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인물열전 속 이순신

道雨 2020. 9. 3. 11:54

이순신(李舜臣)

 

시호 : 충무공(忠武公) : 여해(汝諧)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무장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조영무, 남이, 구인후, 정충신, 이준, 김시민, 이수일, 김응하 등 아홉 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충무공 하면 오직 이순신 장군만을 떠올린다. 대체 그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후손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이순신은 전란 내내 그처럼 놀라운 전략과 무용으로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다 종국에는 죽음까지도 감추고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함으로써 남해의 수호신으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이순신은 전란 내내 당리당략에 빠진 뭇 위정자들로부터 충심을 외면당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흩어진 군기를 바로 세우며 왜군과 맞서 싸웠던 충신이었다. 아울러 그는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던 백성들의 안위를 살폈던 의인이었고, 심지어 어린 왜군 포로에게까지 온정을 베풀었던 인도주의자였다.

오늘날 우리는 난중일기를 통해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만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전장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도원수 권율의 그릇된 일처리를 비난하고, 경상 좌병사 김응서의 잘못된 정세판단을 강하게 비판한다. 또 수시로 자신을 모함하는 전라수사 원균이 음험하고 흉악하다고 표현하는 등 불쾌한 내심을 숨기지 않는다.

절망적인 백의종군과 함께 다가왔던 홀어머니의 부음, 사랑하는 아들 이면의 비보를 접하고는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토로한다. 그처럼 이순신은 장수로서 어버이로서 수시로 닥쳐오는 불행과 고통을 홀로 오롯이 감내해야 했던 한 명의 고독한 인간이기도 했다.

 

잠룡 시절

이순신은 1545(인종 1) 38일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거사였던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의 셋째아들이다.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그의 가문은 6대조부터 사대부의 전통을 이어왔지만, 조부 이백록이 조광조가 이끄는 사림파의 별과에 천거 받았다가 기묘사화의 후폭풍으로 벼슬길이 끊어졌다.

어린 시절 이순신은 서울에 살면서 세 살 터울의 서애 유성룡과 어울렸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그가 매우 영특하고 활달해서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즐겨했는데, 자라면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회고했다. 장차 뛰어난 무인으로서의 자질이 어렸을 때부터 발휘되었던 것이다.

조카 이분이 남긴 행록에는 어려서 놀 때면 늘 전쟁놀이를 하는데, 아이들이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는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빈한한 살림 때문이었는지, 이순신의 가족은 외가인 충청남도 아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현재 지명으로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다.

그때부터 이순신은 반가의 자제들이 그랬듯이 과거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가문에 덧씌워진 굴레 때문에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자질에 어울리는 무과에 응시할 뜻을 품게 된다.

1565(명종 20), 20세의 이순신은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혼인하여, 훗날 이회, 이열, 이면 등 아들 셋과 딸 하나를 얻는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572년(선조 5년) 8월,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지만, 시험 도중 낙마로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여 낙방하고 말았다. 첫 번째의 참담한 실패 이후 절치부심한 그는,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2월, 드디어 31세의 늦은 나이로 식년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그때부터 무관 이순신의 파란만장한 관직 생활이 시작된다.

 

북방의 삭풍을 헤치고

고대하던 무관의 꿈을 이룬 이순신은, 그해 12월 함경도의 험준한 요새인 동구비보(董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발령받았다. 권관이란 당시 변경의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9품 무관직이었다. 그 무렵 유성룡이 사람을 보내 동개〔櫜鞬, 활집〕를 빌려달라고 하자, “이것은 빌리자는 말인가, 바치라는 말인가.” 하며 거절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유성룡이 몹시 흡족해 하면서 장차 그를 발탁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산 높고 물 깊은 변방에서 3년의 임기를 채운 그는, 1579(선조 12) 2월 종8품 봉사(奉事)로 승진하여 서울에 있는 훈련원에 배속된다. 한데 그는 타고난 올곧은 성품 때문에 화를 입는다. 정5품 병조정랑인 서익이 친인척을 승진시키려 하자, 극력 반대하다 부임 8개월 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순신을 매우 강직한 인물로 기억하게 된다. 무릇 하급관리가 원리원칙에 충실하면 상사로부터 주목받고 내외의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고위관리가 되어 같은 모습을 보이면 대개 융통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순신도 마찬가지였다.

