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김대중과 김정일의 합창 “통일은 과정이다”

道雨 2022. 3. 22. 09:39

김대중과 김정일의 합창 “통일은 과정이다”

 

[이제훈의 1991~2021] _24
 
* 2000년 6월15일 평양 순안공항,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헤어지기 전 서로를 안으며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통령께서는 완전 통일은 10년 내지 20년은 걸릴 것이라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완전 통일까지는 앞으로 40년, 50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2000년 6월1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 때 한 말이다.
 
“조국통일”을 존립의 절대적 명분이자 궁극의 지향점이라 늘 되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일 위원장은 왜 ‘완전 통일’에 “(10~20년이 아니라) 40년, 50년이 걸릴 것”이라고 명토 박듯 김 대통령한테 강조했을까?
공식적으론 1942년생인 김 위원장이 사실상 ‘완전 통일은 나 죽은 뒤에나 가능한 일’이라는 듯 한껏 뒤로 밀쳐둔 대목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이것은 ‘전망’인가 ‘바람’인가?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2000년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6·15남북공동선언’의 2항은 이 물음의 답을 찾을 실마리로 맞춤하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두 세기에 걸친 남북 분단사에 유일무이한 정상 차원의 ‘통일 방안’ 관련 합의 문구다. 합의까지 최고난도의 밀당은 불가피했다. 두 정상은 2000년 6월1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 1호각에서 오후 3시부터 7시까지(중간에 30분 휴식) ‘6·15남북공동선언’에 담을 내용을 조율했는데, 회담 시간의 “3분의 2”를 ‘통일 문제’ 논의에 썼다.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1분1초가 귀한 시간의 대부분을 왜 ‘통일’ 문제 논의에 쏟아부었을까? 6·15공동선언의 산증인인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2019년 ‘6·15남북정상회담 19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그 의미를 이렇게 짚었다.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상봉한 남북의 두 정상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통일 문제에 대해 남북 간 어느 정도의 공통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데 공감합니다. 남북관계 개선 문제를 통일 문제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적화통일이나 흡수통일을 기도한다고 서로 의심한다면 남북관계는 개선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흡수통일과 적화통일을 배제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밑돌을 놓은 필수 기초공사였다는 진단이다.
“적화통일 배제”는 남이 북에 바라는 것이다. 남이 북과 관계개선·화해협력의 여정에 나설 때 최소한의 신뢰 기반이다. “흡수통일 배제”는 북이 남에 바라는 것이다. 1990년대 초 동북아의 비대칭 탈냉전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몰린 북의 생존과 대외 개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담보다.
 
“조국통일”은 역사적으로 남과 북 두 분단정부의 궁극의 지향점이다. 남이 제헌헌법(1948년 7월12일 제정, 7월17일 공포) 4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이례적으로 영토 조항을 둔 핵심 문제의식은, 분단은 일시적일 뿐, 통일이 궁극의 지향임을 최상위 규범인 헌법에 분명히 해두려는 데 있다.
북이 1948년 7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한 제헌헌법 103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수도)는 서울시이다”라고 명시한 것도,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1948년 두 분단정부가 앞다투어 외친 ‘통일 지향’은 상대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양날의 칼이다. 그 치명적 독성이 38선 양쪽의 시민·인민을 질식시킨 최악의 사태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아 1950년 6월25일 김일성이 일으킨 전면 남침과 ‘3년 전쟁’이다. 그렇게 ‘통일’은 현실 역사에선 남북관계의 목에 걸린 가시가 됐다.
 
당연히 가시를 뽑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두 분단정부 최초의 공식 문서 합의인 ‘7·4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 첫 성과다.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 합의가 특히 중요하다. 1950~1953년 한반도를 도륙한 자해적 ‘3년 전쟁’ 같은 짓은 다시 하지 않겠다는 두 분단정부의 공개 다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7·4공동성명’ 발표 직후 박정희의 ‘유신독재’, 김일성의 ‘유일독재’ 선언으로 ‘7·4공동성명’의 진정성·신뢰성이 뿌리부터 의심받았다.
두 분단정부는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의 연쇄 체제 전환 와중인 1991년 유엔 분리·동시 가입(1991년 9월17일)과 ‘남북기본합의서’(1991년 12월13일) 채택으로 공존의 기반을 다졌다. 유엔 가입은 두 분단정부가 국제법상 서로한테 ‘별개의 주권국가’임을 인정한 것이자,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행위·무력행사를 배제한 유엔헌장 준수 의무 확약이다.
두 분단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에서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는,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두 분단정부가 합의한 분단사에 유일무이한 ‘남북관계 규정’인데, 남과 북이 국제법적으론 ‘두개의 주권국가’이되, 서로한텐 ‘외국’이 아닌 “통일지향 특수관계”라는 선언이다.
그러고는 화해·불가침·교류협력의 다짐을 25개 조항으로 풀어 적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식 명칭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다.
 
중력법칙의 발견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본 덕분이라는 아이작 뉴턴의 말처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6·15공동선언’ 2항 합의 또한 7·4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김 대통령은 김 위원장한테 “통일은 점진적·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통일의 과정을 남과 북이 협력해 관리해야 해요”라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우리가 주장하는 남북연합제라는 것은 ‘2체제 2정부’의 협력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2체제 (1국가) 연방제’ 통일 방안은 수락할 수 없어요”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은 “내가 말하는 ‘낮은 단계 연방제’라는 건 남측이 주장하는 ‘연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하는 개념”이라며 “연방제로 즉각 통일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건 냉전시대에 하던 얘기”라고 호응했다.
김일성 주석이 주도해 조선노동당 6차 대회(1980년 10월10~14일)에서 채택한 공식 통일 방안인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냉전시대에 하던 얘기”라고 치부한 것이다.
 
여기서 남과 북의 통일 방안의 변천 과정을 깊이 파고들지는 말자. 다만 두가지는 꼭 기억하자.
첫째,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서로를 “미제의 식민지”라거나 “소련의 괴뢰”라며 전면 부인하던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식 태도에서,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태도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정상 차원의 상호 인정과 공존의 다짐이다. 두 정상이 회담에서 북을 사실상 “반국가단체”라 규정한 국가보안법과 남을 “혁명 대상”으로 규정한 조선노동당 규약의 개정 필요성에 공감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둘째,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확약이다. “통일을 지향”하되 언제까지 한다는 목표 시한은 없다. 이 대목에서 김 위원장이 김 대통령한테 “완전 통일까지는 앞으로 40년, 50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공들여 벼린 ‘6·15공동선언’ 2항을 쉽게 풀면 “통일은 목표이자 과정”이라는 뜻이 된다. 통일 방안을 두고 다투거나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앞세우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니 통일은 장기 과제로 미뤄두고, 당장은 화해와 불가침과 교류협력을 위해 ‘해야 할 일’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을 추려 애써 실천하자는 두 정상의 다짐이다.
두 정상의 바람대로,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당국은 통일 방안을 두고 더는 공개 설전을 벌이지 않았다.
 
 
이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