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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들이 우크라이나 비극에서 배워야 할 교훈

道雨 2022. 3. 4. 09:19

대선 후보들이 우크라이나 비극에서 배워야 할 교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1994년 잉태됐다.

소련 해체 직후 우크라이나는 갑자기 세계 제3위의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핵무기 작동 버튼은 여전히 러시아가 갖고 있었으나, 우크라이나에는 핵탄두 약 1900기와 전술핵무기 2500개가 배치돼 있었다.

신생 독립국의 핵 보유에 불안감을 느낀 미국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핵 폐기에 이해를 같이했다. 미·러의 요구를 몇년간 거부하던 우크라이나는, 1994년 경제 붕괴와 국제적 고립에서 탈피하고자, 미·영·러와 이른바 ‘부다페스트 각서’에 합의했다. 핵무기를 러시아로 이전해 폐기하는 대가로, 미·영이 경제 지원을 하고, 세 나라가 안보를 ‘확약’한다는 내용이다.

‘확약’은 국제법적으로 안보를 ‘보증’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합의문 명칭이 조약이 아니라 각서다. 당시 우크라이나가 무력공격을 당할 경우 미·영이 군대를 파병해 주권·영토를 지켜준다는 보장을 받아냈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예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해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좌우할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미국은 1990년 소련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은 없을 것이라고 구두 약속했으나, 1994년 중간선거를 계기로 태도가 바뀌었다. ‘동진 정책’을 주장해온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석권하자, 빌 클린턴 행정부(민주당)도 태도를 바꿔 나토의 동·중부 유럽 확장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나토는 1999년 체코·폴란드·헝가리 3개국, 2004년 7개국 등 지금까지 동·중부 유럽 14개국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은 루마니아·폴란드에는 미사일방어망(MD)까치 배치했다.

미-러의 짧은 허니문은 결국 끝나고 말았고, 나토 회원국이 아니면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나라는 벨라루스·우크라이나·조지아 세곳만 남게 됐다.

옛소련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8년 조지아를 침공했다. 벨라루스는 이번 전쟁에서 보듯 러시아의 사실상 위성국가다. 푸틴은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고, 이제 우크라이나에 친러 정권까지 세우려 하고 있다.

이런 사태 전개는 냉전 이후 유라시아 질서 확립이 미완인 불안정한 상황에서,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이 어떤 운명에 처해질 수 있는지를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비극이 주는 교훈을 놓고 대선 후보들 간에 시각 차이가 뚜렷하다. 보수 후보는 힘에 의한 평화와 강력한 동맹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고 하고, 진보 후보는 강대국 사이 전략적 균형 유지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원론적으로만 보면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우리와 우크라이나의 차이점도 분명하다. 우선 우리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준으로 볼 때 국력이 우크라이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군사력은 우리가 세계 6위, 우크라이나는 22위다. 경제력은 우리가 10위, 우크라이나는 57위다. 또한 한-미 동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우리가 무력공격을 당하면 미군이 법적 절차에 따라 개입하도록 돼 있다.

반면 지정학적 측면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매우 유사하거나 오히려 우리가 더 위험할 수 있다. 우리는 4대 강국(미·일 대 중·러)의 이해가 충돌하는 결절점에 있다. 한편에선 미국의 패권주의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다른 한편에선 중국의 중화민족주의와 러시아의 무모한 대국주의가 마주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의 핵 모험주의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나라에 전략적 균형 유지는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빨리 어느 한쪽에 서야 한다는 주장은 단견이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로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다자주의를 견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 후보의 사드 추가 배치와 미국의 MD(미사일 방어) 체계 참여 발언은 전략적 균형을 뒤흔드는 위험한 주장이다. 박근혜 정부 말기 때처럼 사드 배치를 두고 미-중 간 충돌이 재연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또한 강압 외교로 주변국을 관리하려는 중국은 경제 보복에 다시 나설 가능성이 농후하다.

중국은 벌써부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달 28일 “민감한 문제를 계속 적절히 처리해 중-한 관계가 불필요한 방해와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하자”고 말했다. ‘민감한 문제’는 사드 배치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윤 후보의 주장은 우리의 안보를 불안하게 할 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만큼 언행을 책임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박현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