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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의 의지, 그리고 내훈(內訓)

道雨 2010. 9. 8. 15:06

 

<문화재 사랑>

 

 

 

 

      인수대비의 의지, 그리고 내훈(內訓)

 

 

 

 

 

궁궐을 나오고 다시 궁궐로 들어가고


인수대비는 남편 의경세자가 죽고 난 후 일개 과부로서만 살지는 않았다. 세자빈의 자리를 잃고 궁궐을 나와야 했지만, 결국 자신의 둘째아들이 왕(성종)이 될 수 있게 했으며 또 최초의 여성 교훈서 『내훈』을 만들었다.

인수대비는 대단히 의지적인 인물이었다.

인수대비가 남편 의경세자가 죽고 궁궐을 나오게 됐을 때 심경은 어땠을까?

물론 이때 인수대비는 인수대비라고 불리지는 않았다. 세자빈 시절이었으니 수빈粹嬪이었다. 남편이 세자가 된 것은 시아버지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니까 인수대비는 처음에는 종친가의 여러 며느리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르자 세조의 맏며느리로서 궁궐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큰 변화였다.

처음부터 기대한 일은 아니지만, 세자빈의 위치가 주는 만족감은 작지 않았을 것이다. 세자빈이란 곧 다음 왕대의 왕비가 되는 존재이며 또 왕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세자빈이 된지 2년여 만에 그 지위를 잃고 만다. 남편 의경세자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제 왕세자의 지위는 시동생(훗날 예종)에게로 넘어 갔다. 그녀는 세자빈 자리를 내놓고 궁궐을 나와야 했다.

21살에 갓난쟁이(성종)가 딸린 거의 청상과 다름없는 과부생활이 시작되었으니 그 심정은 복잡하고 또 공허했으리라.

그러나 인수대비는 과부로서 위축된 생활만을 하지는 않았다. 실록 기사들을 보면 그녀는 크고 작은 왕실행사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특히 동서지간인 중전과 함께하는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완전히 뒷방 과부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는 훗날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왕으로 지목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세조는 첫째 손자인 월산대군을 밀쳐두고 둘째인 자을산군을 예뻐했다고 한다. 태종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다. 자을산군이 대궐에 자주 들어가서 할아버지와 접촉을 했다는 얘기인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인수대비가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권력에서 완전 소외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은연중에 작용한 것은 아닐까?

인수대비는 사실 남편이 죽고 없었지만 맏며느리는 맏며느리였다. 그 아들들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살아있었다. 

여성지식인 인수대비


틈틈이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외에 인수대비는 꽤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17년 후(1475, 성종6)의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 최초의 여성 교훈서인 『내훈』을 만든 것을 보면 그렇다.

“『소학』, 『열녀』, 『여교』, 『명감』 같은 책들이 지극히 간절하고 분명했지만 권수가 자못 많아서 쉽게 알기 어려우므로 이에 그 중에 중요한 말을 뽑아서 7장으로 저술하여 너희들에게 주노라”

인수대비 자신이 『내훈』제작 과정을 설명한 말이다.

『소학』이나 『여교』 등을 면밀히 분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쉽지 않아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간추려 『내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충실한 자료 조사와 연구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 수집에는 아마도 친정집 도움이 컸을 것이다. 청주 한씨 집안은 고려 말 조선 초에 부상한 명문 가문이었다. 조선 초기에만 모두 4명의 왕비를 배출했다. 또 두 명의 딸을 명 황제 후궁으로 보냈다.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이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누이를 명 황실에 보낸 것이다. 이로 인해 한확은 수시로 명나라를 드나들 수 있었다. 명 황제들은 자신의 처남인 한확이 입조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했다. 당시 한확 집안 남자들치고 명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선진국과 통로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수대비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빨리 익숙해졌을 것이다. 실제 인수대비는 고모와 직접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여러 책을 구입하고 비교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국제적인 집안 분위기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인수대비는 지적 능력이 뛰어났다. 훗날의 일이지만,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를 때 인수대비가 수렴청정할 것을 권했다. 인수대비가 ‘문자도 알고 사리에 통달하니 가히 국사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시어머니가 인정할 만큼 인수대비의 지적 능력은 뛰어났던 것이다.

왜 『내훈』을 만들었는가?


흔히 『내훈』은 여성들을 단지 유교적 윤리규범 속에 넣으려했다는 것으로만 주목된다. 정작 왜 인수대비가 여성들을 윤리규범 속에 넣으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인수대비는 당시 최고의 여성지식인이었다. 그런 인수대비는 어떤 이유에서 여자들을 규범화하려고 했던 것일까?

 

“성인聖人의 학문을 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귀하게 되면 이는 원숭이에게 의관을 갖추어준 것과 같다.”

《내훈》의 서문에서 인수대비가 한 말이다. 여기서 ‘성인’이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을 말한다.

성리학은 늘 이 ‘성인되기’를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인수대비는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성인’이라는 주제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여성들은 아직 불교적 분위기에서 살고 있었다. 특히 왕실 여성의 불교 의존도는 상당히 높았다. 인수대비 자신도 불교를 좋아했다. 직접 불교 옹호론을 써서 아들 성종을 압박한 적도 있다.

그러나 불교를 옹호한다는 것은 이미 불교가 세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인수대비는 조선사회가 곧 불교가 아닌 성리학에 의해 주도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수대비는 《내훈》에서 ‘딸이나 며느리들의 어리석음을 근심하여’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아직 불교나 기존 관습에 익숙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새로운 사상에 낯설어 했다. 인수대비는 여성들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보았다.

‘딸과 며느리’인 여자들이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여자들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음을 근심’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내훈』을 만든 것은 모든 딸이나 며느리들이 새로 변화해갈 유교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사회의 특성을 파악하지 않고는 그 사회의 주류로서 살아갈 수 없다. 성리학으로 전환해 가는 조선사회에서 성리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주류사회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인수대비는 여성들이 보다 원만하게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바랐다. 아직 남자 성리학자에게서도 볼 수 없는 식견이었다.

인수대비가 궁궐을 나올 때는 막막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이 시기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둘째아들이 왕으로 선택될 수 있도록 자식 교육에 힘썼으며 또 왕실과의 관계도 유연하게 유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 여성사에서 의미 있는 『내훈』을 집필했다.

후대에 임윤지당, 강정일당과 같은 여성 성리학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기저에 인수대비가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인수대비를 보면 왕실의 여성들이 정적인 존재들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글·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