1580(선조 13) 7, 이순신은 종4품의 발포(鉢浦) 수군만호로 파격 승진한다. 발포는 지금의 전남 고흥군 남쪽에 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수군 장교로서 남해를 지키게 된다. 한데 이곳에서도 예의 원칙 고수로 인해 파란을 겪게 된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 하자, 관청의 물건을 함부로 쓸 수 없다며 제지했다가 미움을 사게 된 것이다.

그 업보는 이전에 악연을 맺었던 서익이 병기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내려오면서 구체화된다. 서익은 발포 병영의 병기 상태가 불량하다고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담당자인 이순신을 이전의 벼슬인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끌어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581(선조 14) 5월의 일이다.

그 무렵 이조 판서였던 율곡 이이가 그를 불렀지만 냉정하게 거절한다. 아무리 가문의 어른이라도 하급관리가 인사권을 가진 고위관리를 만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결벽증 같은 청렴함이 있었기에 훗날의 성웅 이순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1583(선조 16) 10, 이순신은 다시 강등되어 종9품으로 건원보(乾原堡)의 권관이 되었다. 과거 급제 후 최초의 품계로 돌아왔으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울화를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직무에 임했고, 한 달 만에 여진족의 추장을 생포함으로써, 정7품 훈련원 참군(參軍)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슨 까닭인지 이듬해 1월에야 부음을 들은 그는 즉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삼년상을 마친 1585(선조 18) 1, 40세의 나이로 종6품 사복시 주부(主簿)로 복직한 이순신은, 부임 16일 만에 유성룡의 천거를 받아 조산보(造山堡) 만호가 되었고, 1년 뒤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으로, 여진족의 침입이 빈번한 조선의 최전방이었다. 1586년 가을 녹둔도에 여진족의 일단이 쳐들어와, 병사 11명을 죽이고, 병사와 백성 160여 명을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이순신은 병력의 열세로 잠시 후퇴했다가,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 진영을 급습하여 60여 명을 구출해 왔다.

그런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당사자들로서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최고지휘관의 결정이었으므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장수로 손꼽히던 이일은, 그런 여진족의 발호를 용납할 수 없었던지, 1588년(선조 21년) 1월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의 근거지를 급습하여, 200여 채의 가옥을 불사르고 380여 명을 사살했다. 이때 이순신도 함께 참여하여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이듬해부터 관운이 트인 이순신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1589(선조 22) 2전라도순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조방장과 선전관을 역임했고, 12월에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1590(선조 23) 7유성룡의 천거를 받아 종3품인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로 승진했지만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고,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가 취소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요직에 임명하여 병란에 대비하고자 했지만, 모든 인사를 남인의 세 불리기로 이해하던 서인 신료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성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차 국왕 선조를 설득하여, 1591년 2월 이순신을 종4품의 진도군수에 임명했고, 그가 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의 가리포(加里浦) 수군첨절제사에 임명한 다음, 2월 13일에는 정3품의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했다.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지 불과 4년 만에 조선 수군의 핵심 지휘관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순신의 초고속 승진 배경에는, 고조되고 있던 왜란의 징후를 감지한 유성룡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벼슬길에 올랐을 때부터 철저하게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비리를 용납하지 않았던 이순신이, 이런 변칙 인사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 역시, 시시각각 닥쳐오는 전란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46,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이었다.

 

임진왜란, 준비된 승리

1592(선조 25) 413, 부산포 앞바다에 수천수만의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향후 7년 동안 조선 강토를 폐허로 만든 임진왜란의 서막이었다. 그때부터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20만 명이 바다를 건너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는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신립 장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북쪽으로 쾌속 진군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보름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겁에 질린 선조 일행은 도성을 버리고 역시 쾌속 도주하여 622일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에까지 이르렀다. 그 뒤를 따라 왜군은 개성과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 곧 조선을 점령하고 장차 압록강을 넘어 요동까지 치고 올라갈 기세였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순순하게 진행될 리 없다. 허수아비 같이 무너지기만 하던 조선 군대에도 준비된 인물 이순신이 있었던 것이다.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래, 거북선을 비롯한 각종 군선을 제작하고, 화포를 정비하며, 정예수군 양성에 부심했던 이순신은, 616일 옥포해전의 첫 승전보를 띄워, 육전의 연패로 상심해 있던 선조를 기쁘게 했다. 이후 그는 남해를 거쳐 전라도 지역으로 진공하려던 왜군을 낱낱이 격파함으로써 전황을 미궁 속에 몰아넣었다.

