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전혀 놀라운 소식이 아니지만, 아직 살아 계신 것이 감사할 뿐인 노엄 촘스키 선생은 제법 놀라셨는지 ‘마녀사냥을 중단하라’는 성명에 참여했다.
이 고소는 몇 년 전 국정원이 명예훼손을 이유로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나꼼수>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이유로 고소하는 것을 검토한다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검토는 끝났는지도 궁금하다.
개인적 법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련된 ‘모욕이나 명예훼손’을 근거로 국가기관이 쟁송에 착수하는 법률적 무지에는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한편, 이런 논의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자연인이자 국가기관인 분이 여러분의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정치인에게는 부고를 제외한 모든 기사가 이득이 된다”는 교훈을 실천하면서 ‘저격수’를 자처하는 분이다. 너무 이례적이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난감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행위예술에 해당하고, 사법의 영역마저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왜 행위예술가 낸시 랭이 계속하여 그를 언급하고 있겠는가.
법률을 탄환으로 사용하는 이런 행위에는 고소, 고발, 민사소송의 제기라는 방식이 있다.
‘고소’는 피해당사자라고 주장하는 쪽이 형사처벌을 요구하는 것이고, ‘고발’은 제3자가 형사처벌을 요구하는 것이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의 민사소송은 물론 피해당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제기하게 된다.
법이 예정한 목적에 맞는 문제제기는 다소 적절하지 않아도 수긍해야 한다. 자신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법의 엄격한 적용을 요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 근거가 매우 부족하거나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은데도 공격하는 것은 사법기관의 업무를 가중시켜 시민의 세금을 낭비하며, 상대방을 부당하게 위축시킨다.
이러한 행위들은 언론 본연의 기능을 벗어나 언론을 활용하는 ‘언론플레이’라는 용어에 빗대어 ‘사법플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법플레이’는 왜 이렇게 범람하게 되었을까.
먼저 ‘비용의 비대칭성’이라는 문제가 있다.
권력과 지식과 경제력과 같은 자원을 가진 국가기관 등은 작은 노력으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고, 실패해도 별로 타격이 없다. 민사소송에서 져도 약간의 소송비용을 감수하면 되고, 고소·고발 행위는 사실을 고의로 왜곡했다는 것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으면 무고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매일 목격하다시피 사법기관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으면 더욱 증폭된다.
국민들이 뼈저리게 경험한 것처럼, 만일 사법기관이 직접 사법플레이에 개입하면 공동체에 엄청난 재난이 된다.
법률의 약점도 이런 상황에 기여한다. 사법플레이는 자주 ‘어떤 사실의 진위’를 쟁점으로 삼는데, 그것은 대개 상호간의 ‘진실게임’이 되고, 공격받은 쪽이 억울해도 그것을 해명하는 과정은 지난하다. 명예훼손 등을 형사적으로 처벌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사법플레이는 동시에 언론플레이다. 주장 자체로 지면을 얻는 것보다 법적 조처를 취했다는 것으로 지면을 얻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사법제도의 틈새와 언론의 속성을 교묘히 파고드는 ‘사법플레이’는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쪽에서 시민에게 가하는 부당한 공격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이제 우리 사회를 위협할 정도에 이른 무책임한 사법플레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법적·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조광희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