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IT가 멸망했다는 소린가. 아니면 한국 IT가 멸망할 거라는 소린가. 어느 쪽이라도 그다지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다. 제목부터 쓴소리임이 분명한 이 책을 좀 더 들여다 보자.
‘일상화한 비정상성’ 이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비정상이 일상화 됐다는 아주 직관적인 말이다. 내가 용어를 처음 접한 것은 컬럼비아호가 STS-107임무를 마치고 대기권에 진입하다가 공중폭발한 2003년이었다. 그 때는 노무현이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다.
콜럼비아호는 발사하는 과정에서 부스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에 우주선 본체의 날개가 맞으면서 손상을 입었다.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손상부위가 녹아내렸고, 결국 공중분해까지 됐던 거다.
사고의 원인이 된 부스터의 파편은 원래 떨어져서도 안 되는 거고, 딱히 떨어질 이유도 없는 것이었지만 이전에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기 때문에 그 똑똑하다는 나사의 사람들이 '그냥 그러려니' 했다는 것이다. 우주선 본체가 이물질로 타격당하는 것은 우주선 운영 매뉴얼에서도 절대로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결국 콜럼비아호를 추락시킨 것은, 몇 번 운 좋게 별 일 없이 넘어간 치명적인 사건을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라고 여기는 ‘일상화한 비정상성’ 이었다.
한국 IT 산업의 멸망은 이런 ‘일상화한 비정상성’ 에 대한 책이다. 한국 IT업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실은 ‘멸망’ 의 징후를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섬뜩한 징후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IT 산업의 전성기는 누가 뭐래도 IT버블이 넘쳐났던 90년대 말, 2000년대 초였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속 인터넷 망이 깔리고 한국이 주도적으로 개발한 CDMA는 휴대전화의 국제적인 표준이었드랬다. 한국은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곳이었고 어떤 가능성도 다 열려있는 것 같았다. 이때 네이버와 다음이 생겼고, 지금은 거의 잊혀져 버린 골드뱅크나 다이얼패드 같은 서비스도 나타났다. 민족정론지 딴지일보도 생겨났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한국의 IT세상은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 있다. 단순히 시간이 지났고, IT버블이 붕괴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한국의 IT 산업이 더이상 세계의 IT트렌드를 선도하거나 대등하게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 그저 세계적인 추세를 뒤쫓으면서 점점 갈라파고스화 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은 어떻게 10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IT산업의 총아에서 지진아로 탈바꿈 했을까.
저자는 그 원인을 한국 기업들의 옹졸함(혹은 찌질함)과 권력자들의 전횡 및 부패에서 찾는다. 찌질한 기업과 썩어빠진 권력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궁합이 잘 맞는데, 이런 찰떡궁합은 저자 김인성씨가 딴지에 연재하고 있는 만화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다.
문제는 포탈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거나, 은행 업무를 보거나, 주민등록등본을 발급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이며, 둘째,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이며, 셋째, 신뢰할 수 없고 왜 신뢰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업체의 액티브 엑스 플러그인이다.
액티브엑스라는 것은 인터넷으로 안전한 거래를 보장하는 표준이 없었던 90년대 중후반에는 나름대로 유용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정체불명의 프로그램이 사용자 컴퓨터에 대한 전적인 사용 권한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보안 위험이 증가한다. 보안을 위해 보안을 위협하는,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시스템인 것이다.
게다가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표준 보안 기술이 어줍지 않은 액티브엑스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 이미 아마존 등 해외 쇼핑몰 사이트나 해외의 은행들은 액티브엑스 없는 깔끔한 환경을 구축해 놨다. 이런 사이트들은 한국의 사이트들보다 안전하지 못할까? 그 반대다. 한국의 쇼핑몰 업체들은 한 해가 멀다하고 보안사고를 낸다.
