

성산 일출봉도 정상에 분화구의 흔적을 보이지만, 깊이가 얕아서 분화구라는 느낌이 적었는데, 이 산굼부리는 화산체는 매우 낮지만 분화구의 깊이는 100m가 넘어서 정말 분화구라는 것이 실감난다.

 

다랑쉬오름은 정말 멋있는 봉우리이다. 마치 거대한 왕릉같다는 느낌이 든다. 올라가면서도 보지도 않은 진시황의 무덤이 이렇게 생겼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다랑쉬오름을 올라가면서 보는 전망은 정말 일품이다. 오전에 갔던 우도와 성산 일출봉이 모두 보인다.

다랑쉬오름의 정상부에도 화산의 분화구가 깊이 형성되어 있다.

 

산굼부리와 다랑쉬오름, 정말 멋진 곳으로 소중한 추억의 대표격이다.

 

 

 

 

* 조랑말 타운에서 승마 체험전에... 

 

 

* 다른 관광객들이 조랑말 체험을 하고있다.  정해진 코스를 두 바퀴 돈다.

 

 

*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말들...

 

 

 * 집사람이 내 앞에서 가고 있다.

* 둘이서 함께 조랑말 기념 사진.  

 

 

* 오른쪽에 머리에 흰 줄이 길게 나있는 말이 내가 탄 말이다.

 

** 너무나 온순한 말, 이 놈 때문에 울 뻔 했다.

집사람이 탄 말은 끌고가는 마부가 있었지만, 내가 탄 말은 마부도 없이 그저 앞의 말을 따라간다. 순종하도록 잘 길들여져 있었기에 다칠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태우고는 너무나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오늘 이 더운 날씨에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을 태웠을까?

너무나 안쓰러워서 한바퀴 돌고는 내리고 싶었으나, 두번째 바퀴를 돌 때 앞의 마부가 속도를 내라고 집사람이 탄 말을 재촉하니 내가 탄 말도 덩달아 따라가느라 힘들게 속도를 낸다. 설 수도 없었다.

내가 탄 말의 갈기와 목을 만져주면서 '미안하다, 힘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지금 이렇게 사진 올리고 글을 쓰면서도 그 때가 생각나 눈물이 어린다.

 

오전에 우도에서 쓰러져있는 말을 보고 난 후라 더욱 안타까운 맘이 들었나 보다.

 

제 값을 지불하는 착한 소비자 운동이 생각나고, 이번의 제주도 여행 중 유일하게 후회스런 일이 되었다.

 

가능하면 조랑말에게도 하루에 몇 번 이상 태우지 말라는 기준이 필요할 것 같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는 특히 그러하다. 

 

 

 

 

조랑말 타운에서 산간으로 좀 더 들어가면 산굼부리에 닿는다.

굼부리는 화산체의 분화구를 가르키는 제주말이다.

오름은 독립된 산 또는 봉우리를 이르는 제주말이며, 한라산 자락에 산재하는 기생화산들을 일컫는다. 제주도에는 수 많은 오름들이 있는데, 몇몇을 제외한 오름 대부분은 크고 작게 저마다에 어울리는 형태의 굼부리(분화구)를 갖고 있다.

 

산굼부리는 산체에 비해 매우 큰 화구를 가진 특이한 형태의 오름이다. 더 신기한 것은 아예 화산체 없이 드넓은 들판 한가운데가 움푹 꺼져들어간 것 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산굼부리의 화산체의 높이는 약 30m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그래서 관광객들이 올라가기 쉽다), 분화구는 둘레 950m이고, 깊이는 132m나 된다. 참고로 백록담의 분화구 깊이는 115m라고 한다.

이렇게 화산체의 높이가 낮은 것은, 화산이 분출하면서 주로 가스만 터져나오고 마그마나 화산재 같은 물질은 뿜어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분화구를 '마르(Maar)'라고 하는데, 산굼부리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마르형 분화구로,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산굼부리로 올라가는 길 옆으로 보이는 무덤들.

제주도에서는 이렇게 무덤 주위로 야트막한 돌담(경계)을 쌓는 풍속이 있다.

 

 

* 전망대의 뒷편으로 분화구가 132m의 깊이로 움푹 꺼져 있다.

