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증오는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지도자는 누군가를 미워할 여유가 없습니다.”

道雨 2021. 11. 18. 09:46

‘증오의 정치’ 넘는 후보가 이긴다

 

 

지난달 미국의 퓨리서치센터는 전세계 주요 국가를 대상으로 한 주목할 만한 여론조사 리포트를 발표했다.

‘선진국의 다양성과 분열’이란 제목의 리포트는, 세계 주요 국가 국민의 정치·사회 갈등에 관한 인식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인종·종교·도농 갈등이 비교적 적을 거라고 흔히 생각한다. 조사 결과는 그렇지 않다. 이 리포트를 보면, 정치적으로는 좀 싸워도 사회·문화적으론 어느 나라보다 동질성이 높다고 여겼던 믿음은 여지없이 깨진다.

 

여론조사 내용을 보면, ‘서로 다른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그룹 간에 매우 강한 또는 강한 (정치적) 갈등이 있다’는 질문에 한국과 미국 응답자의 90%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17개 조사 대상 국가 중 가장 높다. 그다음엔 뚝 떨어져서 대만(69%), 프랑스(65%), 이탈리아(64%)가 뒤를 이었다.

더 놀라운 건 종교·인종 갈등에 대한 시각이다. ‘다른 종교를 믿는 그룹 간에 매우 강한 또는 강한 갈등이 있다’는 항목에서 한국은 61%가 ‘그렇다’고 대답해, 이 역시 17개 국가 중 가장 높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갈등이 심심찮게 외신을 타는 프랑스(56%)나 미국(49%)보다 더 높은 수치다.

‘다른 인종이나 민족적 배경을 가진 그룹 간에 매우 강한 또는 강한 갈등이 있다’는 항목에서 1위는 미국이었다. 지난해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던 나라인 만큼, 미국민의 71%가 ‘인종 갈등이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이슬람 이민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유럽 국가에서도 갈등이 심각하다는 응답은 많았다. 프랑스 64%, 이탈리아 57%, 독일 55% 등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인종 또는 민족 갈등이 심각하다’는 응답은 57%로 유럽 국가들 못지않다. 일부 젊은층이나 보수 그룹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 중국 동포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강렬해지는 현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퓨리서치센터 조사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더 이상 ‘한민족’이 아니다.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단결력을 갖추고 금 모으기 운동과 자발적인 마스크 착용으로 국가적 위기를 넘어서는 모습은 이 조사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자료: 퓨리서치센터

 

 

인종·종교·지역 등 모든 분야의 갈등을 이끄는 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의 정치적 갈등이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정치 갈등과 정치적 양극화를 완화하지 않고선, 우리 사회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음을 여론조사는 드러낸다.

리포트에 달린 작은 제목 중 하나는 ‘미국과 한국의 정치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는 것이다. 똑같이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두 나라의 정치 갈등이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다는 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전세계적으로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는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미국과 한국은 대통령제가 안정적으로 뿌리내린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꼽혔다. 그런데 두 나라 모두에서 정치 갈등이 매우 심각해지는 건, 대통령제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공화당은 벌써 두번이나 의회에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제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민주당의 탄핵 추진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국민의힘 경선 과정에서 윤석열·홍준표 후보는 공공연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구속을 언급했고, 이재명 후보는 “구속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윤석열 후보”라고 맞받았다.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으로 ‘적폐 청산’을 지휘했던 윤석열씨가, 거꾸로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돼, 예리한 칼날을 정부·여당에 들이대는 현실 자체가, ‘증오의 정치’가 어느 수준에 달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징표다.

 

비호감 대선, 불안한 선거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갈등과 분열에 기댄 득표전은 국민 지지를 받기 어렵고, 설령 승리하더라도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가혹한 백인 정권을 용서했던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게, 2007년 <뉴욕 타임스>의 빌 켈러 편집인이 물었다.

“당신을 27년간이나 투옥하고 수많은 흑인을 박해한 백인 정권을 어떻게 증오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만델라의 대답은 이랬다.

“증오는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증오는 전략을 실행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지도자는 누군가를 미워할 여유가 없습니다.”

 

2022년 봄의 한국 대통령선거 결과를 예측해보라면, ‘증오의 정치’를 넘어서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고 만델라는 대답하지 않을까.

 

 

박찬수|대기자

pcs@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19679.html#csidxcc82ffd822c58a58a5e4e1e15e1e8c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