그 때문에 보급이 끊어진 왜군은 육지를 통해 곡창인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려 했지만, 78일 권율과 황진이 지키던 이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10월 중순 김시민이 지휘하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속전속결로 조선을 점령하려던 전략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된다.

남해에서 펼쳐진 이순신 부대의 활약상은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루었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상 그의 승리는 신출귀몰한 계책이나 엄청난 화력의 위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육전의 거듭된 패전을 감안하여, 무리하게 싸우지 않고, 해안의 요지를 사수하면서, 각종 정보를 활용하여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전장으로 적을 끌어들였다.

7년 동안의 전쟁기간 동안 그가 공세를 취한 것은 부산포해전과 노량해전 등 불과 몇몇 해전에 불과했다. 이런 전략의 이면에는, 만일 조선 수군이 남해에서 1패라도 당하는 순간 조선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했을 때, 조선 수군은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군사마저 뿔뿔이 흩어져 절멸상태가 되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 일대가 무인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순신이 임진년의 첫 전투인 옥포 해전부터 계유년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까지 거둔 연승 행진은, 멸망 일보직전의 조선을 지탱해준 궁극의 버팀목이었다.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손꼽히는 한산도대첩 역시 이런 절박감과 이순신의 철두철미한 용병술이 빚어낸 당연한 승리였다.

 

2323승의 연승신화

임진왜란 개전 당시 남해에는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포진하고 있었고, 전함은 250척 정도였다. 그런데 왜군이 내침해오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휘하의 전선을 모두 침몰시키고 도주했다. 그 때문에 경상도 지역에 원균의 전함 4척만 남자, 조정에서는 수군과 전함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던 전라도 수군에게 남해안 방어를 기대하면서 이순신에게 지휘권을 주었다.

대임을 맡은 이순신은 그해 54일부터 8일 동안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적선 37척을 격파했다. 529일부터 벌어진 2차 해전에서는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적선 72척을 침몰시키고, 88명의 왜병을 사살했다.

78일에는 이억기와 함께 전함 90척을 이끌고 출동하여, 노량에서 원균과 합류한 다음, 견내량에 정박 중인 왜군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들였다. 이때 그는 학익진을 펼쳐 층각선 7, 대선 28, 중선 17, 소선 7척을 파괴했다. 이순신은 여세를 몰아 9일부터 11일 새벽까지 안골포에 있는 적선을 맹폭했다. 그 결과 조선군은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고, 왜군 250명을 죽이는 등 개전 이래 최대의 승전을 거두었다. 이른바 한산도대첩이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91일 적선 470여 척이 주둔하고 있던 부산포를 기습하여 적선 100여 척을 파괴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왜군은 육지로 급히 대피한 다음, 총포를 쏘면서 맹렬히 대항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해 6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했다.

이와 같은 연승의 배경에는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력과 주력선인 판옥선의 견고함, 강력한 화포가 있었다. 그렇듯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뒤이어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보급에 큰 타격을 입은 왜군의 공세가 크게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런 이순신의 활약상을 크게 치하하면서, 15938월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했다. 그 결과 조선 수군 전체를 통솔하게 된 이순신은, 섬으로 이어진 남해의 지리적 특성을 십분 이용하여 방어 전략을 펼쳤다.

그 와중에 이순신은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곡식을 저축하고, 고기잡이와 소금 생산을 독려했다. 그리하여 군대에는 군량이 풍족해졌고, 남쪽 백성들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순신의 마음가짐은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두 자루 장검에 새겨진 명문으로 대변된다.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

석 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왜적의 피가 강산을 물들이리라.’ 이것이야말로 적을 대하는 장수의 위용이었다.

바야흐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명나라와 일본 간에 화의교섭이 진행되던 1597(선조 30) 1, 이순신은 갑자기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가혹한 국문을 받는다. 이중첩자 요시라의 정보를 바탕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하라는 왕명을 어겼다는 혐의였다.