 

 

* 산굼부리의 분화구에는 백록담과는 달리 물이 고여있지 않다. 아무리 많은 비가 와도 산굼부리는 모든 물을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분화구 안의 숲은 상록활엽수림과 낙엽활엽수림이 공존하는 특이한 식생을 보인다. 지하로 움푹 들어가있기 때문에 바깥 기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한겨울에도 꽃이 필 만큼 따뜻하며, 태양이 비치는 각도와 깊이에 따라 난대성, 온대성 고산식물들이 분포한다.

 

 

 

* 산굼부리의 사슴상.  

 

 

* 산굼부리 입구의 돌로 만든 집.

지붕 위의 작은 돌들이 마치 궁궐 지붕의 잡상처럼 보인다. 

가운데 굴뚝 부분은 답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답은 마을의 경계나 허한 곳에 원통형 돌탑을 쌓아 부정과 악을 막고 마을을 평안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육지의 솟대나 장승에 해당한다.  

답은 대체로 밑변이 넓은 원통형으로 쌓은 돌무더기 탑 모양이거나, 돌무더기 위에 돌하르방이나 동자석 같은 석상, 또는 새 모양의 자연석 또는 석상을 세운 모습이다.

제주의 민속을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로서, 제주도 곳곳에서 전통의 모양 그대로이거나, 또는 현대적으로 조형화된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용암수형. 둥근 구멍은 나무가 있었던 흔적이다.

 

 

* 화산탄.  화산 분출시 공중으로 솟아오른 용암배설물이 굳어진 것이다. 

 

 

 

 

산굼부리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시간 관계상 오늘의 답사 여정 중에 남아있는 세 곳(송당본향당, 비자림, 다랑쉬오름) 중에서 다랑쉬오름을 선택했다.

 

'다랑쉬'라는 이름은 오름에 쟁반같이 뜨는 달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하여 붙인  제주말이다.

 

원뿔 모양의 다랑쉬오름(382.4m)은 산세가 가지런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오름의 여왕'이라고할 만큼 우아하다. 한복 치마를 벌려놓은 듯 가지런한 외형도 아름답지만, 자연친화적으로 조성한 산길을 오르며 갖가지 들풀과 마주치게 되고, 산을 오르며 내려다 보이는 경관은 정말 훌륭하다.

 

그리고 보는 이마다 탄성을 내게 하는 정상의 분화구 또한 멋지기 그지없다. 깔대기 모양으로 움푹 패여 있고, 바닥에 풀이 무성한 이 분화구는 둘레 1.5km, 깊이 115m(한라산 백록담 분화구 깊이와 비슷하다)로 상당히 크고 깊다.

 

 

* 다랑쉬오름 안내판. 다랑쉬오름은 한적한 곳이면서 너무도 분위기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 다랑쉬오름 오르는 길. 정상까지 이렇게 친환경적이고 안전하게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풀밭 사이를 걷는 느낌이다.

산 아래의 검은 밭이 퍽 비옥해 보이며, 멀리 다른 오름과 풍력발전을 하는 풍차들이 보인다.

 

 

 

 

* 다랑쉬오름의 정상 근처에서 보이는 전망.

멀리 바다 쪽으로 오전에 갔던 우도가 보이고, 그 오른편에 케이크 처럼 솟은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바로 앞의 낮은 오름은 아끈다랑쉬오름(다랑쉬오름에 버금간다는 뜻)이며 얕은 분화구의 흔적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펼쳐진 밭의 경계선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산굼부리의 분화구 안에는 큰나무들이 숲으로 우거지고 다양한 식생을 보이는데 비하여, 다랑쉬오름의 분화구 안에는 나무들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보니 분화구 안 쪽을 찍은 사진이 없어서 아쉽다. 동영상을 찍었나?  

 

 

 * 분화구가 보이는 곳에서 오름의 정상부까지는 조금 더 올라가야 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서 그냥 내려왔다.

 

 

다랑쉬오름을 올라가 보기를 정말 잘했다.

바위 하나 없고, 모진 곳 하나 없이  둥그런 산세, 정말 꼭 커다란 왕릉같은 느낌을 준다.

올라가는 동안 내려다 보이는 경관은 또한 얼마나 시원하고 자연스러운지 모른다.

넓게 펼쳐진 들판 사이로 군데군데 솟아오른 오름들, 그리고 분화구까지...

