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진남관과 충무공 이순신 유적 답사 사진 (2011. 2. 6)
여수는 한려수도(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시작이자 종착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 본영이 있던 곳이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게 되면서 여수는 삼도수군통제영을 겸하기도 하였다.
여수시와 여천시, 여천군이 1998년에 여수시로 통합되었다.
여수는 항구도시이자 공업도시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적과 동백숲으로 유명한 오동도 및 우리나라 4대 관음도량 중의 하나라고 일컫는 향일암 등, 많은 관광자원을 함께 지니고 있는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설 명절을 쇠고 돌아오는 길에 답사한 터라 춤무공 이순신과 관련한 유적지 몇 곳과 흥국사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순천 신성리 왜성을 곁들였다.
* 답사일자 : 2011. 2. 6
* 답사처 및 코스 : 고소대(좌수영대첩비, 타루비) - 진남관 - 충민사 - 선소(굴강) - 흥국사 - 순천왜성
* 진남관의 현판.
진남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소대(姑蘇臺)가 있다.
이름에 얽힌 설화도 있음직한데, 따로 안내된 바는 없다.
고소대는 여수 앞바다를 내려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종의 포루로써 장대(將臺 : 지휘관측소에 해당)로도 사용되어, 이순신 장군이 수군의 작전이나 훈련 상황을 보며 군령을 내리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비각 안에 좌수영대첩비, 동령소갈비, 타루비 등 3개의 비석이 있다.
* 큰 비석이 좌수영대첩비(보물 제571호)이고 오른쪽의 작은 비석이 타루비(보물 제1288호)이다.
답사책에는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가 함께 보물 571호로 되어 있는데, 이번에 와 보니 각기 따로 등재되어 있다. 타루비는 1998년에 별도로 보물로 지정됨.
** 좌수영대첩비는 광해군 7년(1615)에 충무공의 전승을 기념하여 세운 우리나라 최대의 대첩비이고, 타루비는 충무공 사후 5년되는 선조 36년(1603)에 충무공의 휘하에 있던 수군들이 충무공의 죽음을 애도하고, 충무공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인데, 숙종 24년(1698)에 이순신을 숭모하는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좌수영대첩비를 건립하는데 참여한 인물들과 그 경위, 그리고 건립하기까지의 여려움 등이 기록되어 있다.
** 다른 두 비가 보물로 지정된것에 반하여, 동령소갈비는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듯 하다. 도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기념물)라도 우선 등록시켜야 할 듯...
* 좌수영대첩비의 윗부분.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고 새겨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좌수영대첩비'라고 불린다.
이 비의 비문은 백사 이항복이 지었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옥포, 노량, 한산, 명량 등지에서 활약한 충무공의 행적과 애국충정, 그리고 전몰상황까지 임진왜란 전편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 타루비의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하(營下)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석을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비라 하엿다. 이는 중국 양양 사람들이 양호장군의 덕을 생각하여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 타루비는 비록 크지는 않지만, 함께 있는 3개의 비석 중에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충무공과 좌수영 수군 사이에 오갔던 깊은 정이 듬뿍 담긴 비석으로, 거대하게 성역화한 그 어떤 충무공 유적보다 귀중하게 느껴진다.
** 좌수영대첩비는 본래 좌수영성 서문 밖에 건립되었으나, 1942년 일본인 경찰서장 마쓰기가 비를 서울로 빼돌리는 바람에 그 행적을 모르다가, 광복후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깊이 묻혀있는 것을 발견,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타루비 또한 좌수영대첩비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행방불명되었다가 광복 뒤 경복궁에서 발견돼 이곳에 다시 세웠다.
* 진남관 앞에 있는 망해루.
전라좌수영의 문루 역할을 했던 건물인데,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가 1991년에 새로 지어졌다.
* 망해루 뒷편에서 진남관을 올려다 본 모습.
