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김대중 납치사건

道雨 2012. 6. 16. 13:59

 

 

              김대중 납치사건(상, 하)

                                                                                                             - 한 홍 구 -

 

 

 

1973년 8월8일 중정 요원들이 김대중을 납치했던 일본 도쿄의 그랜드팔레스호텔(왼쪽). 납치 뒤 가까스로 풀려난 뒤 자택으로 돌아와 울먹이며 기자회견을 하는 김대중.

⑧ 김대중 ‘납치’ 사건(상)

유신 이후 모두가 침묵할 때 일본에서 홀로 싸우던 김대중
중정부장 이후락 납치 지시에 일본 파견관들이 움직였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 훗날 박정희가 말했다지만
“나는 뭐 하고 싶은 줄 아나?” 토로하던 이후락이었다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기 전부터 김대중을 몹시 싫어했다. 1967년 총선에서는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해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온갖 장밋빛 공략을 내걸고 급기야는 자신이 군중집회의 연사로 나서기까지 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예상 밖의 고전 끝에 김대중에게 간신히 승리하고는 다시는 이런 선거를 치르지 않도록 유신 친위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그때 김대중은 선거 기간 중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와 있었다.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가 끝난 이후 김대중이 일본으로 출국하는 1972년 10월까지 1년 반 동안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김대중 동향내사 보고가 무려 1100여건이니, 대략 하루 두번꼴로 동향 보고를 할 만큼 김대중은 밀착감시를 받아왔다.

 

71년 대선 뒤부터 김대중을 밀착감시하다

김대중은 야당 의원들마저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 현실에서 국내에서는 활동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국외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의 결성을 위해 노력했다.

배동호, 김재화, 정재준, 곽동의 등 민단에서 이탈한 재일동포들과 함께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을 추진해온 김대중은 미국으로 건너가 1973년 7월6일 워싱턴에서 한민통 발기인대회를 마친 뒤 7월10일 일본으로 돌아와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김대중은 대한민국 절대지지와 선민주 후통일 원칙을 고수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김대중은 민단 이탈파 재일동포들에게 조총련과 선을 그어야 한다며 8월15일로 예정된 조총련과의 경축행사도 중지하도록 요구했다.

국내에 돌아가 활동해야 할 김대중은 혹시라도 흙탕물이 튈까봐 이렇게 조심했지만, 민단 이탈파를 베트콩이라 부르던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었다. 주일공사 김재권(본명 김기완)이 책임자로 있던 중정의 일본조직은 김대중이 주한미군 철수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호소했다거나 평양 방문을 추진한다는 등 잘못된 첩보를 본부로 계속 타전했다.

유신 이후 국내의 야당, 학생운동, 재야, 언론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해외에서 김대중만 홀로이 반유신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만 떠들지 못하게 만들면 반유신운동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풀리지 않는 쟁점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김대중의 납치가 박정희의 지시를 이후락이 실행한 것인지, 아니면 윤필용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이후락이 박정희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단독으로 저지른 것인지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건의 원래 계획이 김대중 살해인지 단순 납치인지 여부이다.

필자가 말석을 차지했던 국정원과거사위원회에서도 이 문제를 조사했지만 박정희가 김대중의 납치나 살해를 지시했다는 문건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런 문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지시문건이 없어도 우리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일이 히틀러에 의해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조폭의 세계에서도 살인의 교사는 묵시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해치우고 싶은 미운 놈이 있을 때 형님이 아우들에게 저놈 죽여라 하고 꼭 집어 얘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저놈만 보면 소화가 안돼” “나는 저놈만 보면 밥알이 곤두서” 등등 얘기를 하면 밑에서 알아서 해줘야 하는 것이다. 사인을 보내도 반응이 없으면 “귀신 뭐하나, 저런 거 안 잡아가고” 하고 강도를 높이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밑의 사람들을 “밥값도 못하는 놈들”이라고 구박한다.

