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나꼼수’ 비키니 논란을 보는 두 시선

道雨 2012. 2. 10. 13:26

 

 

 

     ‘나꼼수’ 비키니 논란을 보는 두 시선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첫 오프라인 토크콘서트가 열린 지난해 10월29일 저녁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콘서트홀에서 출연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비키니 사진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여성 회원이 주축이 된 이른바 ‘인터넷 삼국카페’에서 나꼼수 지지 철회를 밝힌 데 이어, 8일에는 사건의 당사자인 정봉주 전 의원이 옥중에서 ‘사과’ 편지를 보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나꼼수 쪽은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사과할 건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쪽과 애초의 콘셉트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사과를 하는 건 옳지 않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양쪽의 의견을 들어본다.

 

 

 

                더 높은 사다리로 올라서라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B급·해적방송’으로 취급하기엔 ‘나꼼수’의 책임이 막중해졌다, 논란 해결하려는 적극적 노력이 연대를 더욱 굳게 만들 수 있다

 

<나꼼수>와 ‘비키니’ 논란. 이젠 정리 단계에 들어선 듯하다. 정봉주 전 의원이 여성 모임인 ‘삼국카페’에 사과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쿨한’ 편지에 이어 더 강하고 ‘쿨한’ 연대가 이어지길 바란다. 정의와 민주주의를 담고자 한다던 <나꼼수>도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담기를 기대한다.

‘비키니’ 논란이 일자 진영논리가 잠깐 득세를 했다. 비슷한 취지를 가진 자들끼리는 ‘작은’ 사안에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심지어 ‘분열로 망하는 진보’를 운위하기까지 했다. ‘닥치고 같이 가자’고 했지만 곧 진영논리가 아닌 ‘논리진영’이 되어야 연대가 가능하다는 담론이 이를 받아쳤다.

논란에서 발을 빼는 사상자가 나올 만큼 과잉이었지만 성과가 없지는 않다. 사과 편지도 낳았다. <나꼼수>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 믿고 싶다. 팬덤한테도 ‘더 많은 민주주의’가 뜻하는 바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토론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도 협력을 통해 논란의 자기 정화가 이뤄짐을 지켜볼 수 있었으리라 믿는다. 논란이 구체적으로 전해준 팩트 몇 가지는 확인하고 넘어가자.


첫째, <나꼼수>는 이제 비(B)급 문화, 해적방송으로 꾸며 자신을 숨기기엔 너무 큰 공적인 정체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적 책무를 가져야 하는 형국에 놓이게 되었다. 대중의 인기가 누르는 무게를 어깨로 늘 느껴야 할 공적 주체가 되었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가카’ 덕분이다.

둘째, ‘비키니 사건’으로 불편함을 호소하며 해명을 요청한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사실이다. 이번 사건은 누가 어떤 동기로 시작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아팠음을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는 문제였다. 그동안 지지를 해왔던 쪽에서 아팠음과 연대의 위기를 제기했다는 사실은 ‘가카 헌정’이라는 정치성을 지향하는 쪽에서는 심각하게 고려하고 보듬는 행동을 보였어야 하는 그런 정치적 문제였다. ‘엄살’이 아니라 ‘아팠다’는 사실.

셋째, 분배의 정의와 관련된 사안이다. 분배의 정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더 많은 배려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꼼수>가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을 패러디한 탓도 있었지만 그들의 웃음이 사회적 약자를 쓰다듬는 듯한 뉘앙스를 늘 품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나꼼수>는 분배 정의의 주창자이면서 직접적 실천자다. 쫄지 말자고 외친 방향도 그쪽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는 <나꼼수>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꼼수>는 더 조심스러워야 했고, 해명은 더 빨랐어야 했다.

넷째, 논란을 피하는 일보다는 논란을 적극적으로 맞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연대를 더 굳게 만들어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봉주 전 의원의 편지 이후 사건 전개는 어항 들여다보듯 빤해진다. 그래서 때론 미디어가 메시지인 셈이다. 진지한 노력만으로도 서로 다른 쪽을 이어주고 소통을 가능케 해준다.