* 진남관 앞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여수문화관광해설가인 조현구님이 친절하게 해설을 해주고 있다. 집사람과 나 둘뿐이었는데도 여수의 내력과 충무공 유적, 그리고 여러 가지에 대해 약 1시간 가량을 상세하고 재미있게 설명해주셨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사진에 보이는 것은 명나라의 황제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하사한 팔사품(八賜品 : 8가지 하사품) 중의 하나인 참도(斬刀 : 복제품)이다.
팔사품(도독인을 제외한 7가지는 각 2점씩으로 모두 15점이라고 한다)은 이순신 장군이 죽은 뒤에 도착하였기에 정작 이순신 장군은 사용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 국보 제304호인 진남관의 위용 (2001년 4월 17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 자리에 전라좌수영 성의 중심 건물인 진해루(鎭海樓)가 들어서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으며, 진남관은 전쟁 직후인 선조 32년(1599)에 삼도통제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새로 지은 객사로, 숙종 42년(1716)에 화재로 소실되어 숙종 44년(1718)에 재건된 뒤, 여러 차례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남관은 임금이 살던 궁을 제외하고는 지방에 세워진 목조건축 중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총 75칸 규모로, 현존하는 지방 관아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이다.
* 측면에서 본 진남관
*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이순신에 대한 반감으로 전라좌수영이 있던 곳의 모든 성곽과 건물을 철거하고 불태웠으나 진남관 만은 남겨놓았는데, 이는 진남관이 워낙 큰데다가 이 지역에 학교가 없어 진남관을 학교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 진남관을 학교로 사용하면서 벽체를 만들고 천장과 문을 설치한 탓에 기둥들이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기둥에 문을 설치하느라 장식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 진남관 천장의 용머리 조각
* 진남관 앞에서 기념사진 한 컷.
** 객사 건물은 보통 궐패를 모시는 주사(主舍)와 주사 좌우에 익사(翼舍)를 지어 관리의 숙소로 사용하도록 건축되었는데, 진남관은 주사와 익사의 구분없이 건물 한 채에 중앙을 막아 궐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 진남관이 분명 객사 용도의 건물이었음에도 종종 이 건물을 수군의 지휘본부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이는 현재 진남관에 궐패를 봉안하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수만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진두 지휘하는 위엄 있고 기세 좋은 장군같은 진남관의 외형때문이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 -
**** 진남관과 비견되는 건물로 통영의 세병관(국보 제305호 : 2002년 10월 14일,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됨))이 있는데, 세병관도 주사 익사의 구분 없이 건물 한 채로 되어있으며, 다만 건물 중앙 뒷면에 약 45㎝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闕牌)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세병관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조선 선조 37년(1604)에 완공한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이다.
이러한 것을 감안해볼 때, 진남관도 객사의 기능을 부차적으로 두고, 수군 본영으로서의 중심건물의 역할이 주된 기능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객사로서로서의 기능만을 생각한다면, 건물이 이렇게까지 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진남관도 통영의 세병관 처럼 궐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중앙부에 약간 높은 단을 설치했을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학교로 사용하면서 바닥을 변형시킨 듯 하다.
사적 제381호인 여수 충민사(忠愍祠)는 충무공 이순신, 의민공 이억기, 충현공 안홍국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모신 사당으로서는 가장 이른 시기인, 선조 34년(1601)에 건립된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임진왜란 때 목포, 노량, 당포, 한산도, 부산포, 명량 해전에서 왜적을 무찔러 우리의 바다를 지켰고, 선조 31년(1598) 노량에서 도망가는 왜적을 무찌르던 중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글에도 재주가 있어 『난중일기』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전쟁터에서 읊은 시조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좋은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의민공(毅愍公) 이억기(1561∼1597)는 선조의 종친이자, 양녕대군의 5세손이다. 임진왜란 때 전라우수사로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 갇히자 이항복·김명원들과 함께 무죄를 주장했으며,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조선 정부와 원균의 무리한 공격 명령을 받고 휘하의 함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충현공(忠顯公) 안홍국(?∼1597)은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으며 이순신 장군의 밑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뒤 정유재란 때 안골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 충민사
이 사당은 선조 34년(1601) 나라를 위한 세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의정 이항복이 임금께 청하여 통제사 이시언이 세웠다.
