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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클린턴 정상회담, 신기루처럼 사라지다

道雨 2022. 4. 19. 10:24

김정일-클린턴 정상회담, 신기루처럼 사라지다

 

                * 2000년 10월23일 오후 3시7분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이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을 찾았다. 이는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방문이었다. 평양/AP 연합뉴스

 

2000년 10월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특사”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의 워싱턴 방문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은 북-미 양국의 의지와 협의만으로 이뤄진 건 아니다. 오랜 냉전 적대로 얼어붙은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게 한 마중물이 있다. 넓게는 그 넉달 전 남북정상회담, 좀더 구체적으로는 ‘외교의 달인’ 김대중 대통령이다.

 

한국의 자화자찬만은 아니다. 북-미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조명록은 2000년 10월10일 올브라이트 주최 환영만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6월 북남 최고지도자의 상봉 이후 북남 사이 불신을 낳은 턱들이 하나둘씩 제거되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인적·물적 교류 확대 등 북남 화해가 전례없이 고조되고 있다. 조선반도의 이런 긍정적인 변화는 조-미 관계에서도 동일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남북정상회담과 관계 개선 흐름이 북이 대미 관계 개선에 나서는 데 동력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북-미 공동 코뮈니케’에 담긴 빌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 계획도 김대중 대통령의 조언과 설득의 결과였다. 클린턴 대통령이 애초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는 “장소는 평양이나 제3국, 시기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11월4~16일) 전후나 12월을 고려”한다며 조언을 구하자, 김 대통령은 “국교 없이도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한 선례가 있으니, 한반도 냉전 종식이라는 큰 그림을 갖고 평양을 방문해 큰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한다”고 조언했다고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적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4년 <한겨레> 새해 특별인터뷰에서 밝힌 뒷얘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내가 (2000년 6월)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당신들에게는 두 가지가 중요한데, 하나는 안전이고, 하나는 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해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도 그걸 알고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계속하시오’라고 말해 의견의 일치를 봤다. (평양에서) 돌아와서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그런 뜻을 전했다. 그래서 조명록 차수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워싱턴과 평양을 상호 방문한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시민이라도 직감하듯이 남북·한미·북미, 이 세개의 양자관계는 따로 놀지 않는다. 세 양자관계 가운데 하나만 문제가 생겨도 한반도 평화가 흔들린다. 1990년대 동북아의 비대칭 탈냉전 이후 30년 넘게 온갖 노력에도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까닭이다. ‘남·북·미 삼각관계’라는 인식틀이 필요하다.

 

2000년 10월23일 미국 국무장관 올브라이트가 평양 순안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명록이 백악관을 방문한 첫 북한 관리였듯이, 올브라이트는 1948년 9월9일 38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또다른 ‘분단정부’가 세워진 이래 평양 땅을 밟은 첫 미국 각료이자 최고위 관리였다. <시엔엔> <뉴욕 타임스> <타임> <뉴스위크> 등을 포함한 세계 13개 언론사의 취재진 57명이 그의 방북에 동행한 까닭이다. 순안공항에서 올브라이트 일행을 맞은 북의 관리는 “공화국 수립 이후 단일 행사를 위해 입국하는 서방기자들로는 최대 규모”라고 했다. 외부 언론에 폐쇄적이기로 악명 높은 북한 당국이 올브라이트 방북에 거는 기대가 어떠했는지 방증한다.

올브라이트는 평양 도착 직후 북의 “영원한 수령” 김일성 주석의 주검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에 비공개로 참배했다. 평양에서 분명한 성과를 거두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대북 배려가 담긴 파격적인 행보다. 넉달 전 평양을 찾은 김대중 대통령은 국내 정치적 파장을 염려해 끝내 참배를 피했다.

도착 첫날 오후 3시7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올브라이트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을 찾았다. 사전 조율되지 않은 방문이었다. 김 위원장과 올브라이트 장관은 3시간 남짓 1차 회담을 하고는, 능라도 5·1경기장으로 가서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경축 대집단체조와 공연예술 백전백승 조선노동당”을 1시간30분 남짓 함께 관람했다.