한국의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익스플로러를 써야 하며, 반드시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한국인이어야 하고, 기술적으로 바이러스와 똑같은 기능을 하는 정체불명의 액티브엑스 여러 개를 깔아야 한다. 이런 보안체계에서 ‘보안’ 이란 서비스 제공 업체들의 ‘사용자로부터의’ 보안일 뿐, ‘사용자를 위한' 보안이 결코 아니다. 이런 환경의 한국에서 세계적인 서비스가 나오는 것보다는 지구의 멸망이 더 빠를 것이다.
이것 만이 아니다.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은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SKT나 KT, 그리고 삼성 같은 기업은 ‘애국심’ 을 호소하며 자신들의 제품을 사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하지만 그 애국심의 대가는 배신이었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다운그레이드’ 된 제품을 더 비싼 가격에 샀고 철저하게 바가지를 썼다.
호구
애국심에 호소하던 SKT와 KT는 한국이 개발했고 기술적으로도 뛰어난 CDMA2000과 와이브로를 고의적으로 도태시키고 비싼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외국 기술을 도입했다. 이 기업들이 쓰는 ‘애국’ 이란 말은 ‘우리 돈 벌어주는 짓’이라는 말로 치환 될 수 있는 것 같다.
IT회사들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만 달리고, 정부는 자신들이 인터넷의 여론을 통제 할 수 없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당연히 독창적인 시도나 창조적 파괴가 나올 수 없다. 행여 나온다 해도 기득권들에게 압살 당한다. 액티브엑스로 점철된 인터넷 환경, 스스로 폐기처분한 (매우 뛰어난) 국내기술 등은 이런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아직 한국 IT 산업은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멸망이 자명해 보인다. 한국형 SNS였던 싸이월드는 점점 쇠퇴의 길을 가고 있다. ‘실명인증’ 의 덫에 걸렸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구축한 (경쟁 없이 먹고 살 수 있었던) 폐쇄적인 생태계에 갇혀버린 탓이다.
저자는 'IT는 진보' 라고 말한다.결국 한국 IT산업의 멸망은 우리의 기술적 역량이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없었던 것은 꿈을 꾸는 힘이었고, 그 꿈에 대한 믿음이었다. 한국은 미국과 어깨를 견줄만한 기술과 인프라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미래를 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꿈은 절대 밥을 먹여 줄 수 없다는 종교적 믿음이 우리를 15년째 물갈이 없이 썩어가는 인터넷 환경에 방치해 뒀다.
게다가 한때 우리나라를 두고두고 먹여살릴 통신표준과 미래 혁신 기술을 추구하며, 실제로 한때 세계를 주도하기도 했던 정부는 (가카치세 들어) 여론을 통제하고, 사대강 수질측정용 로봇물고기나 만드는 데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
이 숨막히고 썩어가는 환경만이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서비스가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를 설명한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나의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고, 액티브엑스를 요구하지 않고, 댓글을 단다고 잡혀가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온라인 망명’이다.
습관처럼 하는 통신요금 불평. 귀찮지만 그러려니 하는 액티브엑스 설치. 아무 생각 없이 입력하는 주민등록번호가 어쩌면 한국 IT산업의 멸망이라는 대재앙의 전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신호들을 ‘일상화한 비정상성’ 으로 넘겨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봐야 한다.
반론이 있거들랑 먼저 책을 읽도록 하자. 재미있어서 금방 읽힌다. 그리고 카오스적으로 복잡한 IT세계의 이슈을 어쩜 이렇게 쉽게 풀어낼 수 있는지 읽어 본 사람만이 알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저자에게 ‘앱등이(애플 추종자는 낮잡아 이르는 말)’ 의 혐의를 붙일 수 있겠지만, 뭐 어떤가. 애플과 아이폰과 매킨토시가 훌륭한 것은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데.
저자는 IT 거품이 꺼지던 시절의 한국을 이렇게 묘사했다.
‘활기찬 분위기가 급속히 사라지면서 결국 파티가 끝났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나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잡음 속에서 회사들이 사라지거나 다른 업체에 흡수되었고 살아남은 업체들도 그저 그런 사이트로 전락해서 힙겹게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힘겹게 연명하던 업체중 하나에서 [나는 꼼수다]를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