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사, 촛불집회 엮어서 간첩 사건 기획했다
2016~2017년 ‘민주주의국민행동’과 엮어 조총련과 연계된 간첩단 기획…
함세웅 신부 등 첩보활동 대대적으로 벌여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수장 전두환은 계엄을 주도하며 합동수사본부장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이끌었다(오른쪽). 2016~2017년 조현천 전 국군기무사령관은 촛불집회를 보며 계엄령을 검토하고 불법 수사로 간첩 사건을 기획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연합뉴스
“2017년 조현천 전 국군기무사령관은 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같은 꿈을 꾼 것일까.”
지난해 8월 제1225호 ‘계엄은 실화다’에서 던졌던 질문이다.
“전두환에 비해 보잘것없다.”
당시 조 전 사령관의 행적을 되짚은 뒤 나온 답이었다.
드러난 계엄 문건만으로는 계엄을 선포할 만한 여건도, 그것을 유지할 만한 동력도 찾을 수 없었다. 신군부 세력에 비교할 수 없었다.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이번 기회에 계엄 자체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온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계엄 문건 작성 지시 혐의로 기소 중지된 조현천은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를 법정에 세우지 못한 채 현실이 될 뻔한 ‘계엄령 미수 사건’도 미완의 수사로 봉합됐다.
10개월 만에 제1267호 ‘촛불집회 엮을 간첩 사건 준비했다’를 쓰며, 조 전 사령관을 다시 떠올렸다.
“정말 당신은 전두환과 같은 꿈을 꿨단 말입니까.”
몇 달 전 기무사가 불법 사찰로 간첩 사건을 준비했다는 제보를 받고 나서 다시 물었다.
조 전 사령관이 지휘한 기무사는, 함세웅 신부라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을 정확하게 겨냥해 간첩 사건을 기획했다.
기무사가 1980년대 간첩 사건을 조작할 때 단골로 찾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앞세웠다. 레드콤플렉스를 자극해, 진보 진영의 대오에 균열을 내고, 보수 진영을 재결집하도록 만드는 시나리오였다.
간첩 사건 기획은 계엄령을 선포한 뒤 조 전 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를 맡아 공안정국을 만들어갈 카드로 충분해 보였다. 조 전 사령관은 1980년 쿠데타와 내란음모 사건을 육사에서 배웠다. 그의 사조직 ‘알자회’와 함께다.
1980년 계엄과 간첩은 정국을 마비시키는 쌍끌이 프로그램이었다.
박정희가 사라지자, 전두환은 계엄령을 기획한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조총련이 등장하는 내란음모 사건을 만들어, 최대의 정적 김대중을 잡았다. 김영삼의 발이 묶였다.
2017년, 조현천이 검토(기획)한 계엄령이 선포된다. 40년 전 전두환의 합수본부장 자리에 앉는다. 조총련이 연계된 간첩 사건 기획을 꺼내든다.
실현되지 않은 조현천의 꿈은 어디까지였을까.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이하 기무사)가 2016 ~2017년 촛불집회 당시,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을 벌이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연계된 ‘간첩’ 사건을 기획한 뒤, 이를 발표하려 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당시 기무사는 ‘조총련’ ‘간첩’ 등을 앞세우고, 이와 함께 유력한 종교인, 정치인 등을 리스트에 등장시켜 촛불 민심의 흐름을 반전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행동 현장 실무자까지 감시
기무사가 주목한 단체는 함세웅 신부가 상임대표였던 ‘민주주의국민행동’(국민행동)이었다.
이 단체는 ‘박근혜 탄핵’을 공언하면서, 2017년 대선에 민주정권을 수립하자는 목표를 내걸고 2015년 결성됐다.
국민행동 쪽의 말을 종합하면, 결성 초기부터 정보기관의 첩보활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함 신부에게는 정보기관원이 직접 찾아와 동향을 살피고 갈 정도였다. 신부와의 면담이라고 할 수 없는 명백한 사찰이었다.
국민행동 관계자는 “2015년 단체가 출범한 뒤 정보활동을 벌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며 “(촛불집회 무렵) 함 신부만이 아니라 현장 실무자까지 감시 대상이 늘어난 것 같았다”고 말했다.