아우들이 일을 저질러 경찰이나 검찰이 형님을 교사범으로 몰면 펄쩍 뛰며 “나는 그저 소화가 안된다고 했을 뿐”이라며 소화가 안된다면 소화제를 사다 줘야지 왜 애먼 사람을 칼로 담그냐고 짜증을 내면 된다. 박정희 주변 인사들이 입을 모아 김대중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에 박정희가 “이후락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며 짜증을 냈다며 “각하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라고 박정희를 옹호하는 모습은 조폭업계의 형님동생 사이에서 흔히 보게 되는 광경과 매우 유사하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보 이철희(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의 바로 그 이철희!)에게 김대중에 대한 특단의 조치(최소 납치)를 지시했을 때, 이철희는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해외공작이 어려워졌다며 펄쩍 뛰었다.

이후락은 열흘 뒤 이철희를 다시 불러 “김대중을 데려와야겠다. 데려오기만 하면 그 후의 책임은 내가 지겠다. 나는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며 강력히 지시하여 이철희는 해외공작국장 하태준과 일본 현지의 중정 책임자인 주일공사 김재권 등을 불러 공작 계획을 수립했다.

이철희의 증언에 따르면 김재권 역시 반발했으나 “내 선에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니 반대의견을 부장께 직접 말하라”고 했고, 김대중을 직접 납치한 윤진원도 김재권이 “박 대통령의 결재사인을 확인하기 전에는 공작을 추진할 수 없다”며 버텼다고 증언했다.

처음에 극력 반대하던 이철희나 김재권이 결국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계획 수립과 현지 공작에서 각각 총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이들도 결국 김대중 납치 계획이 이후락 선을 넘어 박정희 선에서 나왔다는 것을 어떤 경로로든지 확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계획은 ‘야쿠자를 이용한 제거’

김대중이 7월10일 일본으로 돌아오자 해외공작국은 주일파견관에게 김대중의 동향을 집중 감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중정이 김대중에 대한 공작 계획을 구체적으로 준비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김대중에 대한 공작은 일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공작 계획의 수립은 본부가 아닌 일본 파견관들이 담당했다. 주일공사 김재권은 주일대사관 일등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던 김동운에게 공작 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김동운이 본부에 보낸 전문에 따르면 그는 <KT공작계획안>(KT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김대중을 지칭하던 약어)을 7월19일 특별파우치(재외공관 주재국 정부나 제3국이 열어볼 수 없도록 국제법으로 보장)편으로 서울로 보낸 뒤, 21일 서울로 와 계획안의 내용을 직접 보고했다. 김동운의 계획안을 접수한 차장보 이철희와 해외공작국장 하태준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과 함께 계획을 검토했다. 윤진원은 당시 현역 육군대령으로 이철희의 HID(특수공작부대) 후배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김동운이 작성한 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이 문건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어떤 수준에서 김대중에 대한 공작을 준비하였는지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문건이지만, 불행히도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 문서의 내용을 둘러싸고 이철희, 김동운, 윤진원의 증언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윤진원에 따르면 이 계획의 제1안은 야쿠자를 이용하여 김대중을 납치한 뒤 파우치로 데려오는 것이고, 제2안은 야쿠자를 이용하여 김대중을 제거(암살)하는 것이었다. 김동운은 야쿠자를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단순납치 계획을 세운 것으로 살해하는 방안은 검토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윤진원은 아무리 외교행낭이라도 사람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야쿠자를 이용하는 것은 살해든 납치든 정부가 두고두고 야쿠자에게 약점을 잡히게 되어 보안상 불가능하다며 김동운의 계획에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본부에서는 김동운이 제안한 야쿠자 이용 방안 대신, 주일파견관을 동원하여 공작을 실행하는 것으로 하고, 현장의 실행책임자로 윤진원을 추가 투입했다.