누군가 오름의 여왕이라고 별명을 붙였다는데, 정말 언젠가 제주도에 또 온다면  다시 또 오르고 싶다......

 

 

 

이틀간의 제주도 여행을 모두 마치고 제주로 들어오는 길인데, 4.3 평화공원 표지판이 보였다.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진 후라 관람할 수는 없겠지만, 4.3 항쟁에 대한 의식이라도 다져보고자 잠시 들러보기로 하였다.

사실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4.3 항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유적지를 돌아보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었다.

 

 

* 어둠 속에 방문한 4.3 평화공원. 야외에 세워진 돌무덤(?)에 여러 편의 시가 걸려 있었다. 

 

 

 

 

 

                        돌무덤

                                                                           - 김 석 교 -

 

 

                        이 커다랗고 무거운 조개껍질

                        또 다시 갇힌 어둠이 싫다

                        이름 석 자의 헛무덤이 싫다

                        이승에서 뚫린 가슴 답답한 억장

                        구천에선들 풀리겠느냐

                        해원이라 화해라 들까불며

                        가슴 짓누르는 무거운 돌만 얹어놓고

                        햇빛 한 줌 없이 혼백마저 가둬버린

                        돌무덤이 답답하기만 하구나

 

                        소처럼 일하고 저녁이면 도란도란

                        목낭 그늘 아래 모깃불 피우던 사람들

                        학살의 광풍에 스러져

                        들까마귀 밥 되어버린 이들에게

                        이 무거운 시멘트 돌덩이는

                        고인돌일 뿐이구나

                        일백 평 굴 속에 울리는

                        일만 사천 신위의 신음소리 들으면

                        아직 용서도 해원도 멀기만 하구나

 

                        해마다 4월이 와도 왜 비바람은 세차기만 한지

                        이 평화공원에 까마귀는 왜

                        떠나지 않고 울고만 있는지 ......

 

 

 

 

* '목낭'은 팽나무를 가르키는 제주말이라고 합니다.

* 김석교 : 제주작가회의 회원

 

 

 

 

 

 

 

                            제주 4.3 항쟁, 현대사의 비극

 

'4.3'이라는 숫자는 제주도 무장대가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세력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무장대는 단독선거, 단독정부의 반대와 조국의 자주통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로부터 6년 6개월 동안 벌어진 사건의 전개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발발 원인도 5.10 총선 반대라는 정치적 현안에서부터, 경찰의 '3.1절 발포사건', '고문치사 사건' 등 다양하다.  

 

일제는 2차대전 말기 미군에게 계속 밀리게 되자,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 결전의 최후 보루'로 설정, 7만 명 가량의 일본군을 제주도에 배치했다. 이는 한반도에 배치된 전체 일본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곳곳에 비행장을 만들고, 해안마다 굴을 파는 등,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8.15 해방은 제주도민에게 있어서 착취와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다.

그러나 미 군정이 실시되면서, 도민을 탄압하던 일제 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옷을 갈아입었고, 옛날의 친일파는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다시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3.1사건'은 4.3의 도화선이 되었다.

3.1사건은, 3.1절 기념일인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앞 광장에서 시위 군중에게 경찰이 무차별 발포, 6명의 사망자가 생기면서 비롯됐다. 이에 항의해 각 직장과 학교, 심지어 제주 출신 경찰관까지 가세한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되고, 미군정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때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하에 억지로 죄인을 만들어 금품을 갈취하고 주민을 탄압하는 등, 백색테러를 자행해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4.3 발발 직전까지 1년간 도민 2,500여 명이 구금되고, 특히 1948년 3월 경찰에 의한 고문치사 사건까지 발생해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때마침 '5.10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된 민심을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진 5.10선거 반대투쟁과 연계시켰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한라산 기슭 오름 봉우리마다 피어오른 봉화를 신호로 500명 가량의 무장대가 11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원의 집을 습격하면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무장대는 단독선거, 단독정부 저지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 그리고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추방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사태 초기에 이 사건을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기구인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경찰 1,700명을 제주에 파견하였으며, 서청단원 500명을 증파했다. 그러나 응원경찰 등에 의한 토벌작전은 오히려 민심을 자극, 많은 주민들이 산 속으로 피신하는 결과를 빚었다.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사태 내내 토벌대에게 붙잡혀 총살됐고, 마을에 남아있던 그들의 가족들도 소위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집단 학살됐다. 미군정은 그동안 관망상태에 있던 모슬포 주둔 경비대 제9연대(연대장 김익렬 중령)에도 진압작전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고, 부산 주둔 5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 제주에 파병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9연대는 이 사건을 제주도민들과 경찰 및 서청같은 극우청년단체간의 충돌로 여겨,'선선무(先宣撫) 후토벌(後討伐)' 원칙을 세우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여 평화회담을 성사시켰으나, 경찰과 우익청년단에 의한 평화협상 방해사건이 발생해 사태는 다시 악화됐으며, 김익렬 연대장은 전격 해임되었다.

