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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을 보물로 여겼던 김계행

道雨 2010. 9. 8. 14:51

 

 

 

 


 

출발은 늦었지만 영예로웠던 김계행의 관력官歷


 

김계행은 청백리이기 이전에 선비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른 삶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빈곤을 참으면서 인격을 도야하고 학문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관직에 나가면 임금을 보필하여 올바르게 정사를 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설령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임금의 눈 밖에 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끝내 임금이 잘못을 고치지 않고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나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의 방식이었고, 김계행의 삶은 그 전형이었다. 그는 후손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지 못했다. 그가 물려준 것은 청렴하면서도 방정方正했던 삶의 자세뿐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적 유산은 오랫동안 그 후손과 지역 사람들에게 기억되었고 삶의 지표가 되었다. 그의 삶을 통해 선비들의 삶과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김계행은 1430년(세종 12)에 태어나서 1517년(중종 12) 보백당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생원시에 입격入格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문과는 많이 늦어져 51세가 되어서야 급제하였다. 하지만 과거 급제에 연연하거나 관직에 나가려고 초조해하지 않았다.

당대의 학자였던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과 도덕 수양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33세 때인 1462년(세조 8) 경상도 성주의 향학 교수를 시작으로 관로官路에 발을 들인 이후에는 관직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인격과 능력을 인정한 주변 사람들의 추천으로 주로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51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그가 1년이 지나도록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시독관侍讀官 정성근鄭誠謹이 국왕에게 그의 등용을 직접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가 계기가 되어 1481년(성종 12)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충언 때문에 미움을 사 고령현감으로 밀려났다. 여기에서 인정仁政을 베풀어 치적을 쌓아 다시 중앙관직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대부분의 관직을 언관으로 지냈다. 홍문관에서는 부수찬, 부교리, 교리, 응교, 전한, 부제학을 지냈는데, 교리와 응교를 각각 두 차례 지냈다.

사헌부에서는 장령, 사간원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 대사간을 두루 역임하였고, 대사간도 두 차례 올랐다. 또 표연말表沿沫, 최부崔溥, 유숭조柳崇祖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뽑혀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승정원의 동부승지, 우승지, 도승지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이조정랑, 예조참의, 병조참의도 지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관직 생활은 불과 17년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만큼 관직 교체가 잦은 편이었다. 그것은 그가 임금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直言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하는 일 없이 관직이나 보전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정책에 잘못이 있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평소의 소신과 학문을 바탕으로 조리 있게 비판하였고 조금도 시류나 인기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외척의 전횡이나 총신의 부정부패, 제도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행위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와 국정의 혼란상을 상세히 비판하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자주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등용되었고, 그때마다 관직은 조금씩 높아졌다. 그를 아끼는 동료들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에 대한 동료들의 애정은 그의 퇴직 이후 벌어졌던 두 차례의 사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1498년(연산군 4) 그의 친우였던 김종직이 지었던‘조의제문弔義帝文’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던 무오사화 때, 그 역시 연루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1504년(연산군 10) 벌어진 갑자사화 때도 역시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다. 이때는 연산군의 처형이었던 신수근愼守謹이 그가 평소 외척과 내시의 부정부패에 대해 강경한 비판을 일삼은 데 앙심을 품고, 갑자사화에 그를 끌어들여 해치려 했었다.

또 그 이듬해에는 연산군이 직접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횡포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그를 국문하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연산군 말년의 몇 년 사이에 3차례 국문을 당하며, 생사의 기로에 섰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성품과 인격을 흠모하고 그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선후배 관원들의 적극적인 비호에 힘입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동료들과 죽음을 함께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 했다.


 

 

 


 

청백을 유산으로 남기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권력에 연연하지 않은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그의 조카이자 국왕의 총애를 받던 국사國師 학조學祖와의 일화에서 잘 알 수 있다.

학조는 늦은 나이에 향학 교수라는 낮은 관직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숙부를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일이 있어 성주에 가게 되자 향교로 그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성주 목사가 김계행을 불러오게 할 테니 갈 필요 없다고 만류하면서, 사람을 보내 그를 오게 하였다. 그는 가지 않았고, 학조는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가 뵈었다.

그러자 김계행은, ‘네가 임금의 은총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구나. 나이든 삼촌에게 찾아와 인사드리지 않고, 도리어 나를 부르느냐?’ 하고 나무라면서, 살집이 터져 피가 나기 직전까지 회초리를 때렸다. 조금 뒤 학조가 변명하면서, ‘숙부께서 오랫동안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셨는데, 혹 관직에 뜻이 있으면 힘을 써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화를 내면서, ‘내가 네 덕으로 관직에 오른다면, 다른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느냐?’ 하면서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당시 학조의 권세가 매우 커서, 그가 성을 내면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김계행은 조금도 그에 개의치 않았을뿐 아니라, 학조가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할까봐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품은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은거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연산군 즉위 이후 대사간으로 재직하면서 외척과 권신權臣이 국왕의 총애를 믿고 온갖 횡포를 자행하자, 여러 차례 논박論駁하며 잘못을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임금의 잘못을 세 차례 간언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 한다’는 선비의 도리를 실천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고향 집 옆에 보백당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은거하며 후진 양성과 자손 교육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그가 후진 양성에서 중요시했던 것,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평가할 때 자부할 수 있었던 것은 첨령 결백한 처신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 ‘보백당’이라는 이름에 대한 해설로 지은 다음의 시이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                                           吾家無寶物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네                                 寶物惟淸白


 

자기 가문의 자랑은 청백한 삶을 유지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종하면서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


 

이어 자신의 삶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오랫동안 임금을 지척에서 뫼시었다. 그러나 조금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살았을 때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니 장례 역시 간략하게 치르는 것이 좋겠다. 또 절대 비석을 세워 내 생애를 미화하는 비문을 남기지 말아라. 이는 거짓된 명성을 얻는 것이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자신이 모시던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던 그로서는, 임금을 잘 보필하여 성군聖君을 만들지 못한 자책만 남은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화재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