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빚 권하는 세상, 그 이유

道雨 2011. 6. 7. 11:27

 

 

 

             빚 권하는 세상, 그 이유 

 

맛난 열매를 내밀면서 금단이니
“먹지 말라” “먹은 네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죄악이다

 

 

» 윤석천 경제평론가
누군가를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돈을 빌려주면 된다.

그것도 가능하면 넘치게 빌려주는 게 좋다.

이로써 끝이다.

완력을 사용하거나 협박할 필요도 없다.

호랑이도 빚을 지는 순간 순한 양이 된다.

빚을 주면 상전, 빚을 쓰면 종이 되는 게 세상이다.

 

 

거리의 수많은 사람 중 빚 없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은 주택담보 대출, 새롭게 직장생활을 시작한 청춘은 자동차 할부 대출, 내세울 직장이 없는 사람은 대부업 대출, 학생들은 학자금 대출. 최소한 신용카드라도 쓰고 있으니 빚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빚쟁이다.

 

 

빚은 엄청난 심리적 부담이다.

부채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행동을 제약하는 덫이다.

우리 대부분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일한다. 금방이라도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지만 신용카드 대금과 대출금 이자가 발목을 잡는다.

일은 어느새 고달픈 의무가 된다. 눈 감고 입 닫고 귀 막고 그저 소처럼 일만 할 수밖에 없다. 빚을 갚지 못하면 불량 인생이 돼버리는 세상이니 꼼짝할 수가 없다. 노예의 삶이다.

 

바로 자본이 바라는 세상이다.

자본은 순한 양의 사회를 원한다. 자신들에게 길들여져 시키는 일만 묵묵히 하기를 원한다.

빚은 그 도구로 사용된다.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빌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젠 학생까지 빚쟁이로 만든다.

이미 대학은 빚을 내지 않고는 다닐 수 없는 ‘인골탑’이 돼버렸다.

자본은 쥐새끼처럼 영리하다. 참새 머리에 굴레도 씌울 정도다.

빚의 올가미로 묶어 젊음의 혈기와 저항 본능을 효과적으로 억누르고 있다.

 

 

현 정권의 가장 큰 실정 중의 하나가 빚의 남발을 통해 국민들을 부채의 늪에 빠뜨린 거다.

빚을 무서워하지 않는 세상을 만든 거다.

‘부채 늘리기’가 경제정책의 거의 다였다.

‘돈 빌려주기’가 서민정책으로 포장되어 남발되었다.

 

전셋값이 오르면 전세 대출을, 등록금이 오르면 학자금 대출을 늘렸다.

이게 정책이었다.

이도 모자라 대부업체라도 된 양 수많은 대출상품을 만들어냈다.

이름도 기막히다. 햇살론, 미소금융 등등.

 

정부가 이러니 민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한국은 대부업체 천국이다.

케이블방송의 광고는 이들이 장악했다.

대한민국은 누가 빨리 많이 빌려주느냐의 경연장이 된 지 오래다.

이 지경이니 빌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달콤한 열매의 유혹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맛난 열매를 내밀면서 금단이니 “먹지 말라”거나 “먹은 네가 나쁘다”고 하는 것은 죄악이다.

대부분은 자본이 쳐놓은 거미줄에 속절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다.

 

 

애초 빚을 권하지 말았어야 했다.

빚을 쉽게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어떤 정책이 좋은지는 분명하다.

빚은 늘리기보단 줄이는 게 옳다.

그런데도 현 정권은 여전히 ‘빚 늘리기’에 분주하다. 갚을 여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심 쓰듯 돈을 빌려주고 있다. 가계대출은 늘기만 한다.

 

누구를 위한 ‘빚 늘리기’인가.

자본을 위해서다.

설사 그게 빚일지라도 대중의 소비가 있어야 자본의 이득이 보장된다.

빚의 올가미로 묶어두어야 순한 양을 만들 수 있다.

그걸 위해 빚이 강권되고 있다. 빚에 짓눌린 서민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


 

빚은
개인은 물론 국가까지 노예로 전락시킬 수 있다.

그리스는 추가 구제금융 대가로 일부 주권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이런 마당에 무디스의 한국 가계부채에 대한 경고를 무심히 넘기긴 힘들다.

1990년대 말이 자꾸 중첩된다.

 

빌리라 권하는, 빌릴 수밖에 없는 세상의 끝은 뻔하다.

 

< 윤석천 경제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