충무공 사당으로서 최초의 사액서원이며, 통영의 충렬사보다 62년, 아산의 현충사보다 103년 먼저 건립되었다.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지하였다가, 고종 10년(1873)에 다시 세운 뜻 깊은 곳이다.
** 이순신 장군이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인조 21년(1643)이다.
남해의 충렬사에는 '충무공비(忠武公碑)'와 함께 '충민공비(忠愍公碑)'라고 쓰인 비석이 있는데, 이는 '충무'라는 시호를 받기 전에 사당이 세워지고 비석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충무(忠武)'란 시호를 받기 전에는 충민공(忠愍公)으로 불리웠던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겠다.
* 사당 안 정면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와 영정이 있으며, 좌우측 벽면쪽으로 이억기와 안홍국의 위패와 영정이 있다.
* 충민사 사당 건물 뒷편에 있는 큰 바위 밑에는 석천(石泉)이라는 샘물이 있으며, 지금도 이 샘에서 물을 끌어다 쓴다.
이 석천에서 이름을 딴 석천사(石泉寺)라는 절이 충민사 왼편 바로 옆에 있다.
석천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수군으로 활약했던 자운스님과 옥형스님이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다.
* 충민사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충민사 유허비이다.
충민사에서 나와 선소 유적지로 향했다.
선소(船所)는 배가 있는 곳이라는 뜻일텐데, 거북선을 만들었거나 수리 또는 정박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 선소유적지에는 굴강(掘江)과 세검정(洗劍亭) 및 수군기(水軍器)가 있다.
* 바다와 연결된 굴강의 모습.
굴강(掘江)은 조선시대 해안 요새에 만든 조그만 군사 항만 시설로 선착장이자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 배가 머물며 고장난 곳을 손보거나 군사물자를 싣고 내렸다.
'굴강'이라는 이름은, 대피한 배를 보호하기 위해 방파제를 작은 만처럼 둥그렇게 만든데서 유래한 듯 하다.
* 굴강 전경. 이 굴강에는 거북선 크기의 배가 두 척 정도 정박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하는데, 입구의 폭이 조금 좁아보인다.
* 사람이 크기와 비견해 보면 굴강의 깊이가 대략 짐작이 갈 듯...
* 오른쪽이 세검정, 왼쪽이 수군기이다.
세검정은 무기를 손질하는 곳이고, 수군기는 무기 등 군수물자를 보관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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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팔사품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뛰어난 무공이 전해지자 명나라 임금인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에게 내린 8종류의 유물 15점이다.
동으로 만든 도장인 도독인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2점씩으로,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이 있으며, 현충사 성역화 후에 통영에서 진품이 옮겨왔으나 통영시민의 열성으로 충렬사로 되돌려졌다.
도독인은 손잡이가 달려있는 동으로 만든 도장이다.
도장을 넣은 함에는 ‘황조어사인’이라고 쓰여 있어, 중국 황제가 보낸 것임을 알 수 있고, 도장은 관방이라는 글자를 아홉 번 꺽어 새긴 것이다.
영패는 나무로 팔각형을 만들고 한쪽 면에는 영이라 새기고 다른 한 면에는 대장이라 쓴 다음 이를 표범이 그려진 사슴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었다.
귀도는 칼자루에 용머리와 귀신 머리가 장식되어 있는 칼로, 오동나무로 만든 칼집은 종이로 싸서 붉은 칠을 하였다.
참도의 칼자루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상어 껍질로 싸고 붉은 칠을 한 다음 소가죽으로 감았다.
독전기는 전쟁터에서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지휘관이 사용한 것으로 홍색 바탕에 남색 비단으로 독전이라 오려 붙였고 중앙에는 “무릇 군사로써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라고 쓰여 있며, 깃대 머리에는 창이 꽂혀있다.
홍소령기는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데, 홍색의 비단 바탕에 남색으로 영자를 오려 붙였고 자루 끝에 창을 달았으며 이는 문관에게 영을 내리는 신호기이다.
