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 알려주는 리더의 조건

道雨 2022. 3. 2. 11:46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 알려주는 리더의 조건

[20대 대선, 서사로 읽는 한국 정치 6] 로빈 윌리엄스의 풍자 코미디 <맨 오브 더 이어>

 

 

대통령이 총을 들었다. 자국을 침공한 강대국이 암살 특공대를 수도로 보낸다고 협박했지만 아랑곳없다. 남녀노소 전 국민들이 그런 대통령 및 정치인들과 함께 결사항전에 나섰다. 그렇다. 러시아 푸틴 정권의 우크라이나 침공 얘기다.

러시아 침공이 임박했을 시점까지도 그런 우크라이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서구 언론들은 코미디언 이력을 문제 삼았다. 초보나 아마추어 이미지를 덧씌웠다. 대다수 우리 언론들 역시 그런 논조를 이어 받아 '아마추어 대통령', '코미디언 대통령'에 초점을 맞췄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과거 자국 정치 시트콤에서 청렴한 정치인이자 대통령을 연기했던 젤렌스키 대통령. 그의 이력과 상관없이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푸틴 정권이 자행한 명백한 전쟁 범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그의 이력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역사와 현안, 강대국 러시아의 폭압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또 도리어 조국과 아이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젤렌스키 대통령의 목숨을 건 선택은, 전세계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지도자상이 어떤 건지 확인시켜 주는 중이다. 

그런 '의외의' 선택을 실천에 옮긴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은 또 있다. 현실이 아닌 영화에서다. <레인맨>으로 유명한 베리 레빈슨 감독이 <웩 더 독>에 이어 미 정치판을 풍자한 코미디 <맨 오브 더 이어>(2006) 속 코미디언 톰 돕스가 그 주인공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로빈 윌리엄스가 적역을 연기했다. 전쟁을 막고자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이 캐릭터도 전 세계를 호령하는 강대국의 대통령 당선자로서, 또 개별 인간으로서도 쉽지 않은 선택에 나선 인물이다. 그 선택에 과정엔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유권자들이 바라는 리더와 정치인의 품성과 덕목이 자리하고 있다.
 

                                         ▲ 영화 <맨 오브 더 이어>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정치판에 실망한 국민들,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선택하다 
 

정치판에 정말 실망했어요. 제 친구들도 마찬가지에요. 혹시, 돕스씨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 어떨까요?


정치 토크쇼 진행자인 돕스에게 객석의 젊은 여성이 물었다. 돌발 질문이었다. 돕스는 영화 속에서도 실명이 언급되는 현실의 제이 레노, 데이비드 레터맨과 같은 당대 유명 토크쇼 진행자이다. 참고로, 젤렌스키 대통령도 시트콤에 출연할 당시 같은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 영상이 미 전역으로 생중계된다. 이를 본 시민들이 너도나도 "돕스를 대권 후보로"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대권 도전을 격려하는 이메일이 방송 3시간 만에 무려 400만 통이나 왔다. 수 백만 통의 성원이 이어지자 시청자들의 장난이라 여겼던 돕스도 마음을 고쳐먹는다.

때마침 한창이던 대선 레이스에 민주당 현직 대통령과 공화당 상원의원이 후보로 확정된 상태.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난 '인터넷 여론의 힘'과 대중적 인지도에 힘입어 돕스는 출마를 결심한다.
 

정당들 싸움에 지치셨죠?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잊은 지 오래입니다. 정당에 대한 충성, 로비스트들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국민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정치가 먼저입니다. 상원 의원님? 정유 회사에서 2천만 달러 지원 받은 거 맞으시죠. 그 회사 석유가 뜨거운 연비가 중요한 게 아니네요. 실제 뜨거운 관계셨잖습니까. 아참, 막대한 자금도 받은 그 회사 중역들하고 전용기 타고 같이 휴가 가는 사이시라면서요.


지지율 상승에 따라 3자 TV 토론에 나설 기회가 주어진 돕스.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 느꼈던 걸까. 그는 토론이 막바지로 치닫자 말 그대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토론장 가운데로 진출, 특유의 유머를 동반해 그간 미국 정치를 좀 먹어온 거대 양당 정치를, 로비 정치를, 우민 정치를 꾸짖는 일장 연설에 나선 것이다.

