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승정원과 청와대

道雨 2010. 7. 7. 15:07

 

 

 

 

               승정원과 청와대 
 

 

» 정남기 논설위원
당파싸움과 관리들의 부패로 얼룩졌던 조선도 왕명 출납에서는 기강이 엄정했다.
승지들에게는 작은 실수나 의혹도 용인되지 않았다. 왕명을 살짝 부풀리거나 줄여 뜻을 왜곡할 소지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 즉위 직후 사헌부가 의관 한명을 탄핵했다. 침을 잘못 놔서 인조를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사헌부는 안율정죄(按律定罪,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린다)를 청했다. 그러나 승정원이 왕명을 전하는 과정에서 ‘안율’ 두 글자를 빠뜨렸다. 권력의 핵심에 있었지만 해당 승지는 파직을 면하지 못했다.(<승정원일기>, 박홍갑 등 지음)
 

신하의 청에 임금이 말이 없을 때는 <승정원일기>를 빈칸으로 두거나, “아무 말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객관적인 사실 기록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대신 신하들이 내시 등을 통해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조정의 실력자들은 승정원을 무시하고 내관을 통해 직접 임금을 알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승정원의 반발을 무릅써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내관 등의 발호가 많지 않았던 것도 승정원 체제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총리실 민간인 사찰을 계기로 영일·포항 공직자 모임인 ‘영포회’가 주목받고 있다. 회원들이 권력 핵심부 요직에 자리잡으면서 지휘·보고 체계를 무시하고 권력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어느 시대에나 권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세력은 있다. 관건은 이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다.

조선 때는 승정원 체제를 통해 임금 주변의 기강 문란과 권력의 사유화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었다. 특히 <승정원일기>는 임금의 언행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공개함으로써 측근들이 농간을 부릴 여지를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청와대 체제가 승정원보다 낫다고 하기도 어려운 듯하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