‘쿨한’ 사과로 공론장 진화의 다음 사다리 단계로 올라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특히 기성 언론의 곤경으로 ‘정보난민’ 상태에 놓인 대중에게 <나꼼수>가 즐거운 공론장 구실을 해왔음에 비추어 그런 계기는 절실한 때다. 그런 다음엔 <나꼼수>는 그들의 ‘깔때기’ 목록에 또 하나의 메뉴를 추가하고 더 대중과 가까이할 수 있지 않을까.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희화화 대상은 ‘권력’이었다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성욕감퇴제·코피로 놀림 대상이 된 건 다름아닌 전직 국회의원…
탈권력·탈권위의 일관된 태도다. 불쾌하다면 무시하면 될 일이다

 

반쪽 진보를 수용할 수 없다며 <나꼼수> 지지 철회를 선언한 진보적 여성카페를 향해 드는 느낌은 탄식에 가깝다. ‘참 잔인하구나….’

비키니 운운은 <나꼼수> 멤버들이 한갓지게 놀다가 터진 돌발사태가 아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감옥에 갇힌 동료의 구명운동 과정에서 불거진 일이다. 그들의 강령이 ‘쫄지 마!’이다. 속으로 억장이 무너졌을 그들은 더 가열차게 찧고 까불고 낄낄거렸다.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건 감옥에 가둔 자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므로. 죽어도 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꼼수는 지지자들을 향해 ‘투쟁해 달라’ 투로 요구하지 않는 대신 ‘감옥으로 비키니 사진을 보내셔도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비키니 시위? 그건 정리됐다. 호재를 만난 듯 기사를 쏟아내는 극우매체들조차 비키니 착용은 문제가 아니라며 짐짓 여성주의적 시각을 과시해 보였다. 문제의 지점은 ‘코피’ ‘성욕감퇴제 복용’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말이 여성을 비하한 것이란 말인가. <나꼼수>의 언어는 최고권력에 대한 조롱과 스스로에 대한 자학적 비하, 유머 코드로 설정한 과장된 자아도취 사이를 오간다. 감옥에서 독수공방하는 사내가 성욕을 억제할 수 없어 감퇴제를 먹는다는 둥, 비키니 사진을 보고 흥분해서 코피를 흘릴지 모른다는 둥, 이런 건 사내들끼리의 자기 희화화다. 그렇게 성적 놀림을 당하는 사내가 전직 국회의원이다. 탈권력·탈권위의 일관된 태도다.

비키니 시위자를 성적 대상물로 삼았다고 문제 삼는다. 혹시 이성에게 성적 본능을 느끼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일까. 아, 그런 탈레반은 정말로 무섭다. 그런 순결주의, 그런 엄숙주의여야 반쪽이 아닌 온전한 진보가 된다면 진보의 대열에 설 자신이 없다. 양성평등 의식을 소유하려면 성에 무관심하거나 하염없이 진지해야만 하는 것일까.

누군가 나를 종북좌파 빨갱이라고 부른다면 퍽 재미있을 것 같다.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어이없는 웃음이 터질 것이고 상대에 대한 연민이 앞설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여성이 나를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마초라고 낙인찍으면 움찔할 것 같다. 의도적으로 마초짓을 했을 것 같지는 않으나 부지불식간에 그런 언행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성을 존대하는 평범한 한국의 어머니에게서 키워졌고 남자 중·고교를 다니면서 철없이 막가는 분위기에 젖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성평등 의식을 포함한 진보적 관점은 학습을 통해 습득된 것이지만 지배와 억압의 관계는 다분히 생득적이고 관습적이다. 그래서 불안하고 항상 조심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앞뒤를 캐봐도 <나꼼수>들에게서 성희롱·성차별의 의도를 찾아낼 길이 없다. 그들은 권력자도 주류도 아니며 동료는 수감되었고 각종 고소·고발에 시달리는 중이고 언제 잡혀갈지 모를 상황에서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다. 속에서 피눈물이 나도 그들은 낄낄거리고 악악대는 것으로 권력에 맞선다. 불쾌감을 느낀다는 엄숙주의자들에게 굴복해서 위선적인 혹은 위악적인 거짓 사과를 한다면 <나꼼수>가 더 이상 온전한 <나꼼수>일 수 있겠는가. 다양한 진보의 대오에서 <나꼼수>는 ‘지하실’을 담당하는 한 축일 뿐이다. 그들의 언행이 불쾌하다면 외면하고 무시하면 될 일이다. 부디 총수, 누나전문, 돼지 일당이 주눅들지 말기를 바란다.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