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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통일을 만드는 공장’을 살해했나

道雨 2022. 6. 14. 09:19

누가 ‘통일을 만드는 공장’을 살해했나

 

[이제훈의 1991~2021]

 

* 2016년 2월10일 박근혜 대통령의 개성공단 ‘전면 중단’ 발표와 이튿날 북쪽의 ‘전면 폐쇄’ 맞대응에 떠밀려, 급히 개성공단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트럭 짐칸에서 물자들이 쏟아져 내린 모습을 관계자들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사람 사는 세상의 일상은 복잡하고 미묘하다. 필요한 게 정말 많다. 갈등과 혼란을 줄이려면 서로 지켜야 할 규칙도 부지기수다.

반세기 넘게 서로 다른 체제와 제도를 구축하며 따로 살아온 남과 북이 한데 어울려 부대끼며 일을 해야 하는 개성공단에선 오죽했을까. 2003년 6월 개성공단 1단계(100만평) 개발 착공 뒤 2016년 2월11일 전면 폐쇄 때까지 개성공단의 하루하루는 그 필요를 확인하고 규칙을 만들어가는 전인미답의 여정이었다.

개성공단의 자동차 운행을 보자.

2006년 7월12일 개성공단 지역 안에서 처음으로 교통사고가 났다. 관리위원회 소속 (노동자) 출퇴근 버스와 남쪽 엘에이치(LH)공사(당시 한국토지공사) 업무용 승용차가 충돌했다. 어떻게 처리됐을까.

관리위 버스는 북쪽 보험사에, 엘에이치공사 승용차는 남쪽 보험사에 가입돼 있었다. 버스에 들이받힌 승용차의 소유주인 엘에이치공사는 북쪽 보험사에 보험금 지급을 요구했다. 북쪽 보험사는 현장 확인 등 절차를 거쳐 버스 과실을 80%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엘에이치공사가 요구한 보험금의 80%를 지급 결정했다. 개성공단 차량 운행 및 보험 등의 관련 규정에 따른 사고 처리다.

남북 당국은 개성공단에서만 운행하는 자동차엔 별도 번호를 부여했다. 관리위 소유 승용차에 “개성공업 100” 번호판을 단 게 개성공단 최초의 자동차 등록이다. 2006년 5월의 일이다.

개성공단에 등록된 자동차는 소유 주체가 아닌 운전자 국적에 따라 번호판을 구분했다. 남쪽 사람이 운전하는 차량은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번호와 검정 테두리를 두른 번호판을 달았다. 북쪽 사람이 운전하는 차량은 테두리가 없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번호를 적은 번호판을 달았다. 이 때문에 공단 입주기업들은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이 운전할 차량을 따로 둬야 하는 이중 부담을 졌다.

북쪽의 체제 경직성 때문이라 지레짐작하지는 마시라. 교통사고가 났을 때 운전자 국적을 바로 알아보기 어려워, 남쪽 사람이 북쪽 형법에 따라 처벌될 위험을 피하고자, 공단 운영 초기 남북 사이 별도 번호판 체계가 고안됐기 때문이다.

남쪽과 개성공단을 오가는 차량은 또 어찌했을까?

공단 운영 초기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번호판으로 애초 번호판을 가리고 운행했다. 2008년 7월31일 개성공업지구 자동차 관리 규정 시행세칙이 마련돼 “임시표식판”(임시표지판)이 도입됐다. 개성공단 사업을 목적으로 남과 북을 15일 이상 왕래하는 자동차에 임시표식판 부착이 의무화됐다. 2008년 11월 처음 발급된 이래 2016년 2월 전면 폐쇄 때까지 7천건 가까운 임시표식판이 발급됐다.

남쪽 운전면허증은 개성공단에서도 통용될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남쪽 또는 국제면허 소지자가 개성공단에서 자동차를 운행하려면 북쪽 면허증으로 교환발급을 받아야 했다. 남쪽 사람이 북쪽 행정관청을 개별적으로 드나들 수 없는 사정 탓에, 관리위원회가 신청서를 모아 북쪽 ‘개성시 자동차감독사업소’에 제출해 발급받았다. 남쪽의 1·2종 면허나 특수면허 등은 북쪽 면허증 4급으로 교환발급되고, 뒷면에 남쪽 면허 종류가 기재됐다.

북쪽 교환면허증은 2006년 10월 처음 발급됐는데, 2016년 2월 전면 폐쇄 때까지 4천건 넘게 발급됐다. 북쪽은 교환면허증에 ‘615’로 시작해 이후 네자리 숫자를 덧붙인 7자리 발급번호를 매겼다. 개성공단 사업의 씨앗을 뿌린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공동선언 정신을 이어간다는 뜻이 담긴 번호체계다. 다만 회의·관광·물자수송 따위 목적으로 개성공업지구에 임시 출입해야 하는 운전자는 남쪽 면허증을 그냥 이용했다. 개성공단의 도로에는 166개의 신호등이 있다.

