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군화 세 켤레

道雨 2020. 9. 22. 12:50

군화 세 켤레

 

우리집에는 군화가 세 켤레 있다.

엄밀히 말하면 군인들이 신는 전투화가 한 켤레이고, 공사장 등에서 신는 안전화가 두 켤레이다.

 

전투화는 내가 군대 현역 시절에 신던 것으로 전역할 때(1988) 가지고 나온 것이니, 2020년 현재로 계산하면 30년이 넘은 것이다.

나머지 안전화 두 켤레는 작은아들인 범진이가 동의한의대 재학 중 유급을 당한 시기(2차례)에, 거제도의 조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받은 것들이다.

 

전투화는 모든 군인들이 신는 것이니, 군대의 온갖 경험과 즐겁고 고된 일들의 추억을 일으켜주는 추억의 매개자이다.

 

범진이는 예과 때 한 번, 본과 때 또 한 번, 모두 두 번의 유급을 당했다. 보통의 대학생들은 보통 한 번도 경험하기 어려운 유급을, 두 차례나 겪었으니 본인 심경이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학비 조달이었다.

당시 내 경제 형편상 대학 등록금을 대기가 어려워, 범진이는 입학 때부터 정부대출학자금으로 학비를 조달했는데, 유급을 하게 되면 복학할 학기 학자금이 대출되지 않기 때문에, 학비를 벌기 위해 유급 기간 중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이 블로그에는 '아들의 아르바이트'라는 글이 별도로 있으니, 그 글을 참조하기 바람)

 

범진이는 스스로 인터넷에서 일자리를 찾아, 거제도의 어느 조선소의 협력업체에서 두 번(유급 2회 기간)을 일하게 됐고, 그 때 마다 안전화를 지급받았기에 안전화가 두 켤레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10년이 넘은 안전화 두 켤레는 범진이의 한의대 생활과 유급, 그리고 조선소 근무 등, 고난과 역경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어제 저녁, 이 군화 세 켤레를 손질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보았다. 그저께 벌초를 다녀오면서 이 '군화 세 켤레'를 사용했기에, 손질해야 했는데, 현관 밖에 신문지를 여러 장 깔고, 목욕용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먼지를 털고, 구두약칠을 하면서, 내 군대 시절, 그리고 범진이의 한의대 시절과 조선소 정경을 떠 올리며, 잠시나마 옛 생각에 젖어보았다.

 

이 군화 세 켤레는 지금은 1년에 딱 한 번 벌초 때 유용하게 쓰이고 있고, 내 젊은 청춘을 보낸 군대 시절, 그리고 범진이의 고난의 시절의 산물이지만, 지금은 추억의 매개물이자, 자랑스런 기억의 기념품으로 10년 넘게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남아 있다.

 

 

* 맨 왼쪽 목의 높이가 높은 군화가 내가 현역 시절 신었다가 제대하면서 신고나온 전투화이고, 오른 쪽 두 켤레는 범진이가 조선소 근무 시절 신었던 안전화이다.

 

 

* 이번 벌초 때는, 힘든 벌초를 펜션에 놀러온 듯 즐거움을 함께 보내는 기회로 만들기 위해, 청주 문의에 '엄마의뜰(농원)'을 빌려서, 토요일 저녁을 가족들이 함께 1박을 했다. 물론 큰아들 식구 4명과 범진이 까지, 모두 7명이 1박을 하면서, 손녀들과 함께 나이롱뽕도 했다. 두꺼비 4장을 13으로 하는 임기응변까지 선보였다. 

 

큰 아들(공진)네는 남해에서 올라왔고, 범진이는 대구의 **한의원에서 부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토요일 오후에 우리가 올라가는 길에 들러 내 차로 함께 올라갔고, 내려올 때도 대구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함께 한 뒤, 내려주고 왔다.

날씨도 선선하고, 다른 (남자)조카들까지 모두 왔기에, 긴 장마로 풀이 많이 우거졌지만, 비교적 일찍 끝내 예년에 비해 덜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