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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방진의 딸과 혼인하게 된 사연

道雨 2020. 9. 3. 11:07

이순신이 방진의 딸과 혼인하게 된 사연 

 

영의정 이준경이 이순신과 방규수의 혼인을 중매한 사연

 

이순신과 방규수의 혼인을 영의정 이준경이 중매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갖고 있었다. 덕수이씨 이정의 아들 이순신과 온양방씨 방진의 딸 방규수의 혼인, 대체 만인지상의 영의정 이준경이 양가와 무슨 인연이 있길래 중매를 했을까? 혼인이 이루어진 1565년 당시 양가의 가문을 살펴본다.

 

덕수이씨 이순신의 가문은 부친 이정(李貞)이 창신교위(5)였지만 실직 없는 산관이었고,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평시서 봉사(8)를 지냈지만 이미 20여 년 전에 작고했다. 증조부 이거(李琚)가 이조정랑(5)과 순천부사(3)를 지냈으니 양반의 집안이었다.

온양방씨 방규수의 가문도 부친 방진(方震)이 보성군수(4), 조부 방국형(方國亨)은 영동현감(6), 증조부 방흘(方屹)은 평창군수(4)를 지냈으니 역시 양반의 집안이었다. 양가 모두 행세깨나 하는 향반이었지만 현직의 의정부 영의정(1)과의 관계설정은 쉽지가 않다.

그런데도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이순신과 방규수의 혼인을 중매했다는 기록, 덕수이씨 외후손이 지은 장인 방진의 묘비에 전해진다.

 

“(전략) ()은 그 이전부터 이곳 백암리 월곡(月谷)에 거주하면서 보성군수를 역임하였고, 배위 숙인 남양홍씨는 장사랑 홍윤필의 여()인데 생육(生育)한 아들이 없고, 유독 딸 한 분을 두시었다. 후일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로 유명한 동고 충정공 이준경(李浚慶)이 일찍부터 양가의 친지인데, 그의 중매로 아들 겸 사위로서 성혼하니 서랑이 즉 덕수인 이충무공 순신(舜臣)이다. 때는 1565년 명종 을축 8월이요,

그때부터 이충무공은 문학보다 무술을 즐겨 수련하여, 후일에 임진왜란의 국란위기를 전승(全勝)하여, 구국의 원훈이요, 민족의 태양으로 받드는 사실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과 배위의 묘를 이곳 월곡(月谷) 동록에 남향하여 장례 모시고, 외손(外孫)이 계계승승하여 길이 제례를 받들고 있다.

                                                                                                      -外後孫 典敎 李鍾國-”

 

 

이준경이 중매를 하게 된 단서라곤 일찍부터 양가의 친지였다는 것과, 혼인한 날짜 을축년(1565) 8뿐이다. 양가에서 이준경(1499~1572)과 친지일 수 있는 사람은, 연대로 보아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생몰 미상)과 방규수의 조부 방국형(1490~1561)이다.

혹시 이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몇 년을 두고 끙끙거렸던 의혹의 실마리를 드디어 찾았다.

 

그랬다. 이준경은 아주 일찍부터 양가와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얽혀져 있었다. 시간을 두 사람이 혼인하기 43년 전 임오년(1522)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오식년사마방목(壬午式年司馬榜目), 중종 17년에 치러진 식년 사마시에서 이준경과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 그리고 이순신의 처조부 방국형, 이 세 사람이 모두 생원시 동방(同榜)이었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한 동기생들을 동년(同年) 또는 동방(同榜)이라 한다.

 

임오사마방목(壬午司馬榜目)에 의하면 생원·진사 각 100명을 뽑았는데, 각각 15, 225, 370명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 기재된 방목(榜目)의 내용이다.

 

이준경(李浚慶): [생원] 중종(中宗) 17(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3(三等) 9(39/100)

이백록(李百祿): [생원] 중종(中宗) 17(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3(三等) 50(80/100)

방국형(方國亨): [생원] 중종(中宗) 17(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3(三等) 56(86/100)

 

이 자료의 출전(出典)가정1(아중종대왕17)임오식년사마방목(嘉靖元年(我中宗大王十七年)壬午式年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TK 2291.7 1746(1522)])이다.