기무사의 불법 사찰이 더욱 노골화한 것은, 이 관계자의 짐작대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하기 직전인 2016년 9월쯤이다.
기무사는 같은 해 8~9월 국외 공작으로 조총련과 국민행동이 관련됐다는 사실을 추론할 만한 자료를 입수했고, 간첩 사건 기획을 위한 사찰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기무사는 초기 사찰의 불법성을 희석(물타기)할 만한 결과물을 얻은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기무사는 우선 청와대에 사찰 결과를 보고하고, 민간 대공 수사의 합법성을 위해, 국가정보원에 자료를 보내 공조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와 별개로 물밑에서는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에 가속도를 붙였다.
불법 사찰은 기무사 내 일부 구성원들이 반발할 정도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가피한 기무활동이라는 말 한마디로, 조직 내 반대는 쉽게 제압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국방부 인사는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한 의원에게) 당시 분위기를 전하며 “그때 기무사 내부에서는 ‘계엄이다 뭐다 너절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공안활동을 하고 있다’는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누구도 못 건든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후 작성된 것이 간첩 사건 기획 결과물, ‘리스트’다.
불법에 의한 것이든, 진실이든 아니든, 리스트의 힘은 세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21>이 몇 달 전 받은 1차 제보는 명단의 존재, 그 인원, 일부 명단 등이었다. 조직도가 그려졌다는 것과 일부 구체적인 내용도 포함됐다.
이후 리스트 인물 가운데 <한겨레21>이 군 안팎의 복수 취재원에게서 직접 확인한 것은, 함세웅 신부와 현직 정치인, 국민행동 쪽 관계자까지 3명이다.
함 신부는 재야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정치권을 포함해,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진영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두루 갖고 있어 리스트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정치인은 여의도 정치권에서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촛불집회 등 현안에 다른 정치인보다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명단에 올라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인물의 공통점이라면 2016~2017년 촛불집회 이전부터 꽤 오랜 기간 정보기관이 주목한 대상이라는 점이다.
기무사는 간첩 사건으로 촛불 민심의 흐름을 반전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공동취재단
탄핵심판 앞두고 전면에 내세울 우려
국민행동 상임대표인 함세웅 신부는 현재 안중근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함 신부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민주주의국민행동은 북과 전혀 관련이 없다. 박근혜 정부 당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양한 시민사회단체의 연대기구”라며 “리스트는 물론이거니와 간첩 사건에 대한 얘기도 금시초문이다. (기무사가 간첩 사건을 기획했다면 이는) 촛불혁명을 흠집 내기 위한 모욕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리스트에 언급된 나머지 인사는 국민행동 쪽 관계자로, 기무사가 조총련과 관련돼 있는 것으로 의심했던 인물이다.
기무사가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과 방북 경험이 있는 국민행동 관계자들을 불법 사찰하는 과정에서 범위가 좁혀져 이름이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21>은 첫 제보에 등장한 나머지 리스트의 인물들이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낙인이 될 우려가 있어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명단 확인 과정에서 당사자들은 그 진위와 무관하게 난색을 표했다. 과거 사례에 비춰봐도 간첩 사건이 공안 정국을 만드는 힘은 당사자를 옭아매는 리스트에서 나온다. 때로는 관련자만 아니라 주변인들에게 공포를 유발하고 그들을 위축시킨다.
조총련 관련 사건은 더욱 그렇다.
현실에서 남북 교류 등의 차원에서 조총련과 만남이 이례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법 규정을 원칙적으로 적용하면, 사전 승인이나 사후 신고하지 않을 때 국가보안법 위반(회합·통신 등)이 된다. 조총련은 국가보안법상 이른바 ‘이적단체’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만 보면 입증 책임은 수사기관에 있지만, 현실에서는 결백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다. 자신이 만난 사람이 조총련이 아니라거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문제될 일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리스트에서 언급된 것으로 알려진 한 정치권 인사도 <한겨레21>과 만난 자리에서 같은 이유로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간첩 사건 기획을 한창 준비 중이던 2017년 2월, 기무사는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을 앞두고 정국의 전면에 등장할 채비를 마쳤다.
