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우리의 일그러진 공정성

道雨 2012. 1. 10. 13:53

 

 

 

           우리의 일그러진 공정성 

 

예수는 왜 일한 시간 달라도 똑같은 품삯을 주라고 했나

 

 

»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포도농장에 수확철이 다가오자 일손이 필요했다. 농장 주인은 동이 트자마자 인력시장으로 향했다. 이른 새벽임에도 인력시장에는 품을 팔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농장 주인은 새벽에 한 사람을 구해왔고, 이어 아침에 한 사람, 정오에 한 사람, 오후에 한 사람, 저녁 다섯 시쯤 한 사람, 모두 다섯 사람을 구해 일하게 하였다.

 

그날 해가 저물자 주인은 일을 마친 일꾼들에게 품삯을 계산하여 지급했다.

그런데 주인은 일꾼들에게 모두 똑같이 1데나리온씩을 주었다. 온종일 일한 사람이나 저녁때 잠깐 일한 사람이나 구별 없이 똑같은 일당을 지급한 것이다.

종일 일한 사람이 “땡볕에 땀 흘려 하루종일 일한 내가 왜 조금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라고 항의하자 농장 주인은 대답한다.

“친구여, 내가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오.”

 

 

<신약성경> 마태오의 복음서 20장의 내용이다.

예수가 포도농장 주인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라고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부분은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니, 어떻게 많이 일한 사람과 적게 일한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단 말인가. 애쓴 만큼 결과가 맺어지는 것, 노력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야말로 공정성의 기본이 아닌가, 일한 만큼 보상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배우고 믿어왔던 정의와 평등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다시 읽으면서 아뿔싸! 이제껏 나는 ‘일’만 봤고 정작 ‘사람’을 못 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머릿속의 정의에는, 그 규범의 주체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고작 시장이 내세우는 공정성을 공정성의 전부인 양 여겨오다니!

 

인력시장에는 날품 노동자들이 늘 넘쳐난다. 일꾼이 없어 사람을 못 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일꾼을 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숙련되고 건강한 인부가 우선 눈에 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쓸 만한 인부들은 새벽부터 모두 팔려나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변변한 기술도 없고, 몸도 허약한 사람만 남겨진다.

오후가 다 되도록 남겨진 사람들은 애가 타들어간다. 몸은 안 좋지, 일거리는 없지, 게다가 집에는 끼니를 걱정하는 처자식까지 있지 않겠는가.

 

일용 노동자에게 하루 품삯이란 곧 생존 그 자체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절박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니 건강한 사람이나 허약한 사람이나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재화는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허약한 사람에게 특별히 더 많은 재화와 편의가 제공되어야 할 때도 있다. 우선 병을 고치고, 건강을 회복한 뒤에야 비로소 노동시장에서 공정경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장은 이런 합당한 이치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왜?

‘일을 못(안) 하는 사람은 쓸모가 없고, 이는 곧 사람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장의 질서는 은연중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구호를 공정성의 표상으로 삼게 한다. 사회적 약자가 자리할 곳이 없고, 인간 존엄성이 부정된다.

 

오직 일한 만큼 대가가 지급되며 기여한 만큼 보장된다는 것이 시장의 공정성이라면, 예수가 비유한 포도농장 주인의 공정성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재화와 편의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꼴찌는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니만큼, 더 각별한 지원과 자원의 제공이 필요하다는 점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익논리가 공정성으로 둔갑하는 일만큼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