 

이준경은 10년 후 중종 26(1531)에 대과(大科)에 급제했다. 그리고 전라순찰사, 좌찬성, 좌의정 등을 거쳐,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이백록은 성균관 유생과 평시서 봉사를 지냈고, 방국형은 강화교수, 남부주부, 영동현감을 지냈다.

동방 세 사람 중, 대과에 급제한 이준경만이 승승장구 영의정까지 올랐고, 이백록과 방국형은 고위직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세 사람의 관계는 생원시 동방(同榜)으로서 매우 돈독한 형제의식(兄弟意識)을 지니고 있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박현순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사마시 동기생들은 동방(同榜)으로서 동년의식(同年意識)이 매우 강했다. 이들은 요즘의 고시동기회 같은 방회(榜會)를 만들고, 동기명부 같은 방목(榜目)을 발간했다. 거주지에 따라 전국에 산재해 있어도 명예와 우정을 나누고 형제의 의리를 나누었다.

이를 위해 방목에는 필수적으로 자()는 물론 부모 형제에 대한 신상을 세밀히 기록 했다. 부모구존으로 구경하(具慶下엄시하(嚴侍下자시하(慈侍下영감하(永感下) 등 생존 여부를 구분하고, 안항(雁行)으로 형과 동생의 이름까지도 모두 기록했다. 이는 서로가 형제로서 비정(比定)된 관계였기 때문에, 동방(同榜)의 형제는 나의 형제라는 인식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조부, 증조부, 처부, 처조부, 외조부 등도 기록할 수 있는 내용은 모두 적었다.

동방들은 방목을 편찬하기 위해 은문소(恩門所, 간행위원회)를 만들고, 경제력이 있거나, 높은 직위에 있는 동방의 찬조를 받아 간행했다.

조선 시대 방목(榜目)은 조정의 행정문서로서의 방목인 방목문서·방목성책이 있고, 합격기념물로서의 방목인 문무과방목·사마방목이 있고, 전고서(典故書)로서의 방목인 국조과방목·잡과방목 등이 있다. 동방들이 만드는 방목은 합격기념물로서의 방목이었다.

 

주목할 것은 이순신이 혼인하는 을축년(1565) 당시 세 사람의 상황은 매우 달라져 있었다. 이준경은 영의정에 제수되었고, 이백록은 이미 약 20여 년 전인 1545(추정)에 사망했고, 방국형도 이미 4년 전인 1561년에 사망했다. 이준경과 동방(同榜)의 끈을 이어주는 두 사람이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의 끈끈한 인연은 이준경과 방국형의 아들 방진 사이에서 다시 이어진다. 이준경은 을묘왜변(1555)으로 왜구의 행패가 극성을 부리자, 이를 소탕하기 위해 전라도순찰사로 내려갔다.

명종실록의 기사에 이준경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었습니다마는, 신은 일찍이 그 도에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형이 험악한지 평탄한지와 도로가 넓은지 좁은지를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전남대 호남학연구소 노기욱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이때 보성군수가 방진이었다. 순찰사 이준경이 가 본 적도 없는 낯선 전라도에 동방(同榜) 방국형의 아들 방진이 보성군수로 있다는 사실은 크게 의지할만한 언덕이었을 것이다.

 

방진이 보성군수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 아산 월곡(月谷)에 돌아와 외동딸의 신랑감을 구하고 있었다. 이때 유달리 비범한 청년이 인근에 있었으니, 그가 곧 이백록의 손자 이순신이었다.

방진은 부친 방국형과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이 이준경과 동방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내심 이순신을 사위로 삼고 싶었던 방진이 이준경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이준경은 양가 조부의 동방으로서 흔쾌히 두 사람의 혼인을 중매했다. 드디어 덕수이씨 이순신과 온양방씨 방규수가 혼인하는 을축년(1565) 8월이다.

이준경도 마침 이때 815,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에 제수되니, 양가의 축복이요 세 집안의 경사였다.

 

이 위대한 만남의 혼인은 구국의 영웅 이순신을 미리 알아본 장인 방진의 혜안이었다. 이순신은 무인이었던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아들 겸 사위로서 문학보다 무술을 즐겨 훈련한 결과 무과에 급제했다.

 

 

 

* 이 내용은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카페 방진님의 글에서 옮겨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