군 통수권자가 복귀해 계엄령 카드를 던지면, 불법 수사로 수집한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한 간첩 사건 기획과 리스트로 단박에 정국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계엄령 문건 수사에서도 드러났듯, 2017년 기무사의 계획대로 계엄령이 발동됐다면,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고, 본부장은 기무사령관(조현천)이 맡게 됐을 것이다.
계엄하에서 국정원, 검찰, 경찰 등 모든 수사기관은 기무사가 정점에 있는 합동수사본부 아래에 놓인다. 그리고 그때까지 불법성 시비 때문에 비밀리에 진행됐던 간첩 사건 기획은, 합법이냐 불법이냐 따질 필요도 없이 합동수사본부(기무사)가 판을 주도했을 것이다.
실제 계엄하에서 군 정보기관이 만들어낸 간첩 사건 기획은 쉽게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
1980년 신군부 쿠데타의 수장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으로 계엄령을 주도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군부는 5월17일 비상계엄령 발동 직후 사흘 만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전두환은 공안정국을 주도하며 결국 쿠데타를 완성했다.
지난해 7월, 기무사 개혁 거부하며 다시 등장
하지만 2017년의 기무사는 불법을 감수하며 강행한 계획을 결국 이루지 못했다. 당시 집권 세력의 예상과 달리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탄핵이 기각될 경우를 위해 검토했던 계엄령은 수포로 돌아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계엄령 문건 티에프(TF) 조직이 헌재의 탄핵 결정과 함께 사실상 해산된 것과 달리, 간첩 사건 기획을 위한 기무사 조직은 문재인 정부가 탄생한 뒤에도 유지됐다. 이는 공안 정국으로의 국면 전환용이던 간첩 사건 기획을, 이후 어떤 상황에서든 써먹을 수 있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간첩’이라는 단어가 기무사에서 흘러나온 것은 지난해 7월이다.
당시 기무사 내부에서는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기무사를 개혁이 아니라 아예 해체하려 했으며,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계엄 검토 문건 등 치명적인 정보를 지속적으로 흘린다고 반발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이런 ‘반동’의 흐름 속에서, 적폐 청산 공세를 막고, 조직의 생존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간첩 사건 기획을 꺼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기무사 개혁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앞서 리스트에 언급됐다고 한 정치인이 기무사의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에 대해 들은 것도 이때다. 하지만 당시 기무사 쪽 누구도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을 공개하거나 언론에 구체적인 정보를 건네지 않았다. 보수 여론조차 기무사에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이라, 역풍이 불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민군 합동수사단의 칼끝이 이 사안까지 겨냥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불법이냐 기획(조작)이냐 등과 무관하게, 간첩 사건 기획의 결과물에 대한 기무사 내부의 미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해를 걸러 지난 5월 조총련과 (단체의) 연계 혐의가 있다는 문건과 관련 리스트의 존재가 조금씩 기무사 바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요원 일부가 조직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모험을 결행하려는 데는, 현 정부를 향한 자유한국당 등 보수 야당과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의 이념 공세와 무관치 않다.
이미 기무사를 해편하고 안보지원사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이 불법 기획에 관여한 핵심 인물들은 바뀌지 않고 자리를 보전한 탓도 있다.
국군기무사령부 정문에서 헌병이 드나드는 차량을 조사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기획 자료, 국정원으로 보냈을 수도
<한겨레21>은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과 관련해, 경위 파악을 위해 안보지원사의 공식적인 입장을 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군 정보기관으로서 답변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군 관계자는 “기무사가 해편되고 안보지원사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불법 사찰과 공작 등 불행한 역사와도 절연했다. 지금 옛 기무사의 의혹에 대해 안보지원사가 답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이와 별도로 <한겨레21>이 국방부 사정을 잘 아는 고위 인사를 통해 안보지원사 내부에 재차 문의한 결과, 전·현직 핵심 간부들로부터 “(간첩 사건 기획에 대해) 지금은 말할 수 없다”거나 “(간첩 사건 기획 자체는) 틀리지 않다”는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과거 공작과 관련해서는 전면 부인으로 일관하는 관행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수사 당국은 말을 아꼈다. 다만 <한겨레21>이 확인한 결과, 세월호 가족 사찰, 계엄령 검토 사건 등 기무사 수사에 참가했던 민간, 군의 수사기관을 포함해 현재 공안을 담당하는 수사기관 어디에서도 ‘간첩’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2016년부터 3년 동안의 간첩 사건 기획이 수사 단계로 진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기무사의 간첩 사건 기획이 수사가 아닌 다른 불순한 의도로 진행됐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군 수사 당국자는 “현재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문건 등과 관련해) 재판이 진행 중이고, 수사도 여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수사 내용이나 수사 중 입수한 관련 자료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 다만 그런 (간첩) 사건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기무사의 사찰 행위에 대해서는 “기무사가 민간단체와 관련해 조사할 권한이 없다. 함 신부를 조사했다면 명백한 불법이다”라고만 밝혔다.
