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출토 12년만에 국보 승격

道雨 2019. 6. 26. 10:22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백제 예술미 대표작 '왕흥사터 사리기' 국보 승격

 



‘동아시아 최고’ 왕흥사터 사리기 출토 12년만에 국보 승격


국보가 된 왕흥사터 사리기 유물들. 가장 큰 외곽의 청동제사리합과 그 안에 차례차례 들어가는 은제사리호, 금제사리병으로 이뤄져있다. ‘화이불치’로 흔히 이야기하는 백제예술의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국보가 된 왕흥사터 사리기 유물들. 가장 큰 외곽의 청동제사리합과 그 안에 차례차례 들어가는 은제사리호, 금제사리병으로 이뤄져있다. ‘화이불치’로 흔히 이야기하는 백제예술의 미학을 가장 잘 표현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으며,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로 풀이되는 이 경구는, 백제 예술의 핵심 미학을 짚어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후세에 영원히 전할 이 멋진 문장을 지은 이가 12세기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 문인 김부식이다. 그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온조왕조’에서 백제 시조 온조왕이 새 왕궁을 지었다는 사실을 적으면서, 왕궁 건축을 품평하면서 이 구절을 넣었다.



사서의 기록에 전하는 백제 작품은 아니지만, 오늘날 문화재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평가하는 출토미술품이 있다. 2007년 충남 부여 백제 고찰 왕흥사터 목탑터에서 나온 사리기다.
577년 만들어져,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사리공예품으로 가장 오래된, 이 왕흥사터 출토 사리기가 마침내 나라의 국보에 올랐다. 
 문화재청은 국가보물이던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을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로 명칭을 바꿔 국보로 지정했다고 25일 밝혔다.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할 당시부터 최고의 국보감으로 지목됐지만, 발굴품은 일단 보물로 먼저 지정해야한다는 원칙에 따라, 2012년 국가보물로 지정된 뒤, 7년만에 돌고돌아 국보로 등극한 것이다.


2007년 왕흥사터 목탑터 발굴당시 심초석 사리공에서 사리기를 발굴할 당시 찍은 사진. 물에 잠긴 진흙 속에서 출토됐다.
2007년 왕흥사터 목탑터 발굴당시 심초석 사리공에서 사리기를 발굴할 당시 찍은 사진. 물에 잠긴 진흙 속에서 출토됐다.


사리기는 부처나 큰 스님이 세상을 떠나 열반한 뒤 나온 구슬모양의 유골 사리를 담는 용기를 말한다. 고대인들은 갖은 정성을 들여 사리기를 아름답고 정교하게 장식했다. 그래서 사리기는 고대 불교예술의 진수로 꼽히곤 하는데, 왕흥사터 사리기는 이런 사리 공예품둘 가운데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고의 명품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조사를 벌여 출토할 당시, 금당(대웅전) 앞 목탑지사리공(사리기를 넣은 네모난 구멍)에서 진흙 속에 잠긴 채 발견됐고, 그뒤 보존처리 과정을 통해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진수로 평가받는 지금의 빼어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왕흥사터 사리기는 1400여 년 전 비명에 간 백제 왕자의 추모용 사리를 담은 함이다. 겉부터 청동제사리합-은제사리호-금제사리병 순의 3가지 용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청동사리합 겉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정유년인 577년 2월15일에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의 명복을 빌고자 절을 세우고 발원했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망왕자(亡王子)’로 명문에 기록된 이 죽은 왕자를 두고, 학계 일각에서는 지난해 익산 쌍릉 대왕릉의 유골 주인공으로 사실상 확정돼 화제를 모은 후대 무왕의 아버지가 아니겠느냐는 설들이 제기돼 더욱 흥미를 일으킨다.

나란히 놓인 왕흥사터 사리기 유물들.

나란히 놓인 왕흥사터 사리기 유물들.



도굴의 손길을 타지 않고 지하에서 1500여년을 견딘 사리기 유물들은 단순한 외양에 격조와 기품을 고루 갖췄다. 서릿발처럼 준엄한 느낌을 주는 원통형 청동사리함은 단아한 모습과 보주형의 꼭지, 주위를 수놓은 연꽃 문양 등에서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을 절로 실감하게 된다


 학계는 이 청동사리함이 공주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639(백제 무왕 40) 제작된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보물 제1991)를 조형적으로 연결한 도상으로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청동사리함의 단단한 표면에 고졸한 명문 29자를 단박에 또박또박 새겨내려간 장인의 기술력도 놀랍기만 하다. 여기에 정교한 내부 귀금속 사리병의 우아하고 정연한 형상미가 더해졌다.

명문에는 사리를 넣었다고 새겼으나, 실제로 내부를 조사한 결과 전혀 나오지 않아, 사리의 행방을 놓고 신비스런 수수께끼를 낳기도 했던 유물이 바로 왕흥사터 사리기다.


문화재청은 왕실 공예품이라는 역사적·예술적 가치와, 현존 가장 이른 시기의 절대 연대를 가진 희소성과, 뛰어난 작품성으로 ,국내 공예와 조형 예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 국보 지정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전했다.

국보가 된 왕흥사터 사리기는 지난 3월부터 국립부여박물관 상설관의 별도 전시공간에서 관객들 앞에 자태를 선보이는중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99178.html#csidx5881c0b710d6ec387241f3a966df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