윤진원과 김동운이 일본에 온 7월21일부터 중앙정보부는 일본파견관 전원을 동원해 주요 호텔에 잠복하여 김대중의 동향을 24시간 감시했다. 그러나 김대중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대중과 그의 측근들은 김대중의 신변 안전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고, 그의 동선은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주일파견관들은 여러 정보원을 협조자로 활용하면서 김대중을 유인하여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7월31일 밤에는 김대중이 한 식당에 출현했다는 제보에 윤진원과 주일파견관 6명이 긴급 출동했지만, 이미 김대중은 식당을 떠난 뒤였다. 본부에서는 차장보 이철희가 주일공사 김재권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그 물건(김대중) 빨리 해 보내라”고 계속 독촉했다.

중앙정보부는 점차 초조해졌다. 김대중은 8월13일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식을 치르고 곧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할 예정이었다. 김대중이 미국으로 건너간다면 김대중을 처리할 기회는 물건너가는 셈이 된다.

 

300엔짜리 목장갑만 끼었어도…

 

김대중 납치 공작의 책임자와 실무자들. 맨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중정 해외담당 차장보 이철희, 해외공작국장 하태준, 일본 현지 중정 책임자였던 주일공사 김재권(본명 김기완), 주일대사관 일등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해 활동했던 김동운.
본부의 독촉에 처음에 소극적이었던 김재권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재권은 주한미국대사인 성 김의 아버지인데, 성 김이 대사로 지명되었을 때 한국 언론은 김재권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반대했다거나 단순 연루된 것 정도라고 서술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가 처음에 반발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곧 입장을 바꿔 현지책임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김재권은 8월8일 김대중이 일본을 방문중인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양일동의 숙소 그랜드팔레스호텔 2211호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정확한 정보를 이틀 전인 8월6일 입수하여, 윤진원 등 행동대가 김대중을 납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재권은 1958년 공군 정훈감 시절 민항기인 KNA기에 탑승했다가 비행기가 간첩에게 납북되는 바람에 평양으로 끌려갔다가 2주일 만에 풀려난 일이 있다. 납치되었던 자가 15년 뒤에 납치범이 된 것이다.

김대중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직접 납치한 사람들은 이미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해외공작단장 윤진원, 주일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일등서기관 홍성채·김동운, 이등서기관 유영복·유충국 등이고, 일등서기관 한춘은 현지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 ‘행동대원’은 젊은 말단직원들이 아니었다. 당시 직급으로 윤영로와 한춘은 이사관인 2급 갑, 홍성채·김동운·유영복은 부이사관인 2급 을, 유충국만 서기관인 3급 갑으로 모두 상당히 고위직에 이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정보요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어설퍼, 납치 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육안으로 봐도 뚜렷이 보이는 지문을 남겨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KT 공작계획>의 작성자 김동운이 남긴 이 어처구니없는 지문을 두고 일각에서는 김대중 납치에 반대하는 정보부원이 일부러 지문을 남긴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고, 일본 기자들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300엔짜리 사건이라고 비아냥거렸다. 300엔짜리 목장갑만 끼었어도 한국 정부가 그렇게 곤욕을 치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또 현장에 권총 탄창, 대형 륙색, 마취제가 든 영양제 병 등 여러 점의 유류품을 남겼는데, 그중에는 이북 담배가 포함되어 있어, 정보부가 김대중 납치를 이북의 소행으로 덮어씌우려 했다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정보부원들은 원래 양일동이 묵는 2211호의 옆방인 2210호실을 예약했는데, 마침 앞방인 2215호실의 문이 열려 있어 두 방에 나눠서 요원들이 대기했다. 그중 2215호에 우연히 이북 담배가 있었다는 것이고, 다량의 유류품을 남기게 된 것은, 복도에서 김대중을 배웅 나온 통일당 김경인 의원과 마주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2210호실에 있던 납치대원들이 급하게 김대중을 끌고 내려가면서 2215호실에 있던 감시조가 뒤처리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시조는 2210호실 상황을 보지 않고 그냥 빠져나와 버렸다. 너무나 어설펐지만 어쨌든 납치는 성공했고, 중앙정보부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도쿄를 빠져나와 무사히 공작선 용금호가 대기중인 오사카에 도착하여 김대중을 국내로 실어 보냈다.