이후 군병력과 경찰대가 크게 증강되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전개되었으며, 여수 주둔 14연대의 1개대대를 제주에 추가 파병하도록 명령을 하였는데, 제주에 파병될 예정이던 여수 14연대가 "동족상쟁하는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면서 총부리를 돌려 이른바 '여순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전국이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우익인사와 경찰관들의 희생이 컸다. 

이 여순사건은 군내부적으로는 대대적인 숙군선풍을, 제주사태에 대해서는 참혹한 양민학살의 유혈극을 몰고왔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에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인정,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고, 중산간마을의 주민들에게는 해변마을로 이주하라는 소개령이 발동되었는데, 일부 마을의 경우 소개 명령이 채 전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토벌군은 무장대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제거한다는 이유 하나로 1백여 중산간마을 민가들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사살했다.

군경의 초토화작전으로 더욱 쫒기게 된 무장대원들은 그들의 아지트를 산중 깊숙하게 옮기는 한편, 때때로 해변마을에 대해 보복기습전을 시도하였으며, 경비대사령부는 육해공 합동작전을 펼쳐 무장대를 완전히 섬멸하고, 1949년 5월 15일에는 제주도 전투사령부가 해체되었다.

 

이로써 4.3은 다 끝난 듯 했으나 6.25가 발발하면서 제주도는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7월로 접어들면서 전선이 크게 남하하자, 4.3사건 연루자 가운데 이미 훈방됐거나 석방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하였다. 이들은 제주비행장과 모슬포(알뜨르) 비행장 등지에서 처형되었다. 바다에 수장당한 주민도 많았고, 육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4.3사건 연루자 가운데 북한군의 점령 직전에 즉결처분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953년 1월에는 유격전 특수부대가 한라산 작전지역에 투입되어 잔여 무장대들을 거의 토벌하였으며, 1954년 9월 21일에 이르러 금족지역을 해제, 사태 발생 6년 6개월 만에 평시체제로 환원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4.3이 갖는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4.3을 주목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엄청난 인명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이 국가기구에 의해 자행됐다는 점이다.

미군정보보고서(1949년 4월 1일자)에는 "1949년 3월 현재 사망자 숫자는 1만 5천명으로 추정된다" 면서, "사망자들은 적어도 80% 이상이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보고 시점은 아직 사건이 종결되지 않은 때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략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9에 해당된다. 이중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비율은 90%에 육박한다.

 

가장 큰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약 4개월간에 걸쳐 벌어졌다. 소위 '초토화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토벌대는 해변에서 약 5km 이상 떨어진 마을(제주에서는 이를 '중산간마을'이라 부른다) 주민들이 무장대를 지원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갑자기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질렀고, 불기운에 놀라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80대 노인에서부터 서너살난 어린아이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중산간마을은 글자 그대로 초토화됐다.

해변마을에서도 젊은이가 사라진 집안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총살했고, 무장대 지원자 '명단'이 발견됐다며 집단학살을 했다. 더구나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을 해 단순히 총에 맞아 즉사한 경우는 이야깃 거리도 되지 않는다.

 

대량 인명 희생을 초래한 초토화작전은 계엄령에서 비롯됐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제주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이 계엄령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해 강경작전을 전개한 까닭은 정부 수립 이후 계속된 정치적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 뿐 아니라 4.3 학살극의 실질적 책임은 미군에게 있다.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계속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제주 학살극의 현장에는 미군의 임시군사고문단, 방첩대, 제59중대 등이 있었고, 서북청년단의 제주 파견을 주선하였으며, 제주 작전을 지휘, 통제했다.

 

 

* 위 4.3에 관한 글은 '답사여행의 길잡이(돌베개)'에서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