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병사 월급 200만원 가자!

道雨 2022. 1. 27. 09:48

병사 월급 200만원 가자!

 

이번 대선에서 가장 딱 떨어지는 공약이다.

시작은 이재명 후보. 지난해 12월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27년 병사 월급을 200만원 이상으로 보장’하겠다 했다. 빵 터트린 것은 윤석열 후보. 그는 이달 초 “병사 봉급 월 200만원”이라는 열 글자를 페이스북에 올렸고, 오랜만에 정책 논의가 시작됐다. 진보정당은 오랜 시간 병사 월급 인상을 주장해왔는데, 심상정 후보 공약이 ‘2030년대까지 병사 월급을 최저임금 수준으로 인상’이니, 민주당·국민의힘 공약이 정의당보다 파격적인 셈이다.

 

20대 남성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공약이다, 돈은 어디서 나냐 등의 비판이 있다. 현실성에 대한 비판인데, 징집된 청년들에게 줄 월급을 올리겠다는데 세금 아까워할 사람이 있을까? 필요한 일이라 합의하고 더 걷으면 된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200만원 공약은 ‘병영 내 휴대전화 사용’에 이어 군대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계속되어온 울분과 착취의 군대에서 합리적 동원제도로의 변화를 이끌 것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다.

먼저, 200만원을 통해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논리는 비로소 해체된다. 한국 사회에서 병역의 특수함은 ‘도덕화된 의무’라는 점이다. 국가는 재정적 부담 없이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병역을 신성화·도덕화시켰다. 도덕은 따를 수 있을 뿐 다투거나 의심할 수 없다. 같은 국민의 의무지만, 조세 저항은 있어도 병역 저항은 없는 이유다. 무거운 도덕에 깔린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그런데 너는 왜 안 가냐”일 수밖에 없었다.

병사 월급 200만원을 통해 병역은 ‘신성한 의무’에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희생’으로 바뀐다. 그동안에도 병사 월급이 꾸준하게 인상되어왔지만, 복무의 대가라고 명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최저임금을 웃도는 수준인 200만원 월급은 질적으로 다르다. 윤석열 후보는 “개인의 희생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제대로 설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공약 배경을 밝혔다. 기존 사회 인식이 ‘의무에 보상은 필요 없다’였다는 점에 비춰보면 현저한 변화다. 도덕과 의무, 신성으로 치장해왔지만 본질이 희생이었음을 병사 월급 200만원 공약이 드러낸다. 이제 담론이 바뀔 수 있다. “너는 왜 희생하지 않느냐”에서 “내 희생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달라” 또는 “이것이 정당한 대가인가”로.

다음으로, 적정 규모로 군대가 재편될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한국군은 60만 대군으로 성장했는데, 이후 적절한 병력이 얼마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없었다. 최근 저출생이라는 중대한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공급 제한에 따른 수동적인 병력 규모 조정 논의가 있을 뿐, 도대체 몇 명의 군인이 있어야 적절한 군사력인지에 대한 논의나 근거는 일천하다.

왜일까? 공짜로 쓰는 노동력이기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이명박 정부 시기, 비극적인 천안함 사건 이후 군복무 기간을 24개월에서 18개월로 단축하려던 정책이 백지화된 사례가 있다. 천안함 사건과 군복무 기간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안보태세 강화라는 명분으로 21개월 복무로 고정되었다. 당시 그 누구도 ‘복무기간 3개월 늘리면 천안함의 비극을 막을 수 있냐’고 묻지 않았다.

병사 월급 200만원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몇 명을 몇 개월 복무시키느냐가 국가 예산 부담과 직결되는 쟁점이 된다. 이미 시민단체들은 200만원 공약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나아가 현재 징집병 30만명을 10만명 수준으로 감축하고 군복무 기간도 단축하자는 제안을 했다. 예전 같았으면 평화주의자들의 흰소리 취급을 받았겠지만, 이제는 현실이다. 젊은이들의 희생을 어떻게 필요 최소한으로 줄일지, 명료한 수식이 논의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200만원 공약은 군복무자들의 박탈감을 완화할 수 있는 치유의 정책이 될 수 있다. ‘이대남 현상’ 또는 ‘청년 문제’라고 명명되는 현상의 원인 중 하나가 군복무다. 직접적 폭력은 완화되었을지 몰라도, 사회와 단절되어 노예처럼 대가 없이 노동하고 시간을 보내야 하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신성한 의무’라는 이데올로기 효과도 예전 같지 않기에 감정의 상처는 더욱 커졌을 수 있다. 자신의 노동과 시간에 대한 보상이 최소한도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희생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임재성 |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