그러면 김대중 ‘납치’사건은 성공한 공작일까? 

 

 

 

 

1974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 1년을 맞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규탄대회. 참가자들은 “김대중을 일본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

⑧ 김대중 ‘납치’ 사건 (하)

윤진원이 이끄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일본 도쿄 시내에서 김대중을 납치하여 오사카에서 중정 공작선 용금호에 실어 서울로 보내버렸다.

 

그렇다면 김대중 ‘납치’ 사건은 성공한 공작일까?

 

사건의 피해자인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1998년 2월19일 동아일보가 특종 보도한 ‘KT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를 보면, 이 사건에 깊게 관련된 인물이 모두 다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현직에 있었지만, 유독 윤진원만은 옷을 벗었고, 명예회복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완벽하게 따돌리고 김대중을 서울로 실어 보낸 윤진원은 왜 물을 먹어야 했던 것일까?

 

토막살인 할 충분한 시간은 있었으나

원래 윤진원은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하여 오사카로 이동하면서 시가현 오쓰(大津)에서 오사카 총영사관에 나와 있는 중정 요원들에게 김대중을 인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들과 길이 엇갈려 버렸다.

오사카 요원들에게 김대중을 넘기는 데 실패한 윤진원은 할 수 없이 오사카의 중정 요원들이 운영하는 안가로 김대중을 데려갔다. 윤진원은 이 무렵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처음 그는 김대중을 오사카 요원들에게 넘기고, 오사카항에 대기중인 중정 공작선 용금호를 타고 일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오사카 요원들이 나타나지 않아 자신이 김대중을 데리고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불안해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면 토막 살인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오사카 요원들에게 넘겨 그들이 김대중을 처리한다면 자신은 ‘납치’만 한 것으로 먼 훗날에라도 제한적인 책임만 져도 되지만, 자기 손으로 김대중을 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윤진원은 김대중을 자신이 일본을 빠져나올 때 쓰려고 대기시켜 놓았던 용금호에 실어 보내고, 자신은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 용금호에 실린 김대중이 한국 영해로 들어가는 순간 김대중에 대한 관리책임은 ‘해외공작단장’인 자신의 관할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윤진원은 김대중을 죽이든 살리든 그 책임을 이후락이나 박정희에게 떠넘긴 것이다.

박정희도 이후락도 명시적으로 윤진원에게 김대중을 죽여버리라고 지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그저 중앙정보부는 뭐하고 있느냐고, 김대중 하나 떠들지 못하게 못 하느냐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 공작단장인 윤진원 차원에서 알아서 ‘처리’해줘야 하는데, 윤진원은 김대중이 도쿄에서 더 이상 떠들지 못하게 하는, 딱 거기까지만 하고 골칫덩어리를 산 채로 ‘진상’하는, 박정희나 이후락이 보기에 정말 ‘진상’을 떨어버렸다.

윤진원은 김대중을 납치한 흉악범이지만, 동시에 김대중이 살아남을 수 있는 묘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모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이 ‘숨 쉰 채’ 부산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박정희나 이후락이 지었을 표정은 가히 예술작품이었을 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아다 주인에게 나 잘했지 하고 가져다주어 기겁하는 일이 가끔 있다고 한다. 윤진원은 이런 멍청한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는 용금호에 김대중과 같이 타지 않고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가, 김대중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야 중앙정보부에 연락을 취했다. 윤진원이 취한 행동은 사실상 자신을 처벌한다면 그냥 일본에 망명해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본부에서는 하태준 국장을 일본에 보내 윤진원에게 직접 신변 안전을 보장하여 귀국시켰다.