개성공단에서 자동차 운행은 복잡하고 미묘했지만, 남북 사람들은 드잡이질을 극구 피했다. 반세기 넘게 서로 다르게 발전시켜온 교통규칙을 쪼개고 덧대고 꿰매, 남북의 사람과 자동차가 뒤섞일 수밖에 없는 개성공단만의 새 규칙을 창조했다.

개성공단 10년이 벼려온 ‘개성공단산 규칙·제도’는 남북 시민·인민 사이에만 다리를 놓은 건 아니다. 국제사회를 향해 남과 북이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가꾸려 애쓰고 있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받는 디딤돌이었다.

2005년 개성공단 가동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엔, 개성공단산 제품이 협정 상대국에 수출되도록 특혜를 주는 원산지 규정이 마련돼 있다.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첫째, 역외가공 방식(유럽자유무역연합(EFTA),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인도, 페루, 콜롬비아, 베트남, 중국 등), 둘째, 통합인정 방식(싱가포르), 셋째, 위원회 방식(미국, 유럽연합(EU),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터키 등)이 그것이다. 국제법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인 개성에서 생산된 제품을, 대한민국의 지구적 자유무역협정망을 통해 수출할 수 있도록 고안된 ‘국제법적 초석’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세계무역기구(WTO)의 최혜국 대우 원칙에 어긋나는 남북거래(민족내부거래)의 특수성과 남북경제통합의 국제법적 승인으로 이어질 터닦기다. 개성공단은 북이 지구적 시장경제와 국제무역규범을 익히는 ‘체험학습장’이었다.

 

이렇듯 남북의 8천만 시민·인민의 희망찬 미래를 가꾸는 “접촉의 공간”이자 “통일을 만드는 공장”을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2월10일 일방적으로 ‘살해’했다.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에 총 6160억원의 현금이 유입되었고, 정부와 민간에서 총 1조190억원의 투자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결국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고도화하는 데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2016년 2월10일 당시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발표한 ‘개성공단 전면 중단 관련 정부 성명’의 한 대목이다. 2016년 북의 4차 핵시험(1월6일)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2월7일)에 대응해 국제사회의 고강도 대북 제재를 견인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탄핵당한 뒤 구성된 통일부 정책혁신위원회(위원장 김종수)는 2017년 12월28일 기자회견을 열어,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처가 정부의 공식 의사결정 체계를 거치지 않은 채 “개성공단을 철수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구두 지시”에 따른 것이었고, ‘개성공단 임금의 핵·미사일 전용’ 발표도 “구체적인 정보나 충분한 근거, 관계기관의 협의 없이 청와대의 의견으로 삽입됐다”고 발표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심증뿐인 ‘임금의 핵·미사일 개발 전용’을 이유로 국제사회에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공표한 박근혜 정부의 선택은 ‘자해’가 되고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9월19일 평양 정상회담에서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하기로 약속했지만,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임금의 핵·미사일 개발 전용’ 주장을 빌미로 촘촘해진 미국·유엔의 대북 제재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개성공단을 없애 2016년이 끝나기 전에 통일을 이루겠다는 ‘박근혜의 몽상’(그는 2016년 1월1일 국립현충원을 찾아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루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2016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2016년 통일’을 특정했다)은 “통일을 만드는 공장”만 부수고 말았다.

개성공단을 사지로 몰아넣은 이는 박 대통령만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여정부 때 약속한 개성공단 북쪽 노동자들을 위한 기숙사 건립을 거부했고,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응한 2010년 5월24일 대북 제재로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 투자를 금지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 두 조처로, 참여정부 시기 수직상승하던 개성공단 입주기업 수는, 2009년 117개 이후 의미 있는 증가세를 보이지 못했다.

개성 지역 밖의 더 많은 북쪽 노동자를 수용할 대규모 기숙사 건립과 신규 투자 덕분에 “개성공단의 노동력이 부족해지면 인민군대 군복을 벗겨서 한 30만명을 공장에 넣겠다”던 김정일 위원장의 호언이 현실이 됐다면, 박 대통령이 그리 쉽게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선택하지 못했을 터.

개성공단 폐쇄 당시 123개 입주기업과 연결된 남쪽 협력업체가 5천개, 일자리는 12만5천개에 이르렀다. 개성공단 폐쇄는 제재가 아니라 자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까닭이다.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기필코 닫힌 ‘성을 다시 열자’(開城). 그리하면 깜깜한 절망의 수렁으로 느닷없이 내쫓긴 희망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