남소령기는 홍소령기와 마찬가지로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데, 남색의 비단 바탕에 홍색으로 영자를 붙였고 무관에게 영을 내리는 신호기이다.
곡나팔은 구리로 만든 나팔로, 목이 구부러진 모습이라 곡나팔이라고 한다. 나팔 입은 퍼졌고 붉은 술을 달았다.
통영 충렬사 팔사품 보물440호
도독인<부 인함1개포함> 보물440-1호
동으로 만든 도장인 도독인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2개씩으로, 충렬사에 보존되어 왔다. 1969년 현충사가 지어지자 도독인을 제외한 나머지 유물들은 1개씩을 그곳으로 옮겨놓았다. 현재 충렬사에는 도독인(都督印),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 8종류 8점만이 남아있다. 도독인(都督印)은 손잡이가 달려 있는 동으로 만든 도장으로, 길이 15.1㎝, 폭 7.8㎝, 높이 1.8㎝이다. 도장은 뚜껑이 있는 함에 보관되어 있는데, 함에는 ‘황조어사인’이라 쓰여 있어서 중국 황제가 보낸 도장임을 알 수 있다.
호두령패 보물440-2호
호두령패(虎頭令牌)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길이 31.8㎝, 너비 30.3㎝이다. 한 쪽에는 검은 칠을 하고 ‘영(令)’자를 새긴 후 그곳을 붉은색으로 메꾸었고, 다른 한 쪽에는 분칠을 하고 ‘대장(大將)’이라고 쓰여있다. 호두령패(虎頭令牌)를 넣은 주머니는 사슴가죽으로 되어있으며, 표범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귀도<부 도초 2개 포함> 보물440-3호
귀도(鬼刀)는 전체 길이 137.9㎝, 칼날 길이 83.3㎝, 너비 7㎝의 칼이다. 전단나무로 만든 칼자루는 용의 머리와 귀신머리가 새겨 있고, 그 위에 붉은 칠을 했다. 오동나무로 만든 칼집은 종이로 싸서 붉은 칠을 한 후, 색을 입혀 용의 비늘을 표현하였다.
참도<부 도초2개 포함> 보물440-4호
참도(斬刀)는 길이 180.2㎝, 너비 6㎝의 칼이다. 칼자루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상어껍질로 싼 후 붉은 칠을 하고 소가죽으로 감았다. 칼집도 나무로 만들었으며 소가죽으로 싸고 붉은 칠을 하였으며, 은도금을 한 쇠로 장식을 더 했다.
독전기 보물440-5호
독전기(督戰旗)는 전쟁 때 감독·격려하기 위해 사용하던 깃발로 한 변의 길이가 101㎝이고 자루 길이는 303㎝이다. 남색비단 바탕에 ‘군사가 적을 만났을 때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단한다’라는 글귀가 쓰여있으며, 좌우에는 홍색 비단으로 ‘독전(督戰)’을 붙였다. 자루끝에 창이 꽂혀 있다.
남소령기 보물440-6호
남소령기(藍小令旗)는 군대의 명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던 깃발로, 한 변의 길이는 84.8㎝이며 자루 길이는 180㎝이다. 남색 비단 바탕에 홍색으로 영(令)자를 붙였고, 자루 끝에는 창이 꽂혀있다.
홍소령기 보물440-7호
홍소령기(紅小令旗)는 군대의 명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던 깃발로, 한 변의 길이는 84.8㎝이고 자루의 길이는 177㎝이다. 홍색 비단 바탕에 남색으로 영(令)자를 붙였고, 자루 끝에는 28㎝의 창이 꽂혀있다.
곡나팔 보물440-8호
곡나팔(曲喇叭)은 구리로 만든 나팔로, 목이 구부러진 형태라 곡나팔(曲喇叭)이라고 한다. 길이는 218.2㎝이고 입 지름 25.7㎝이다. 나팔 입은 퍼졌으며 4마디로 되어있고, 끝에는 붉은 술이 달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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