전장에서 일선의 장수는 군왕의 잘못된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전통적인 군략이 깡그리 무시된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의 진정한 적은 왜군이 아니라 정권욕에 사로잡힌 정치모리배들의 파당논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오랜 후원자인 유성룡도 힘을 잃은 상태였다. 천행으로 지중추부사(판부사) 정탁의 비호가 있어 간신히 풀려난 이순신은, 권율의 막하로 백의종군을 명받는다. 생애 두 번째 겪는 백의종군이었다.

그런 가운데 망외의 비보가 전해졌다. 어머니의 부음이었다. 상심한 이순신은 권율에게 나흘 동안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달려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그 시기의 난중일기는 당시 인간 이순신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必死則生 必生則死)

1597, 명나라와 일본의 화의가 결렬되면서, 잠정 휴전 중이던 전쟁이 재개되었다. 대규모의 왜군이 다시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몰려들었다. 정유재란이었다. 그해 7,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참패하면서 완전히 궤멸되었다. 기세가 오른 왜군은 8월 들어 남원과 전주를 함락하고, 장차 서울 진공을 노렸다. 그러자 겁에 질린 선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순신을 재차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당시 조선 수군에 남아있는 전함은 불과 12, 뿔뿔이 흩어졌던 군사 수백을 모아 간신히 전단을 꾸렸지만, 실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런 이순신에게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육군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이순신은 감연히 남아있는 전력만으로 적을 막아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이리저리 수소문해보니 1척의 전함이 더 있었다. 그리하여 불과 13척의 낡은 전함으로 이순신은 무한도전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 무모한 명량해전 전야, 그는 붓을 들어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 쓴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

운명의 916, 이순신은 울돌목(명량 :鳴梁)에서 생사를 도외시한 분전으로, 겁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함으로써,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다. 그렇게 조선 수군은 왜군의 서해안 진출을 틀어막음으로써, 전쟁의 일대 전기를 이끌어낸다.

이런 불세출의 승장 이순신에게 당도한 것은 통곡(痛哭)’이란 두 글자가 쓰인 편지였다. 그해 10월 사랑하는 셋째아들 이면이 고향을 급습한 왜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날 52세의 아버지 이순신의 영혼은 천참만륙 찢어졌다. 그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14일 신미. 맑았다. ……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정신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느냐.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냐. 부르짖으며 슬퍼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어쩌면 편지의 겉봉을 뜯어본 그날부터 이순신은 세상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은 왜 이토록 잔인하고 무심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의 원흉은 왜적인가, 하늘인가.

1598(선조 31) 1119, 이순신은 철수하려는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막아섰다. 그리고 적탄에 맞아 치열한 53년의 생을 접었다. 그와 함께 7년 동안 이 땅을 피로 물들였던 잔혹한 전쟁도 끝났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으로 증직하고, 1604년에는 덕흥부원군 추봉과 함께 좌의정으로 추증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793년(정조 17)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가 남긴 난중일기196212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고, 2013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실록에서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다. 비록 옛날의 양장이라 한들 이에 더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했구나. 병신년, 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바꾸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양호 지방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다.

 

 

*** 이 글은 한국사 인물열전에서 옮겨온 이상각님의 글이며, 부분적으로 수정 추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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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가계

 

가계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楓巖公)은 중종 17년(1522년)에 생원 2등에 합격하였고, 참봉을 거쳐 평시서봉사를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당한 뒤, 벼슬을 내놓고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은거를 하다가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아들(즉 이순신의 아버지) 정(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에 가까운 충청도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다.

훗날 상주 방씨(온양 방씨)와 혼인한 이순신이 정착한 곳이기도 한 현충사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고, 덕수 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내는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인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8명을 증여 받았으며, 충청도 은진(恩津)(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지방에 있는 가옥과 토지도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2년에 아내 상주 방씨(온양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현충사 경내에 있는 고택 역시, 이순신이 자신의 할아버지 백록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알려졌다.

 

충무공 가계

 

이순신은 한성을 떠나 외가와 처가(온양 방씨)가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이주했다. 조선 중기까지도 남귀녀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으로,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풍습은 부인과 처가의 위상을 높였다.