둘은 주석단에 나란히 앉아 10만명이 동원된 북 특유의 집체예술공연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석단 맞은편을 가득 채운 5만명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펼쳐 보이는 카드섹션으로 “대포동 미사일(로켓) 형상이 연출됐을 때, 그(김정일)가 나를 쳐다보며 ‘이것이 첫번째 위성발사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올브라이트는 10월24일 평양 방문 결산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한 말을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만큼이나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강조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북-미 핵심 현안인 ‘(장거리)미사일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의지를 직접 밝혔다는 뜻이다.

관람을 마치고 백화원 영빈관으로 자리를 옮겨 진행된 김정일 위원장 주최 환영연회에서 김 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이 해를 가져왔습니다.” 울림이 큰 상징어법이다.

2000년 10월24일 낮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올브라이트의 2차 회담이 3시간 동안 진행됐다. 회담에 앞서 김정일 위원장은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제 우리가 나눈 3시간의 대화가 50년간의 침묵을 깨기에 충분하다고 믿지는 않는다”고 했다.

올브라이트는 김정일 위원장과 이틀에 걸쳐 6시간 동안 회담을 한 뒤, 평양을 떠나기 전 동행 취재진을 상대로 한 기자회견에서 “특히 미사일 문제에서 중요한 진전을 거뒀다”며 “이번 방문 결과를 클린턴 대통령한테 보고한 뒤 얼굴을 맞대고 평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브라이트는 10월25일 서해직항로를 이용해 서울로 와서 청와대로 찾아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방북 결과를 설명하고 협의한 뒤, 신라호텔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를 하고 워싱턴으로 떠났다.

 

올브라이트는 3국 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에서 “(클린턴) 대통령 방북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여지를 뒀지만, 평양 방문에서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는 잠정 평가에 비춰 미국 대통령의 사상 첫 평양 방문은 실행만 남은 듯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미국 대선(11월7일)의 ‘플로리다 검표 논란’과 팔레스타인 평화협상 등이 클린턴의 평양행을 가로막았다. 대통령 선거인단 25명이 걸린 플로리다에서 검표 논란이 일어, 35일간의 법정 공방 끝에 미 연방대법원이 5 대 4로 민주당 앨 고어가 아닌 공화당 조지 부시의 손을 들어줬다.

클린턴의 대북정책을 맹비난해온 부시의 당선, 전통적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보다 압도적으로 우선순위가 높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겹쳐 클린턴의 평양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12월21일 아침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와 “평양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고 임동원은 회고했다. 그리고 올브라이트는 “최후의 노력으로, 김정일 위원장한테 워싱턴으로 오라고 초청했다. 북한은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회고록 <마담 세크리터리>에 적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12월28일(현지시각) “대통령 재임 중 미국의 국익을 증진할 북한과의 합의를 준비하고 평양 방문의 기반을 마련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지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클린턴은 평양에 갈 수 없고, 김정일은 워싱턴에 갈 생각이 없고, 그렇게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의 기회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해 항구적 평화체제를 앞당기려던 김대중-김정일의 거대한 꿈도 좌초 위기에 내몰렸다.

많은 이들이 ‘김정일 위원장이 조금만 빨리 결단했다면, 조명록이 조금만 일찍 워싱턴에 갔다면 한반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통탄했다. 예컨대 강석주 북 외무성 제1부상과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협의한 웬디 셔먼은 “만일 김정일 위원장이 조명록 특사의 방미를 한달만 앞당겼어도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짚었다.

클린턴은 뒷날 김대중 대통령을 서울에서 만나 “당시 나한테 1년이라는 시간만 더 있었다면 한반도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몹시 아쉬워했다고 임동원은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2011년 12월17일 숨을 멈출 때까지 다시는 북-미 정상회담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