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우리가 ‘플라톤의 동굴’에 갇혀 있다면

道雨 2022. 6. 15. 08:57

우리가 ‘플라톤의 동굴’에 갇혀 있다면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대한 간략한 상상도. 죄수는 동굴을 벗어나고서야 세상의 진실을 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를 1883년 2월 번득이는 영감 속에 열흘 만에 썼다. 차라투스트라(자라투스트라) 이미지가 떠오른 순간을 니체는 뒷날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다음 겨울 나는 제노바에서 멀지 않은 라팔로의 매력적이고 조용한 만에서 살았다. 나는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 겨울은 추웠고 비가 많이 내렸다. (…) 오전 오후의 이 두 산책길에서 <차라투스트라> 제1부 전체가 떠올랐다. 특히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하나의 유형으로 떠올랐다. 정확히는 차라투스트라가 나를 엄습했다.”

 

니체는 이렇게 썼지만 차라투스트라 이미지가 니체의 심중에 떠오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 1년 전에 출간한 <즐거운 학문> 마지막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 이미지를 품은 단편을 실었는데,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던 해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기면서 보내기를 10년,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체는 이 단편을 그대로 가져다 <차라투스트라>의 첫머리로 삼았다. 이 구절에 이어 동굴을 나온 차라투스트라는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숲을 지나 처음 만난 도시의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산속에서 얻은 ‘지혜’를 선포한다.

“나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사람이란 극복돼야 할 존재다. (…) 사람에게 원숭이는 무엇인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 아닌가. 초인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일 뿐이다.”

시장의 군중은 차라투스트라의 설교를 듣고 비웃음으로 답한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너무 커 차라투스트라는 말을 마치지도 못한다. 낙심한 차라투스트라에게 누군가 다가와 속삭인다. ‘그 정도로 비웃고 만 걸 천만다행으로 아시오. 다음엔 죽이려고 달려들 테니….’

니체가 주인공으로 삼은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를 세운 고대 페르시아 예언자의 독일식 이름이다. 하지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와 예언자 조로아스터는 아무 관련이 없다.

조로아스터는 인류의 종교적 삶에 선과 악의 이분법을 처음으로 들여온 사람이다. 세상은 선과 악이 끝을 볼 때까지 싸우는 전쟁터라는 것이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이었다. 인간은 선한 신들이 악한 영들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조로아스터의 가르침과 함께 윤리적 종교가 탄생했다.

니체는 조로아스터와 달리 ‘선악의 저편’을 이야기한다. 초인은 선악을 넘어선 곳에서 출현한다.니체의 차라투스트라와 관련된 인물을 찾자면, 조로아스터가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떠올리는 편이 낫다.

니체가 자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차라투스트라>의 서문은 플라톤의 <국가> 제7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와 구조적 동형을 이룬다. 이 동굴의 비유에서 화자인 소크라테스는 젊은 글라우콘에게 ‘이상한’ 상상을 해보라고 요구한다.

“여기 지하 동굴이 하나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게. 동굴의 입구는 깊고 동굴 자체만큼 넓으며 불빛을 향해 열려 있네. 이 거처에서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기에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고, 포박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 없어 겨우 앞만 볼 수 있네. 그 사람들 뒤쪽 저 멀리 위에서부터 불빛이 죄수들을 비추고 있네.”

이 동굴 벽면에 사물의 그림자가 비친다. 죄수들은 앞만 볼 수 있기에 이 그림자들을 실제의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그림자극을 보며 그림자를 실제 사물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이 죄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 사슬에서 풀려나 그림자가 실제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어 풀려난 죄수는 동굴을 기어올라 동굴 바깥으로 나간 뒤 태양 아래 빛나는 만물을 본다. 태어나 처음 세상의 진실을 본 죄수의 마음을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 사람은 자신의 신상에 일어난 변화를 다행으로 여기되, 동료 죄수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해방된 죄수는 다른 죄수들을 마저 해방하려고 동굴 안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밝은 데서 온 해방자는 동굴 안 사물들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어 죄수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위로 올라가더니 눈이 상해서 돌아왔군. 위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잘못이야.”

죄수들은 이런 말도 한다.

“사슬을 풀어서 위로 데려가려는 자는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이야기는 플라톤의 동굴 이야기와 대칭을 이룬다. 차라투스트라는 지혜를 얻으려고 산속 동굴로 들어가고, 죄수는 동굴 밖으로 나와 세상의 참모습을 본다. 깨달음을 얻은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베풀어주려고 산 아래로 내려가고, 진실을 알게 된 동굴 밖 죄수는 사슬에 묶인 사람들을 깨우려고 동굴 속으로 내려간다. 차라투스트라는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비웃음을 받고, 동굴로 돌아온 죄수는 다른 죄수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두 사람 다 죽음의 위협에 처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대칭적 동형성은 여기까지다.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의 세계를 가르치려 했다면,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그 이데아의 세계가 허구이며 존재하는 것은 여기 이 현실뿐이라는 것을 설득하려 한다.

니체에게 플라톤은 무너뜨려야 할 첫번째 적수였다. 니체는 플라톤의 아이디어를 가져와 플라톤을 치는 데 쓴다.

 

플라톤의 동굴 이야기에서 니체만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니다. 20세기 미국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언론인 월터 리프먼(1889~1974)도 플라톤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리프먼의 대표작 <여론>(1922)은 플라톤의 그 동굴에서 시작한다. 죄수들이 동굴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리프먼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한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다루어야만 하는 세계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 있고, 사람들의 마음 밖에 있다. 인간은 단지 인간의 생존을 다루는 데 충분한 일부 현실만을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진실 자체를 결코 전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이런 한계에 봉착해 인간은 마음 밖 세계를 마음 안에 그려냄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인간은 결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기억할 수 없는 세계의 광대한 부분들을 마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인간은 손이 닿지 않는 세계에 대한 확실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만들어냈다.”

그렇게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들이 모여 ‘여론’(Public Opinion)을 이룬다고 리프먼은 말한다.

여기서 리프먼이 주목하는 것이 언론이다. 언론은 인간이 세상사, 특히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낼 때 압도적인 영향을 준다. 대중은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바깥세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이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여론을 형성한다.

그런데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가 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지는 왜곡되고 여론도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언론이 만들어내는 환경은 플라톤의 동굴과 유사하다. 동굴 안 죄수들이 보는 것은 실제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이미지일 뿐이다.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동굴을 가리켜 리프먼은 ‘의사 환경’(pseudo-environment)라고 부른다. 언론이 동굴이라는 사이비 환경의 창조자인 셈이다. 언론에 대한 리프먼의 깊은 불신이 밴 발언이다.

리프먼의 언론 불신은 제1차 세계대전의 체험과 직결돼 있다. 리프먼은 전쟁 중에 유럽에서 연합군 정보작전에 참여해 선전 전단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이때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절감했고, 언론의 잘못된 정보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못된 정보는 일차로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언론의 문제는 이런 비자발적 오류에 그치지 않는다. 인식의 한계 탓에 잘못이 생기는 것도 문제지만, 언론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부풀리고 축소하고 뒤틀어 여론을 오도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동굴 속 환경을 ‘의사 환경’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여론 왜곡을 주도하는 언론은 ‘의사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의사 언론이 만드는 의사 환경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여론의 오염과 부패를 막을 길이 없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