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4·19 혁명 59주년,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15살 여중생의 ‘마지막 편지’

道雨 2019. 4. 19. 11:04





4·19 혁명 59주년,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4·19의거의 도화선이 된 3·15마산의거
김용택 | 2019-04-19 08:41:15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분단국가로 만든 장본인,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든 사람. ‘빨갱이 제거’라는 명분으로 수만 명의 제주 양민을 학살하고, 여수순천 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해, 보도연맹을 조작해 무고한 인민을 학살한 희대의 살인마, 부산정치파동, 국민방위군 사건, 발췌 개헌안, 김구선생님을 비롯한 조봉암… 등 민족의 지도자를 정적으로, 간첩으로 몰아 죽이고, 공포정치를 자행한 인물이 수구세력들이 국부로 부르는 이승만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들이 지나가는 한강다리를 예고도 없이 폭파해 수많은 국민들을 죽이고, 서울 사수, 결사항전 하겠다더니 정작 자신은 부산으로 도망, 1952년 전쟁 중에 장기집권을 위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번째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 이승만이다.


1960년 4월 19일, 이승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면서 혁명의 불꽃은 타올랐다.



<4·19의거의 도화선이 된 3·15마산의거>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2·28 대구 학생들의 시위는 급기야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로 그리고 마산으로 이어지면서,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등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상고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된다.


김주열군의 처참한 시신을 부산일보가 보도하자, 마산시위는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까지 합세, 전국으로 확대되자, 당황한 이승만 정부는 “적색분자들의 준동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조종해 일어났다”며 무마하려 했지만, 시위는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로 서울과 대구, 부산 마산, 전주, 대전, 청주, 제주 등 전국으로 확산된다.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 서울에서만 시위대의 규모는 10만에 육박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이성을 잃은 이승만정권은 경찰을 앞세워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 서울에서만 무려 10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분노한 시민들은 경무대, 중앙청, 대법원, 이기붕 사옥 등으로 몰려가 항의하고, 이승만 독재정권과 자유당을 옹호하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고, 반공을 외치며 시민들을 압박하던 반공회관에도 방화했다. 서울 각지의 파출소들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시위대는 카빈소총으로 무장,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성을 잃은 이승만 정권은 마침내 서울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는 시위를 진압할 수 없음을 확인, 무마하려 했지만 오히려 들불처럼 번지자, 이승만정권은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수원 일대에 확대 선포된다.


그러나 분노한 민중의 시위는 1만명으로 늘어나자, 마침내 서울대 교수단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합세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각 대학에서는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이 발표되고, 초등학교 학생들이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합세하기에 이른다.

정권수호에 혈안이 된 이승만은, 시위하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총에 맞아 사망하기에 이르고, 시위대는 10만으로 늘어나게 된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삼팔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서거를 규탄하는 국민들의 저항은,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이런 성명서를 남기고 하와이로 야반도주함으로써, 12년의 독재정권은 막을 내린다.

4.19혁명은 이렇게 사망 21명, 부상자 1,920명의 거룩한 희생으로,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 한다는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을 지키는 이정표를 남기고 마무리된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4·19혁명 59주년 아침 신동엽시인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를 읽으며 아침을 맞는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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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여중생이 죽기 전 어머니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임병도 | 2019-04-19 08:48:58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960년 4월 19일 한성여중 2학년에 다니던 진영숙 양은 학교를 마치고 시위에 참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집에 왔습니다.


경찰이 전날부터 3.15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대에 발포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라, 시위 참여는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이날 시장에서 장사하시며 홀로 진 양을 키우던 어머니는 집에 계시지 않았고, 진 양은 편지를 썼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진영숙 양의 마지막 편지)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긴 진영숙 양은 시위버스를 타고 경무대로 향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구호를 외치던 진 양은, 미아리 고개에서 경찰의 발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4.19혁명 희생자 186명 중 77명이 학생이었습니다.

대학생은 22명이었고, 고등학생이 36명,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19명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유튜브에서 바로보기: 15살 여중생이 죽기 전 어머니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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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원인과 의의 요약


1960년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 혁명 4. 19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60년대 4. 19가 일어나게 된 배경은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 요즘은 기자들이 기레기라고 불리며 국민들에게 하대 받고 있지만, 1950~60년대 기자들은 일종의 선비와 같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올바른 소식을 전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언론을 탄압하였지만, 기자정신은 끝까지 살아 대한민국의 현실을 알렸습니다. 