기무사는 2016년 간첩 사건 기획 관련 자료를 수사의 또 다른 주체인 국정원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에 <한겨레21>은 여러 경로를 통해 국정원에 촛불집회와 관련해 간첩 사건 기획 관련자를 수사하고 있느냐고 물었으나, “확인해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과 리스트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
전직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한겨레21>과 만나 “조현천 전 사령관이 재직한 시절이었다는 이유로 조 전 사령관의 행방이 드러날 때까지 계엄령 검토 사건과 함께 묻힐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난 정권에서 정치 개입이 일상이었던 군 정보기관으로서는, 보수 진영 쪽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면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카드일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기무사의 행위가 그 자체로 불법이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그 사안 자체가 총선, 대선 등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음모 정치가 흠집낼 수 있을까”
<한겨레21>은 탄핵 정국에서 촛불집회를 이끌었던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의 핵심 관계자를 만났다. 2016년 10월부터 2017년 3월까지 모든 촛불집회에 관여한 이 관계자는 “촛불에 참여한 천만의 시민이나 집회를 주최한 퇴진행동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면, 그때가 어떤 상황이었다는 것을 여전히 기억할 것”이라며 “한국 사회의 모든 개혁 과제가 함께 녹아들어 만들었던 촛불혁명에, 퇴행적이고 불법적인 기무사의 정치 음모가 끼어들어 흠집이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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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무사였을까
“불법까지 감내한다”는 통수권자의 신뢰, 그리고 간첩 사건 기획의 축적된 노하우
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이하 기무사)가 2016~2017년 촛불집회 국면에서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불법을 감수하며 간첩 사건을 기획해 발표하려 한 사실을, 최근 <한겨레21>이 확인했다.
왜 기무사였을까.
민간 영역에 관심을 두는 순간부터 불법인 기무사와 달리, 이번 간첩 사건 기획에 국가정보원이 나섰다면 수사 자체를 문제 삼기 어려웠다. 검찰이나 경찰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수사가 진행된 계엄령 검토 또한 기무사가 아니라 합동참모본부에서 진행했다면 내란음모 혐의와 무관했으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 이재수 사령관의 부임 상징적
답은 군 정보기관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시작은 1948년 군 창설과 함께 설치된 육군 정보국이다. 당시 정보국은 북한을 포함한 군사정보를 맡는 1과(전투정보과), 방첩·보안 업무를 책임지는 2과(특별조사과), 전시 특수공작을 수행하는 3과(공작과)로 구성됐다. 이는 각각 기무사, 정보사령부 등의 모태가 됐다.
이 가운데 핵심은 2과로, 한국전쟁 직전의 해방공간기, 한국전쟁, 전후 시기 등을 거치며 민간 수사에 개입했다.
2과가 정보국에서 분리된 뒤,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며, 정치 영역에 더 깊게 노골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가 김창룡으로 대표되는 특무부대 시절이다.
이후 방첩대, 육군 보안사령부, 국군보안사령부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군 정보기관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정권을 호위하는 무사 역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기무사가 탄생했다.
이런 역사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반복됐다. 기무사는 국정원, 군사이버사령부보다 확인된 것만 2~3배에 이르는 대규모 댓글부대를 운용했음에도 조직이 조금도 노출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다.
두 기관의 존폐를 논의할 정도로 진행된 댓글 수사 중에도, 과감하게 여론 작전을 수행해 통수권자를 위한 댓글을 달면서, 청와대로부터 더 큰 신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 가족 사찰이나 우파 단체 집회 지원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믿고 맡기면 불법까지 감내할 수 있는 통수권자 보필만을 위한 조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누나회(요직을 차지한 박지만의 육사 37기 동기생들)의 일원인 고 이재수 전 사령관의 부임은 기무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조현천 전 사령관 또한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추천이 있었다는 의혹은 현재진행형이다.