어느 대통령 당선자의 위대한 선택
 

                       ▲ 영화 <맨 오브 더 이어> 스틸 이미지. ⓒ 넷플릭스

 

사회자와 제작진이 당황하는 건 당연지사. 반면 토론회를 찾은 청중들은 그의 '미친 연설'에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이에 힘입었을까. 돕스는 기적적으로,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재임을 노리던 현직 대통령을 제쳐 버린다. 다소 빤한 전개지만,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대통령을 필요로 하는 일반 유권자들의 성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민주당에, 공화당에 질렸습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국회는요? 로비스트들은요? 제가 다 생각이 있습니다.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에게 투표하지 마십시오. 정치 배심원들을 만드는 겁니다. 그럼 정치가 훨씬 흥미로워질 겁니다. 진보나 보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변화를 말하는 거죠. 모두 앞으로 함께 전진합시다. 지금이 바로 미래니까요.


영화 속 미 유권자들이 이런 돕스의 연설에 열광한 이유는 단순하다. 기존 정치에 대한 혐오와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대와 열망 말이다. 게다가 돕스는 솔직하다. 거릴 낄 게 없다. 어릴 적 대마초 흡연 등 자칫 스캔들로 번질 만한 전력을 공개하는 것도 예사다. 이혼 경력도, 현재 싱글인 것도 문제 될 게 없다. 무엇보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는 기성 정치인과 달리 선거 광고에 단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

그런 돕스가 만난 장애물은 미국 정치판에서 오랫동안 문제시돼왔던 전자 투개표 시스템이다. 결과적으로, 돕스의 대선 승리는 끝내 새롭게 도입된 디지털 투·개표 시스템의 오류임이 드러난다. 회사 측은 경제적 이익 앞에 이를 은폐하려 들지만 양심 있는 여성 프로그래머가 돕스에게 이를 알리려 백방으로 뛰어다니게 된다.

그리하여, 진실을 알게 된 돕스의 선택은? 미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인 NBC 방송사의 'SNL' 생방송에 출연한 돕스는 "국민들은 더 나은 사람에게 투표할 권리가 있다"는 돌발 발언과 함께 진상을 알린다. 깨끗한 포기였다. 그리고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을 국민들에게 반납하고 천직인 코미디언의 길로 복귀한다.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코미디언 출신 아마추어 대통령의 리더십

얼핏 다소 뻔한 결론일 수 있다. 미 정치판의 비정하고 냉혹한 현실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밖 현실을 고려하면 꼭 그렇지 만도 않았다. 영화가 제작될 당시 미국은 아들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국내외의 우려 속에서 이라크 전쟁을 이어갈 시기였다. 9.11 테러 이후 속도가 붙은 미국의 우경화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오던 때였다.

돕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며 기성 정치권에 물들지 않는 정치인을 영화 속에서 만나는 것 자체가 '사이다'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였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코미디언이 대통령 당선자로 거듭나는 과정 자체가 당시 횡행하던 미국 정치 및 아들 부시 정권에 대한 불신을 상징하는 블랙코미디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셈이다.

다시,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자아내는 우크라이나 상황으로 돌아가 볼까.

러시아 푸틴 정권은 악명 높은 이미지를 스스로 재확인시켰다. 반면 테러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수도 키예프를 지키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선택은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되는 중이다.    

물론, 젤렌스키의 앞선 외교 정책을 두고 평가가 분분하다. 우리 20대 대선 주자들도 TV 토론에서 젤렌스키 정부의 대응을 두고 논쟁이 벌였다. 여당 대선후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원인이 우크라이나 초보 대통령 탓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되자 즉각 사과했다. 우크라이나처럼 강대국과 얽힌 타국의 복잡미묘한 외교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섬세함이 요구됨을 확인시켜 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젤렌스키를 코미디언 출신 아마추어라 일컬었던 서방 및 우리 언론들도 젤렌스키 대통령을 재평가하고 있다. 동시에 자국민들의 성원을 받는 분위기다. 반대로 전쟁이 끝나더라도 푸틴에겐 독재자이자 침략자란 악명이 오래도록 붙어 다닐 전망이다. 그러니 부디, 푸틴 대통령이 전쟁을 멈추라는 전 세계인의 목소리에 하루 속히 응답하기를 바란다.

 

하성태(woody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