이순신의 처가는 상주 방씨(온양 방씨)이다. 장인은 보성군수를 역임한 방진(方震)이다. 방진의 할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지낸 방홍(方弘)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을 지낸 방중규(方中規)이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1499년~1572년)이 중매를 섰다.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1세의 나이에 방씨에게 청혼하고 결혼하였다. 이순신은 장인 방진(方震)의 격려와 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방진으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병학을 익혀, 11년만인 1576년 2월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충무공이순신전서》의 ‘방부인전’에 방진(方震)의 활솜씨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방씨 부인은 슬기롭기로 유명하였고, 친정 집에 들어온 도둑들을 지혜를 이용해 물리치기도 했다.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만큼 내조도 잘했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1567년 출생), 이열(1571년 출생), 이면(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은 아들들을 통해 충청도 아산 본가에 있던 방씨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다녀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방씨가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잠을 설치며 걱정했을 뿐더러, 점까지 치며 방씨 부인을 염려하는 내용이 일기에 적혀 있다. 

 

1598년 (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 후, 그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李舜臣妻方氏告身教旨)는 보물 제1564-8호이다. 정경부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정·종 1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리는 명호(名號)로 외명부 부인으로서는 최상급의 품계이다.

 

 

인물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벗이기도 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했으며, 그의 성격을 거슬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은 완벽주의자로 뭐든지 철저함을 추구했다. 한산도 대첩 하루 전 군무이탈을 감행한 부하 수졸 황옥현을 붙잡자마자 바로 참수하여 효수해 군기를 보존한 반면, 부하들에게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 하지만 도망치려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을 강조하여,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부하들이 잘하면 포상에 아낌이 없었다.

또한 자신의 군공보다는 아군의 승리에 더 관심이 깊었으며, 이 때문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권율에게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의 일부를 제공했으며, 권율은 이순신에게 제공받은 이 무기들로 행주대첩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용모에 대해서는 이순신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없고, 그의 얼굴을 묘사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제독의 복식이나 이순신 제독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평가

 

사후부터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 걸쳐 이순신은 신분과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과 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각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고 있다.

 

국내 이순신의 평가

 

선조

《졸서후사제문(卒逝後賜祭文)》에서도 똑같이 그 잘못을 사죄하는 듯한 말을 남기며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라고 추켜세웠다.

 

류성룡

《징비록》에서 류성룡은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평하였다.

 

오윤겸

제문에서 그는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황천에서 다시 일으켜올 수 없음을 생각하고 백 명을 대신 바치고도 몰려올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고 평하였다.

 

홍석주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관음포의 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에서 홍석주는 이순신을 중국의 제갈량에 빗대어 칭송하고, 제갈량이 병사한 뒤에는 촉한이 위태롭게 된 것과는 달리 이순신은 오히려 그가 남긴 공적 덕분에 지금(홍석주가 살아 있었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며 이순신의 공적을 치켜세우고 있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천관우) 등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아주 높았다.

 

국외 이순신의 평가

 

다음은 이순신에 대한 국외의 인물들이 내린 평가다.

참고로 일본어 위키백과 이순신 문서에 의하면, 도고 헤이하치로의 발언은 일본에 직접적인 사료가 남아있지 않으며, 일제 강점기 조선의 실업가 이영개가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퍼트린 얘기라고 기술되어 있다.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제독은 나의 스승입니다. 실로 존경할 만한 인물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藤居信雄) 著 《이순신각서(李舜臣覚書)》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회고록에서

 

명나라 만력제는 이순신의 공을 높이 사서, 이순신 생전에 명나라 정1품 대명수군도독(大明水軍都督)을 제수한다. 동아시아에서 육군을 수군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명나라 품계에서 수군에 도독(정1품)이 없고 제독(종1품)만 있는데, 굳이 “정1품”“수군도독”이라는 명예직을 제수하였다.

 

 

주요 저서

 

이순신은 일기와 시조, 한시 등 여러 편의 작품들을 남겼다.

 

관련 문화재

 

이순신과 관련된 문화재와 사적

* 난중일기(국보 제76호)

  전 7책 중 제1책은 「임진일기(壬辰日記)」로 27매(1592.5.1.∼1592.5.4., 1592.5.29.∼1592.6.10., 1592.8.24.∼1592.8.28., 1593.2.1.∼1593.3.22.), 제2책은 「계사일기(癸巳日記)」로 30매(1593.5.1.∼1593.9.15.), 제3책은 「갑오일기(甲午日記)」로 52매(1594.1.28.∼1594.11.18.)로 되어 있다.