- 또한 북한과 대립해 있던 당시 서로 경쟁을 심하게 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교육열이 불붙어, 많은 시민들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4.19 혁명의 정의]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각종 독재와 부정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

사건의 발달은, 3.15 부정선거와 후에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오르며 4.19의 도화선이 됨.

이승만의 12년 장기 독재 정권을 끝내게 한 전 국민의 민주 항거 혁명, 



[4.19 항쟁의 시간적 흐름 ]



2월 28일 대구 학생시위


민주당 장면 후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정부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는 걸 방해하기 위해 일요일에도 강제 등교를 시킵니다. 이에 반발한 대구 일대 1,200명의 학생들이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 학생들이 공산당의 사주에 의해 시위를 하는 빨갱이로 몰아갔고, 경찰을 동원해서 강제 해산 시켰습니다.


3월 15일 부정 선거 규탄 시위



3월 15일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는 타의 추종을 불가합니다. 미리 이승만, 이기붕에 기표가 된 표를 3~40% 투표함에 채워두는가 하면, 정치깡패를 동원해 야당 참관인을 쫒아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조작으로 시작된 선거 결과는 당연히 이승만측의 대승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시 투표자의 수보다 개표수가 더 많이 나오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부정선거에 폭발한 시민들은 투표 당일부터 광주를 비롯한 마산, 부산 등 전 지역에서 시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경찰은 강제 진압을 하면서 발포까지 하게 됩니다. (이 일로 김주열 열사도 사망하게 됩니다.)


4월 11일 김주열 마산 의거



부산일보 허종기자에 의해 발견된 김주열 군의 시신은, 왼쪽 눈에 최류탄이 박힌채로 마산항에 떠올랐습니다. 경찰은 이를 은폐하려고 온갖 수를 썼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나온 사진을 본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습니다.

김주열군은 당시 전라도 남원에서 마산으로 유학온 입학 예정학생이었지만, 학교에 가보지도 못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어느정도 사그라들었던 국민들의 민주화의 열망은 전국적으로 재폭하게 됩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독재를 규탄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정치 깡패를 동원해 진압을 했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구타 당하여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전국민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대학생은 최고의 엘리트들로 국민들의 기대와 존경을 받는 존재였는데, 쓰레기 취급 당하던 정치깡패에서 폭행을 당했다니, 이 사건은 전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4월 19일 전국 규탄대회



4월 19일 전국적으로 벌어진 규탄 시위는 경찰에 의해 강력 진압이 되는데,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고, 이로인해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에서의 시위대는 발포를 통해 104명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4.19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의 힘이었습니다. 서울 시내 소재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고, 청년들의 의기는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4월 25일 전국 교수 시위



그 당시의 분위기는 교수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는 참혹한 사태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낀 교수들이 결국에는 시위에 참석하게 됩니다. 



4월 26일 이승만 하야



어린아이는 물론, 이제는 계엄군까지 국민의 편에서서 함께 시위에 나서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이 사건을 통해, 미국도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승만은 80이 넘은 나이에도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야욕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전 국민이 만들어낸 민주화의 열망은,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 의해 좌절됩니다. 다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무려 18년간 장기 독재를 하며, 국민을 탄압하고 민주 열사들을 죽이며 정권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이어진 전두환 정권까지 해방 후 40년간을 독재 정권에 신음하던 우리 국민들은, 6.10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까지 몰아내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들어선 정권들에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그의 후손들, 군부 독재 부역 세력들과 같은 사람들이 권력의 중심에 있다보니, 제대로 역사는 청산되지 못했습니다.

정부수립 70년이 지난 요즘 들어서야 역사 바로 세우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웠던 한국의 근 현대사는 왜곡된 내용이 굉장히 많습니다. 권력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들은 빼고 각색하여 잘못된 내용을 교육하고 세뇌하였기 때문에, 지금 세대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 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후손들에게는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쳐야 할 책임은 지금 우리에게 있습니다. 




낙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