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보도지침’ 연상되는 한선교의 ‘보도협조’
[뉴스분석] 언론노조 “언론에 재갈 물리려는 행태” 비난… ‘도청사건’ 재점화
(진실의길 / 이진석 /2012-02-27)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김영삼·김대중 등 주요 야당 지도자들의 동정은 보도하지 말 것, 한국정부를 비판하는 외국의 논평은 보도하지 말 것, 학생시위 기사는 몇 단(段) 크기 이하로 보도하되, 시위사진 가운데 군중이 많은 것은 보도하지 말 것, 독재·군부독재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말 것, 고위 공무원이나 경찰관 비리 기사는 작게 보도할 것 등등이다. 당시 서울 소재 중앙 일간지들은 초판용 기사를 임시로 인쇄한 대장(臺狀)을 들고 서울시청 2층에 있던 검열관실에 가서 ‘문제없다’는 확인을 받은 후에야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
▲ 문공부에서 각 언론사에 내린 ‘보도지침’의 한 사례. 당시 야당지도자 김대중 씨의 기자회견에 대해 보도 ‘불가(不可)’라고 적고 있다. <자료사진> |
최근 5공 당시의 ‘보도지침’을 연상케 하는 사건이 하나 발생해 언론계 안팎의 비난을 사고 있다. 발단은 현직 국회의원인 한선교(53) 새누리당 의원이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가 게재될 것에 대비해 수십 개 언론사에 ‘보도협조’를 요청한 것. 한 의원은 지난 2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출마한 민주통합당 김종희(46) 후보(김 후보는 24일 공천 받음)의 기자회견에 앞서 용인지역 언론사 등에 ‘언론 보도협조 요청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냈다.
한 의원은 공문을 통해 “23일 민주통합당 김종희 예비후보의 기자회견 내용은 지난해 경찰과 검찰에서 이미 무혐의로 종결된 사안”이라며 “팩트가 아닌 내용으로 유권자들의 판단을 혼동시킬 수 있는 내용으로 기사를 게재할 경우 부득이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드린다”며 언론사에 사실상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 이 같은 사실은 언론노조가 한 의원 측이 언론사에 발송한 공문을 입수해 원문을 밝히고, 또 이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보도가 ‘협조’되기는커녕 오히려 몇몇 언론사의 보도를 자극하는 꼴이 됐다.
▲ 새누리당 한선교 의원이 지난 23일 57개 언론사에 발송한 ‘보도협조’ 요청 공문 |
이날 한 의원이 ‘보도협조’ 공문을 보낸 언론사는 <경기신문> 등 지방일간지 30개사, <연합뉴스> 등 통신사 3개사, <경인방송> 등 방송사 8개사, <용인신문> 등 지역신문 인터넷 16개사 등 무려 57개 언론사에 달한다. 언론노조는 <‘불법 도청 ‘장물아비’ 한선교, 이제 언론 탄압까지 자행하다!> 제하의 성명서에서 “우리는 한선교 의원이 57개 언론사에 보냈다는 공문을 보고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다”면서 “법적인 조치 운운하며 사실을 보도하려는 언론들에 재갈을 물리려는 실로 경악스런 행태”라고 비판했다.
언론노조는 특히 한 의원 측이 공문 상단에서 발신자로 표기한 ‘대한민국 국회’라는 문구도 문제 삼았다. 언론노조는 “국회 확인 결과 이 공문은 국회가 보낸 공식 공문이 아니었다”며 “한선교 의원 측이 현역의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국회의 권위와 명의를 도용해서 언론사들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공문”이라고 밝혔다. 언론노조는 “불법 도청 녹취록을 흔든 것도 모자라 국민의 대표 기관의 명의까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서슴없이 도용하는 또 하나의 도적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이번 사건의 발단은 한선교 의원이 지난해 6월 국회 문방위에서 “틀림없는 발언 녹취록”이라며 전날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회의 내용을 공개한 데서 비롯됐다. 이후 문제의 녹취록의 출처를 놓고 민주당 출입기자인 KBS 장 아무개 기자의 관련설 등이 거론되자 민주당은 수사 당국에 공식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은 지난해 7월 장 기자의 집을 압수수색했으나 결정적인 증거 확보에 실패하였고, 검찰은 급기야 지난해 말 한 의원과 KBS 장 기자에 대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등은 ‘봐주기 수사’라며 수사 당국을 비난한 바 있다.
▲ 한선교 새누리당 의원 |
그런데 총선을 앞두고 이 사건이 한 의원의 상대후보가 특검법 제정을 거론하면서 다시 불거진 것. 민주통일당 김종희 후보는 16일 자신의 트위터에 “19대(국회에) 입성하면 한선교 도청 특검법을 반드시 발의할 것”이라며 “이 사건은 KBS 수신료 인상을 위해 야당 대표실을 도청한 파렴치 중의 파렴치한 사건”이라고 비난했다. 김 후보가 트위터에 이 같은 내용을 올린 다음 날 용인 수지구 선관위에는 “김 후보의 트위터 글이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을 담은 익명의 고발장이 접수됐다.
수지구 선관위는 20일 김 후보 측에 고발내용과 관련한 소명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이에 김 후보는 “트위터에 글을 게재하는 행위는 후보로서의 정당한 선거운동이며 이에 대한 고발은 상대후보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특검법 내용과 관련 보도내용 등을 첨부한 자료를 제출했다. 그러자 선관위는 김 후보가 제출한 소명자료 등을 토대로 곧바로 이 사건을 검찰로 이첩하였다. 이에 김 후보는 지난 23일 용인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선교 후보 측에 의한 야당 탄압”이라고 주장했다. 한 의원이 언론사에 ‘보도협조 요청’ 공문을 발송한 것은 김 후보가 기자회견을 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현재 이 사건은 <오마이뉴스> 등 언론사 사이트와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아이디 ‘함께사는세상을 위하여’는 트위터에서 “진실이냐 허구냐를 떠나서 언론을 통제해 보겠다는 발상자체 만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하군요.”라고 주장했으며, 또 권우성 씨는 “ㅋㅋ 자폭공문이네요”라며 한 의원을 힐난했다. 이밖에 아이디 ‘금강초롱’은 트위터에서 공문 상단에 ‘대한민국 국회’라고 쓴 것과 관련, “당신이 국회의장이냐? 아니면 국회사무총장이냐? 누구 결재받아 이런 문건 만들었는지, 누구 허락받아 이런 문건 언론사에 보냈는지 밝혀라!”고 주장했다.
▲ 김종희 민주통합당 후보 |
경북 청송 출신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공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김종희 후보는 대학 재학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현재 민주통합당 용인수지 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후보는 17·18대 총선에 출마해 두 차례 고배를 마신 적이 있으며, 지난 24일 민주당 2차 공천심사에서 공천을 받았다. 김 후보는 26일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기자회견 후)아직은 검찰에서 연락 온 것도 없고, 또 한 의원 측에서도 이렇다 할 반응은 없다”며 “추후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봐가면서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한선교 의원이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보도협조’라는 미명 하에 사실상 언론사의 보도를 통제하려 한 사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사전에 언론의 보도를 압박(통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도 여부는 전적으로 언론사가 판단할 일이다. 한 의원의 이번 ‘보도협조 요청’은 독재정권이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보도 통제를 하던 것과 비슷한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부당한 보도가 나올 경우 언론중재위나 소송을 통해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도록 돼 있는 만큼 사전에 언론사를 압박하는 방식은 적절치 못하다.
진실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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