제4책은 「병신일기(丙申日記)」로 41매(1596.1.1.∼1596.10.11.), 제5책은 「정유일기(丁酉日記)」로 27매(1597.4.1. ∼1597.10.28.), 제6책은 「정유무술일기(丁酉戊戌記)」로 20매(1597.8.4.∼1598. 1.4.), 제7책은 「무술일기(戊戌日記)」로 8매(1598.9.15.∼1598.10.7.)로 되어 있다.

그 밖에 장계(狀啓)·등본(謄本), 별책 부록 끝에 1598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최후 10일간의 일기가 1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제5책과 제6책의 「정유일기」 중에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는 중복되어 있다. 무슨 이유로 다시 썼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앞 책의 간지(干支)가 잘못 적혀 있는 점과 내용에서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더 많이 적힌 것으로 보아, 시간적 여유를 타서 기억을 더듬어 다시 한 번 더 적은 것이 아닌가 한다.

 

유적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옛집은, 이순신 제독이 혼인 후 살고, 그 후 종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덕수 이씨 충무공파의 종가집이다.

 

이순신의 이름을 따거나 기념하는 것

                                                              100원 동전에 그려진 이순신

 

  • 대한민국의 100원 주화에는 이순신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폐지된 500원 지폐에도 이순신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에 묘사된 이순신은 사후 추서된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린 초상화를 넣은 것이다.
  • 대한민국 해군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함은 그 급의 제1번함이다.
  •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세종로에는 이순신 동상이 있으나 동상의 신장이 문제시 되고있다. 이순신은 180후반이 넘었다는 것이 공식기록이며, 사용도구와 여러 문헌을 조합했을때 190이 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 대한민국 서울 중구 인현동(건천동) 명보극장 자리는 이순신이 태어나고 살았던 생가가 있었던 곳이다.
  • 대한민국 서울에는 충무로라는 번화가가 있으며, 그 곳을 지나는 지하철역은 충무로역이다.
  •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충무로도 이순신을 기념하여 지은 도로명이다.
  • 대한민국 서울 중구 흥인동에는 공연장, 갤러리, 컨벤션센터, 체육시설 등을 갖춘 종합예술시설인 충무아트홀이 있다.
  •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는 한때 충무시와 통영군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으로,한국에서 이순신의 탄생일을 기리고자 제정한 날이다.
  • 이순신종합운동장
  • 이순신대교는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와 광양시 금호동을 연결하는 길이 2.26km의 현수교이며, 2개의 주탑 사이의 경간(徑間) 길이가 1,545미터인데, 이는 이순신이 태어난 해인 1545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대한민국 해군

 

KD-2 구축함의 1번함은 충무공이순신함이다. 대한민국 대양해군의 주축인 구축함으로서 현재 6척이 건조되었다. 장보고급 잠수함의 9번함은 이순신함이다. 충무공이순신의 부하인 동명이인의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땄다. 

 

관련 대중문화

 

 

관련 서적

 

  • 난중일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기술한 전쟁 일기.
  • 충무공이순신전서》: 유고 전집으로 정조의 어명으로 교서관(校書館) 관리 유득공(柳得恭)의 주도 아래 찬수를 시작하여 정조 19년(1795년)에 간행되었다. 14권 8책의 활자본.
  • 《이순신전》(李舜臣傳):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신문에서 1923년 2월에 박은식(朴殷植)이 편저하여 발행하였다.
  • 구국의 명장 이순신》: 최석남이 쓴 이순신의 전기, 이순신의 자살설을 주장하고 있다, 1992년, ISBN(13) : 9788909002318
  • 《난중일기 "Das Kriegstagebuch,Nanjung Ilgi"》 《Gründel, 2013 독일 마인쯔 대학 출판사》ISBN 3-00-017418-4,
  • 《이양숙 덕수 이씨,그륜델 ,독일어 번역, 출판 》
  • 《이순신 : 폴른 어벤져(Yi Soon Shin : Fallen Avenger)》은 미국의 만화작가 온리 콤판이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이순신을 접한 후 감명받아 만든 만화이다. 총 12권의 시리즈로 구성되어있다.

 

드라마

 

KBS

MBC

SBS

 

영화

 

 

뮤지컬

 

 

기타

 

충무공묘소 훼손 여자무속인 검거 경제신문 1999-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