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미국 약속’은 믿을 수 있나
30일 거의 모든 신문·방송에 보도된 <미국의 소리>(VOA) 기사의 결론은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북한은 결코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3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응답자 대다수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믿을 수 없고, 협상을 통해 비핵화를 이루긴 어렵다’고 답변했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런 전망이 새로운 건 아니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도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식의 믿음이 야당과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뿌리내려 있다.
협상 비판론자들은 처음엔 남북 신뢰회복을 바탕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 북-미 직접 협상을 끌어내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노력을 “순진하게 북한에 속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비판의 초점이 달라졌다. 이제 북한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건 트럼프가 됐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그럭저럭 성공해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까지 가긴 어렵다. 결국 북-미 협상은 중간에 깨질 것”이라고 비판한다.
협상의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진정성과 비핵화 의지를 줄곧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북-미 협상의 핵심은 ‘비핵화와 체제 안전 보장의 교환’이다.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의심한다면, 미국이 북한에 해줄 ‘안전보장의 진정성’ 또한 의심해볼 수 있다. 아무리 미국이 ‘좋은 나라’라는 믿음을 갖더라도, 정확한 전망을 위해선 한번쯤 북한 입장에서 ‘핵을 포기한다면, 미국의 체제 보장 약속은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만하다.
‘체제 안전 보장’은 말이나 종이(선언 또는 협정)로 하는 것이고, ‘핵 포기’는 행동(핵탄두·대륙간탄도미사일 등의 제거)으로 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행동보다는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게 더 쉽다.
북한 비핵화의 원칙으로 ‘시브이아이디’(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폐기)란 용어를 흔히 쓰는데, 실제로 ‘되돌리기 쉬운’(reversible) 건 행동이 아닌 말 또는 문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이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북한과 불가침조약을 맺는다고 해서, ‘북한 체제의 안전’이 온전히 보장되는 건 아니다.
얼마 전 북한은 탈북자단체의 전단 살포와 태영호 전 영국 주재 공사의 기자회견을 문제삼아 남한 정부를 비난했다. 판문점 선언에 담긴 ‘상호 적대행위 금지’ 정신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남한 정부로선 탈북자단체 활동이나 태영호씨 발언을 무작정 금지하기도 쉽지 않다.
미국은 더할 것이다. 북한에 대한 불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지금 워싱턴 분위기론, 트럼프가 북-미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도, 의회 또는 민간 차원에서 반북한 활동이 잦아들진 않을 것이다.
이런 모든 부담을 안고서 북한이 미국과 협상에 나섰다는 사실만은 평가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믿을 수 있느냐는 건 별개의 문제다. 다만, 두 가지는 분명하다. 우선, ‘김정은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논리로, 북한의 진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북-미 협상을 흔드는 서울과 워싱턴 강경파의 시각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모든 협상은 그 끝을 드러낼 때까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다. 북한의 진정성만큼이나 미국의 안전보장 약속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걸 이해한다면, 양쪽 모두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협상을 추진하는 걸 반대할 명분은 없다.
또 하나는, 미국의 ‘체제 안전 보장’에 그토록 매달리며 ‘단계적 진전’을 요구하는 북한 태도가 억지는 아니며 어느 정도 이해할 구석이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고 이란 핵합의를 손쉽게 파기한 걸 보면, 국제사회와 약속을 깰 수 있는 나라는 전세계에 미국밖엔 없을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집요하게 캐묻는 것만큼이나, ‘체제 안전 보장’을 어떻게 해줄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북핵 협상은 성공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북-미 정상회담 직후에 ‘남·북·미 종전선언’을 하려고 서두르는 이유도, 한겹 더 북한의 불안을 잠재우자는 뜻일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이런 때일수록 중요하다.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7002.html?_fr=mt0#csidx96e1c9e4f48c6b9898649c1b78b11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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