 

 

자신들이 김대중을 납치했다고 주장한 ‘애국청년구국대’가 남긴 협박문.
납치엔 성공, 살해엔 실패하자
중정은 김대중을 풀어줬다
한·일은 짜고 현장에 지문을 남긴
김동운을 단독범인으로 몰고
그마저 끝내 무혐의 처분했다

그 뒤 북은 남북대화를 중단했고
학생 반유신시위가 번졌으며
재일동포 사회의 반박정희 정서는
육영수 피격사건을 불러왔다

 

김대중을 일본에 도로 갖다놓으라고?

김대중 납치로 한-일 관계가 꼬여가자 박정희는 연일 짜증을 냈다. 중앙정보부 일각에서는 “납치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을 도쿄로 갖다놓으면 될 게 아닌가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

이철희 등 납치사건 책임자가 윤진원에게 “도로 갖다놓을 수 없느냐”고 말을 꺼냈다가, 윤진원이 “권총을 빼들고 ‘너 죽고 나 죽자’고 대들기도 했다”고 한다.

특수공작부대(HID·육군첩보부대) 출신의 현역 육군대령으로 당시 대북공작에서 맹활약했던 윤진원은 결국 장성 진급에 실패했고, 그가 이끌던 해외공작단도 해체되었으며, 그 역시 중앙정보부에서 물러나야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목표가 ‘납치’가 아니었으며, 김대중을 납치해 서울로 데려온 것이 ‘성공’한 공작이 아니었음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는 없다.

김대중은 눈은 테이프로 가리고 손발은 묶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용금호의 화물창에 감금되었다. 김대중은 이때 중앙정보부원들이 자신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 했는데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 중정 요원들이 자신을 죽일 수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에서도 이 문제를 조사했지만,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나 일본 경시청 등에서 김대중을 구하기 위해 비행기를 파견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용금호에 실려 납치 다음날인 8월9일 오사카를 떠난 김대중은 8월10일 밤 부산항 외곽에 도착하여 하루를 보내고 11일 밤 하선하여 의사의 간단한 진찰을 받은 뒤 구급차를 타고 서울 모처의 중앙정보부 안가로 옮겨졌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살려서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8월13일 밤 저들은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 앞에 풀어주었다. 1972년 10월11일 집을 떠난 지 10개월 만에, 납치된 지 엿새 만에 김대중은 자기 손으로 자택의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자서전)

김대중은 돌아왔지만,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국은 1967년 동백림 사건 당시 독일과 프랑스에서 한국 지식인과 유학생들을 납치하여 국내로 이송했다가 국교 단절 일보직전까지 가는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도 중앙정보부가 일본에서 또다시 납치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박정희가 얼마나 심하게 김대중 문제로 중앙정보부를 압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총책임자인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전 1년 남짓 짧은 기간이지만 주일대사를 지낸 일본통이었다. 만약 주일한국대사관 일등서기관 김동운이 김대중 납치 현장에 지문을 남기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일본 정부는 자국의 수도 도쿄에서 일어난 납치사건이라는 엄청난 주권 침해에 대해 모르는 척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김동운의 지문을 확인하고도 이를 곧바로 발표하지 않았다.

김동운은 사건 직후인 8월10일 홍콩을 거쳐 귀국했다가 8월17일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일본 경찰이 공항에서부터 미행하는 등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틀 후 다시 귀국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8월23일 김동운이 납치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 소식통이 처음으로 인정했다고 보도했다가 서울지국이 폐쇄되었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김동운의 출두를 요청한 것은 그의 이름이 언론에 보도되고도 보름 가까이 지난 9월5일에 가서였다.

박정희 친일 정권이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저지른 전대미문의 주권 침해 사건을 두고, 일본의 ‘친한파’ 보수정치인들은 사건의 무마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양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김동운 서기관 개인의 범행으로 매듭지었다.

