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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5년 원각사 창건 때 세조가 지은 ‘계문’ 나왔다

道雨 2021. 12. 16. 09:47

1465년 원각사 창건 때 세조가 지은 ‘계문’ 나왔다



“망령 위로하는 수륙재 참여하자”
왕이 신하·백성에게 권하는 글
판각해 찍은 실물 족자 첫 공개
‘국가문화재급 희귀 사료’ 평가

 

 
         * 원각사 창건을 치하하는 내용을 담은 세조의 계문. 강희안 글씨와 세조의 수결(서명)을 판각해 찍은 본이다.

 

 
1453년 10월10일,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정변이 일어났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이유가 벌인 ‘왕실 쿠데타’였다. 이유는 한명회, 신숙주 등 측근들과 짜고 김종서, 황보인 등 조정 중신들을 철퇴 등으로 학살했다. 이 계유년 정변으로 12살 소년이던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사육신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4년 뒤 단종까지 제거해버린 7대 임금 세조(재위 1455~1468)다.

 

 

 

피비린내 나는 왕실 상잔의 살육전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즉위 뒤 ‘휴머니스트’로 돌아섰다. 살생을 금하고 자비행을 권하는 불교에 귀의해 업보를 풀려 했다. 곳곳의 절을 찾아가 참배하고, 큰 절을 낙성하는 불사를 펼쳐,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불교를 후원한 왕으로 전해지는 배경이다.
 
그 자취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으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이자, 1919년 3·1 독립항쟁의 서막을 열었던 서울 종로 탑골공원 자리의 큰 절 원각사가 세조의 원찰이었다. 세조 11년인 1465년 왕명에 따라 창건됐다.
 
세조가 원각사 창건 당시, 물과 뭍에 떠도는 망령들을 위로하는 의례인 수륙재(水陸齋)에 함께 참여하자고, 조정 신하와 백성들에게 권하며 지은 글 ‘계문’(契文)이 처음 세상에 나왔다. 1465년 4월11일 절의 낙성을 맞아 중신들과 함께 행차하면서 직접 지어 신하와 승려들에게 나눠준 글이 556년 만에 발견된 것이다.
 
고미술업체인 중국미술연구소는 최근 한 중견 소장가한테서 을유년 세조 계문의 존재를 확인하고, 15일 <한겨레>에 실물을 전격 공개했다.
계문은 가로 50.3㎝, 세로 63.5㎝ 크기로 온전한 족자에 장황된 것으로, 당시 명필 강희안의 글씨와 명화가 안견의 필치로 그렸다고 추정되는 용 그림에, 세조가 직접 서명하고 고승, 종친, 문신, 무신의 이름을 따로 한명씩 올린 계문을 만든 뒤 판각해 인출한 것이 특징이다.
계문의 내용은 일제강점기 이능화가 지은 <조선불교통사>(1918)에 일부 전해졌지만, 세조와 중신·승려들의 서명과 도장이 찍힌 당시 실물은 최초로 확인되는 것이다.

 

* 계문 말미에 ‘承佛之寶’(승불지보)란 붉은색 어보가 큼지막하게 찍혀 있다. 이 어보는 다른 문서에선 확인되지 않고 이 계문에서만 보인다. 생육신 조려의 아버지였던 조안의 이름이 친필로 적혀 있다. 아마도 조안이 계문을 소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원각사 계문은 ‘봉안된 부처의 사리가 저절로 늘어나는 등 신묘한 이적이 거듭되는 가운데 맞은 원각사 창건을 계기로, 수륙재 설행에 동참할 것’을 밝힌 문서다.
계문을 살펴보면 우선 ‘승천체도열문영무조선국왕’(承天體道烈文英武朝鮮國王)이란 세조의 존호와 직함이 보이고, 주위에 수많은 꽃비 문양이 새겨져 있어, 한눈에도 문서가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계문 문장 끝부분에는 세조의 이름인 ‘유’(楺)를 축약한 세조의 친필 어압(서명)이 새겨진 게 특징이다. 글이 끝나는 후반부에는 승려, 종친, 상신, 장수, 사장이란 직함으로 참석한, 계원의 우두머리 다섯명인 대선사 홍준과 세종의 동생 효령대군, 세조의 측근 중신인 신숙주, 한명회, 조흥주의 봉호, 품계, 직명, 성명을 쓴 명단이 새겨졌고, 그 위에 ‘승불지보’(承佛之寶)란 큼지막한 글자가 새겨진 세조의 어보가 붉은 인장으로 찍혔다.
특히 맨 마지막에 친필로 적힌 조안(趙安·1395~?)은 인출한 계문을 임금한테서 하사받고 수륙재 계원으로 동참을 약속한 인물로 추정되는데, 단종을 추종했던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1420~1489)의 아버지란 점이 주목된다.
 
계문을 본 불교학계 전문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전반기 세종~세조 대 임금과 왕실의 불교 행사 후원에 대해 직접 기록으로 남긴 문서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세조가 남긴 불교 관련 문서 기록은, 원각사 낙성 한해 전인 1464년, 고승 신미, 학열, 학조 대사가 세조의 안녕을 위해 강원도 평창 상원사를 중창하는 권선문을 썼을 때, 세조가 소식을 듣고 전해준 어첩(국보)이 유일했다.
세조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계문을 직접 행차하면서 지어 남겼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는 점에서, 발견된 계문은 역사적 의미가 막대한 국가문화재급 희귀 사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 승려 활동으로 역사에 오점을 찍었으나, 해방 이후 불교학계의 권위자로 군림했던 동국대 초대 총장 권상로가, 직접 계문을 보고 찬한 분석 글도 붙어 있어 가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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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족자에 장황된 15세기 세조의 계문. 20세기 불교학자 권상로가 쓴 국한문 해설문이 아래에 붙어 있다.
 
 
한국 불교학계의 권위자로 지난해 <한국불교사>를 출간했던 정병삼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세조의 원각사 창건과 관련한 구체적인 행적과, 당시 왕실의 지원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실물 사료”라며 “당시 서울도성 중심부에서 왕이 불사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계원이 되어 동참하도록 이끄는 일종의 권위 있는 증명서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윤수 중국미술연구소 대표는 “소장자가 내년에 계문을 관련 사료들과 함께 학계에 공개 전시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23519.html?_fr=mt2#csidxd8859505ac7863a97d8f589670e873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