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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을 자주 불어 경기의 흐름을 끊고, 판정에 대한 선수와 관객의 신뢰를 얻는 데도 실패했다
‘대머리 심판’으로 우리나라 축구팬들에게도 친숙한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하워드 웹은, 지난해 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좋은 축구심판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현대 축구의 스피드를 쫓아갈 수 있는 강인한 체력, 정확하고 빠른 상황 판단 능력, 그라운드에서 함께 뛰는 선수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뛰어난 소통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의 심판인 중앙선관위를 이 요건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선거판을 거침없이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일단 체력은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상황 대처 능력과 소통력에 이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휘슬을 자주 불어서 경기의 흐름을 끊어놓기 일쑤이고, 판정에 대한 선수와 관객의 신뢰를 얻는 데도 실패했다. 하워드 웹은 “내가 응원하는 고향팀(로더럼 유나이티드)이 프리미어리그 소속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는데, 선관위가 내심 응원하는 팀이 같은 그라운드에 있는 것도 문제다.
지난 10·26 재보궐선거 하루 전날 발표된 ‘선거일 투표 인증샷 10문10답’은 잘못된 휘슬 불기의 표본이다. 특히 투표 독려자의 정치적 성향을 판별해 규제·단속하겠다는 대목은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 이를 두고 어느 언론학자는 이렇게 촌평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투표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여주는 것도 위법 아닌가? 이 대통령의 정치적 성향을 온 국민이 아는데 그의 투표 인증샷을 공개리에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방송인 김제동씨는 운동복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인증샷을 한 반면 이 대통령은 맨얼굴 그대로 인증샷을 찍었으니 확실히 규제 대상이라는 야유다.
이 언론학자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세계에서 선거 관련 제도가 가장 잘 정비된 나라는? 정답은 한국이다. 우리나라처럼 막대한 선거관리 인원에 촘촘한 규제를 두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 없다.
반면에 미국은? 전형적인 선거관리 낙후국이다. 정당과 정치인들의 자율에 맡겨놓을 뿐 관리를 별로 하지 않는다. 그래도 별 탈 없이 잘 굴러간다.
선관위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끊임없는 영역 확장이다. 1963년 독립된 헌법기관이 된 뒤 단순한 선거 행정 관리 차원을 넘어 적극적인 정치행위자로서의 위상을 강화해왔다. 이 과정에서 순기능도 많이 수행했다.
둘째, 새로운 매체에 대해서는 규제 일변도 성향을 보였다. 2002년 대선 때 인터넷언론인 <오마이뉴스>의 대선주자 초청 토론회를 선거법 위반으로 규정한 것을 비롯해(당시 문화관광부는 허용 입장) 사용자제작콘텐츠(UCC)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규제 등 유권자의 입을 틀어막는 데 힘을 쏟아 왔다. 이를 두고 한 언론학자는 “일거리를 많이 만들어야 조직을 계속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셋째, 현 정부 들어 ‘여당 도우미’ ‘투표참여규제위원회’ 등의 말이 나올 정도로 정치적 편향성이 급격히 노골화됐다는 점이다.
선관위의 이런 일탈된 모습은 ‘선관위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선관위는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표자도 아니다. 그런 기관이 국민의 상식에 반해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데도 계속 수수방관할 것인가의 문제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 히딩크 감독은 이탈리아팀이 편파 판정으로 한국에 졌다고 항의하자 “오심도 축구의 일부다. 잘하는 팀이라면 골을 넣어 이겼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입장 바꿔놓고 보면 이는 잘못된 말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당팀이 ‘골을 넣어 이기긴’ 했지만, 심판의 편파 판정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게다가 이 심판은 시합이 끝난 뒤에도 엉터리 레드카드를 남발하고 있다.
이 심판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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