현장에 김동운 1인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한국 기관원들이 있었고,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김대중을 태우고 황급히 빠져나간 차량(品川 55もも 2077)의 소유자가 요코하마 총영사관 부영사 유영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대중이 일본에서 끌려간 안가가 고베시에 있는 오사카 총영사관 영사 박종화 명의로 된 집으로 지목되었는데도, 일본 경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김동운이 “일본 경찰 당국의 혐의를 받는 등, 국가 공무원으로서 자질을 상실하고 품위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공무원에서 해임시켰다”, “해임 후 계속 수사를 했으나 혐의를 입증할 확증을 얻지 못해 불기소 처분했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납치한 김대중을 오사카항에서 부산항으로 실어보낸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
일본 총리에게 머리숙이고 4억엔을 안기다

11월2일 국무총리 김종필은 박정희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사죄했다. 김종필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영접 나온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는 뻣뻣하게 악수하고, 총리 김종필은 머리 숙여 인사해야 할 만큼, 한국 정부는 일본의 선처를 바라야 할 형편이었다.

한진그룹의 조중훈은 따로 다나카를 방문해 박정희가 보내는 4억엔이라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전달했다.

일본에서는 김대중의 원상복원, 즉 김대중을 일본으로 돌려보내라는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다나카는 “김대중이 들어오면 시끄러우니 보내지 말라”고 한국 쪽에 얘기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돌았다.

식민지 시대부터 맺어진 한국과 일본 보수정치인들 간의 끈끈한 유착에 기대어, 그들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렇게 처리하면서, 한-일 간의 모든 문제가 ‘결착’되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와 함께 사건을 은폐한 일본의 태도는,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를 마무리하면서 김대중 납치사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려 했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일본 쪽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했다는 것을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일본으로서는 수사를 재개하여 김동운의 송환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며,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말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요구해 왔다.

민주적 정권교체에 의해 한국 정부는 1973년의 냄새나는 ‘한-일 결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반면, 일본 정부는 두 나라 간의 부끄러운 거래가 드러나는 것을 여전히 원치 않고 있었다.

사건의 시작과 끝은 역시 박정희였다. 박정희가 진실로 김대중 납치사건과 무관하다면 그는 납치범들을 처벌해야 했다. 김대중을 납치한 흉악범들은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한-일 결착’이 이뤄진 뒤인 1973년 연말 개각에서 이후락이 3년 만에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물러났을 뿐이다.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윤진원에 대해서는 사후관리 방안으로 ‘복직 또는 취직 알선’이라고 한 반면, 김동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보직 변경을 희망하므로 상응한 보직을 부여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은 형식적인 해임 후 바로 복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운은 해직 1년 후에 복직되어 8국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두 달 후 일본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해 와, 원남동에 사무실을 얻어 직책도 없이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으며 8년 동안 근무하다가 1982년 말 퇴직했다.

위의 일람표가 작성될 당시 김기완은 8국의 해외공작관으로 로스앤젤레스(LA) 주재 흑색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윤형로와 홍성채는 각각 7국과 2국의 부국장, 한춘은 차장 보좌관으로 있는 등, 전원이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납치범들을 철저히 비호했던 것이다.

김대중을 살려 보내 장성 진급에 실패한 윤진원은, 1975년 말 용금호 선원들의 밀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퇴직되었다가, 1977년 8월 박정희의 지시로 관리관에 재임용되었다. 박정희는 일본의 보수정객들과 손잡고 사건을 은폐하였을 뿐 아니라 납치범들의 뒤를 철저히 봐준 것이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여파는 심각했다. 8월28일 이북은 김일성의 동생인 남북조절위원회 평양측 공동위원장 김영주의 명의로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범인 서울측 공동위원장 이후락과는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다며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10월2일에는 유신 선포 1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학생들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간첩사건을 만들어내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에서 한국은 납치국가, 깡패국가가 되어버렸고,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문세광이라는 과격한 재일동포 청년이 박정희를 저격하려다가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한 비극적인 사건 역시 김대중 납치사건의 결과였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의 인과관계를 지적한 것은 박정희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