조 전 사령관은 2014년 군사이버사가 내부고발자의 잇따른 폭로로 휘청일 때, 사령관으로 부임해 위기를 잘 넘기면서, 군사이버사 댓글 지시 혐의를 받았던 김관진 당시 청와대 안보실장의 신임까지 얻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물론 국정원이 실수를 연발하면서 신뢰를 잃은 것도 기무사가 전면에 나서게 된 이유가 됐다.
박근혜 정부 당시 정치 댓글, 노무현 대통령-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대화록 공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등 국정원에서 터져나온 사건은 정권의 정통성을 위협할 만큼 부담을 줬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에 도저히 기댈 수 없는 환경을 국정원 스스로 만든 것이다.
한 번도 확인 안 된 재일 북한 공작원
조직의 명운을 걸 만한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을 기무사가 스스로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무사 사정을 잘 아는 예비역 장성들의 말을 종합하면, 기무사는 간첩 사건을 기획하는 데 다른 어떤 정보기관보다 노하우가 축적돼 있었다.
불법 간첩 사건 기획을 준비했던 2016~2017년 당시 주축을 이루는 대공 업무의 핵심 라인 상당수가 1980년대 보안사의 간첩(조작) 사건 실무자급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과거 보안사가 1970년대 후반 이후 1980년대 말까지 기획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관련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은 37건이다. 이는 중앙정보부(안기부), 경찰 등과 비교해도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그때도 군의 민간인 사찰과 수사는 불법이었다. 따라서 보안사는 혐의를 국외에서 잡은 다음, 국내에서 간첩 사건을 기획하는 방식에 집중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수사를 전면화하기 전까지는 민간인 불법 수사 논란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한 군 관계자는 <한겨레21>과 만나 “기무사의 불법 사찰은 무조건 처벌 대상이지만, 대상이 조총련이라면 그것은 지금도 ‘그레이 존’(한쪽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집단을 뜻함)이라 사찰을 문제 삼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기무사로서는 조총련을 사찰하면서 최소한 사건 기획 단계에서 불거질 수 있는 불법성 논란을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기무사가 이번 불법적인 간첩 사건 기획에서 노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80년대 간첩 조작 사건이 터지면, 재야·시민사회단체 등 진보 진영은 일제히 숨죽여야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80년 5월17일 전두환 신군부가 전국적인 계엄령을 선포한 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특별수사본부가 내놓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끊임없이 추궁받은 것은 조총련과 연계, 광주 민주화운동의 배후 여부다. 보안사로서는 김 전 대통령이 실제 배후였는지 조총련과 연계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전두환 신군부가 보안사가 만든 내란음모 기획을 발판 삼아, 쿠데타의 종지부를 찍고 정권을 탈환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재일 북한 공작원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는 드물다. 결과적으로 접촉한 그가 진짜 간첩 행위를 하기 위해 접근한 공작원이었는지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당 기자가 쓴 <시크릿파일 반역의 국정원>에 언급된 사례를 보면, 1989년부터 전국 교도소를 다니며 간첩 조작 사건 규명과 양심수 석방 운동을 해온 서준식씨는 “내국인 간첩이 일본에서 접촉했다는 재일 북한 공작원이 진짜로 공작원이었음이 입증된 예는 단 한 건도 없다”고 주장했다.
‘도로 기무사’ 오명 시달리는 안보지원사
해편(조직을 해체한 뒤 재구성함)을 통해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이름을 바꾼 군 정보기관은, 여전히 ‘도로 기무사’라는 오명에 시달리고 있다. 정당한 직무 범위를 조건으로 민간인 정보 수집이나 수사의 가능성을 열어뒀고, 대통령 독대 또한 부활할 여지가 남았기 때문이다.
전직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틈만 보이면 정치에 개입하려는 기무사의 악습은 안보지원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그 뿌리는 굵고 깊다”며 “개혁은 원래 근무하던 인원들이 순차적으로 모두 교체될 때까지 지속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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