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2004년 국가보안법 파동의 교훈

道雨 2019. 12. 4. 11:18




2004년 국가보안법 파동의 교훈




2004년 연말을 뒤흔든 ‘국가보안법 개폐 파동’은 노무현 정부 레임덕의 단초로 여겨진다. 그해 봄 17대 총선에서 탄핵을 뚫고 단독 과반을 거머쥔 열린우리당은, 4대 입법의 맨 앞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내걸었다. 하지만 박근혜 한나라당의 반발과 여당 내 자중지란으로 한바탕 소동 끝에 무위로 끝났다.


당시 여당 의원 80여명은 보안법 직권상정을 요구하며 농성까지 벌였고, 당 지도부는 7조 찬양·고무죄 등을 빼는 선에서 야당과 타협안을 만들었지만, 추인을 위한 의원총회는 난장판이 됐다.

당 지도부가 공중분해됐고, 이후 열린우리당은 2005년 봄 재보궐선거를 시작으로, 선거에서 연전연패하는 치욕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여당이 실력이 있었다면 보안법 폐지를 관철했어야 했고, 여의치 않았다면 독소조항 폐지로 점진적 개혁의 길을 갔어야 했다.

여론을 돌려세울 능력도, 타협을 받아들일 용기도 없이, ‘폐지’라는 명분만 붙들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결과가 최악이었다는 건, 이후 열린우리당 상황이 잘 보여준다.


15년 전 보안법 파동은 지금 정국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노무현 정부가 대선,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뒤였고, 문재인 정부 역시 대선과 지방선거를 석권한 뒤다.

지금까지 꽃길이었다면 이제는 가시밭길일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3년차를 바라보았고, 문재인 정부는 반환점을 돌아 결실을 내놓아야 할 때다. 총선이 코앞이라는 점은 현 정부에 더 부담이다.


자유한국당의 ‘무더기 필리버스터’는 민생을 볼모로 했다는 점에서 무모하기 짝이 없다. 삭발-단식-필리버스터로 이어지는 투쟁은 왠지 초현실적이다. 투쟁이 투쟁답지 않고 우스꽝스럽거나 막무가내여서 현실감이 떨어진다. 하지만 현 정부가 야당 덕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렀다.


보안법 파동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은 여당의 분열이었다. 80여명이 보안법 폐지를 외쳤지만, 이에 반대하는 의원 역시 50~60명에 이르렀다. 야당 반대에다 내부 분열까지 겹친 진퇴양난이었다.


이번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추진세력의 단일대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선거법의 연동형 비율 등을 놓고, 이른바 ‘4+1’ 내부가 제각각이어선 곤란하다.

민주당이 개혁의 대의를 왜곡해서도 안 되지만, 군소정당이 과도한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려 해서도 안 된다. 합리적인 ‘4+1 단일안’으로 국민과 자유한국당을 설득해야 한다.


보안법 파동 때처럼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온전한 연동형 비례제, 분권형 개헌 등은 촛불이 요구한 정치개혁 과제지만, 지금 집권세력의 실력으론 쉽지 않아 보인다. 단번에 어렵다면 타협해서 조금씩 해나가야 한다.


특히 선거법은 주의 깊게 다뤄야 한다. 비록 소수의견이지만 민주당에서도 선거법은 협상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이번 필리버스터로 그 목소리는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거법은 끝까지 노력하는 게 좋다. 게임의 룰이니 협상으로 정해야 한다는 게 그냥 의례적인 말에 그쳐선 안 된다. 선거는 오묘해서 룰을 어떻게 고쳤다고 해서 결과도 그리 나오란 법은 없다.


최악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경우다.

선거법이 어렵다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이라도 처리해야 한다. 여기에는 ‘4+1’ 내부의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개혁의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 채 훼방 놓은 자유한국당을 총선에서 심판하자고 해봤자 메아리 없는 외침일 뿐이다.


‘질서 있는 후퇴’란 말이 있다. 새로운 반격, 새로운 승리를 기약하며 피해를 최소화해서 퇴각하는 것이다. 보안법 파동은 집권당이 질서 있는 후퇴를 제때 못함으로써 크게 상처 입은 경우다.

조국 문제도 마찬가지다. 장관 내정 단계나, 지명 이후 딸 논문 문제가 불거졌을 때 질서 있게 물러설 수 있었다. 질서 있는 후퇴는 무조건 퇴각과는 다르다. 조국을 적절한 시점에 정리했다면 그나마 민심을 경청했다는 말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집권세력이 갈 길은 먼데 해는 서산으로 기우는 형국이다. 유재수 의혹이나 울산시장 하명수사 의혹 등은 집권 후반기로 넘어가면 으레 터져나올 수 있는 사건에 속한다. 너무 심각하게 볼 일도, 그렇다고 가벼이 다룰 일도 아니다.

집권 후반기, 과속하지 않고 조금씩 결실을 맺으며 질서 있게 하산하는 지혜를 생각해봄 직하다.



백기철 ㅣ 논설위원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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