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눈 떠보니 후진국’

道雨 2022. 11. 11. 09:28

‘눈 떠보니 후진국’

 

 

 

 

요즘 우리나라는 정치·외교·사회·경제 거의 전 분야에서 국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우리나라 국정 운영 시스템에 큰 구멍이 뚫려있음을 방증한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책이 지난해 화제를 모았는데, 이제는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용산 대통령실에서 불과 1.5㎞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참사는 국가의 부재를 참혹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다중인파가 몰리는 행사가 열리면 사전에 안전관리 대비책을 세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지자체 어떤 조직도 총대를 메고 나서지 않았다.

참사 발생 4시간 전부터 시민들이 다급하게 위기 신호를 보냈으나, 이에 신속히 반응하는 조직도 없었고 위기관리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았다. 경찰·지자체 책임자들은 아예 제자리에 있지조차 않았다. 이들을 독려하고 조정해야 할 컨트롤타워인 대통령실 국정상황실과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존재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컨트롤타워 책임자들은 내 책임이 아니라거나(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 보고를 못 받았다고(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변명하며,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정상황실이 위기관리의 컨트롤타워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는데, 이를 책임지는 비서실장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 이 장관은 행안부에 경찰국을 신설한 장본인이면서도 경찰 지휘·감독 권한이 없다고 뻔뻔하게 발뺌하기까지 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이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태원 참사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다. 경제 분야에서도 관료들이 늑장 대처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금융시장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촉발한 레고랜드발 채권시장 경색을 정부는 한달 가까이 방치했다. 금융관료들도 이 사안을 알고 있었으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자금경색이 확산하고 나서야 허겁지겁 ‘50조+알파’ 유동성 공급대책을 내놨다.

게다가 지난주엔 흥국생명이 신종자본증권의 조기상환(콜옵션) 연기를 발표해 채권시장을 다시 불안에 빠뜨렸다. 금융당국은 이 발표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금융시장이 살얼음판을 걸을 때는 작은 위험 요소라도 불씨가 돼 순식간에 위험이 확산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것일까.

 

9일 김주현 금융위원장의 해명이 더 가관이다. 그는 “흥국생명이 11월1일 콜옵션 행사 안 하겠다고 발표했고, 문제될 것 같아서 ‘흥국생명 괜찮은 회사다’라고 보도자료를 배포했다”며 “그런데 이게 해명이 안 될 것 같아 미리 조치를 준비한 것으로 대응하자고 했고, 11월9일 콜옵션 이행을 다시 추진해 사태가 해결됐다”고 말했다. 정부의 늑장 대처가 불안을 키웠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그래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몰염치한 태도다.

 

지금 공직사회는 나사가 풀려 있어도 한참 풀려 있다. 나라는 엉망인데 관료들은 태평성대라는 말까지 나올 지경이다. 중대 사안이 벌어질 위험이 농후한데도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외교 참사에 이어 사회, 경제 분야에서 잇따라 큰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현 집권 세력의 국정 수행능력이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했음을 방증한다. 권부 핵심을 차지한 검찰 엘리트들은 국정 운영 경험조차 없고, 이들이 하위 파트너로 손을 잡은 모피아를 비롯한 행정 관료들은 권력 핵심부 눈치보기에 급급하며 제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어쩌다가 국가 시스템이 갑자기 엉망이 되고, 국격 추락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을까. 가장 큰 원인은 리더십에 있다. 어느 조직이나 리더는 우선순위를 선택해 방향을 제시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리더가 만사에 솔선수범하고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이 최종 책임을 지겠다고 하며 힘을 실어주고 독려를 해야 조직이 굴러가는 법이다.

 

거대한 관료 조직은 이런 리더십이 더더욱 필요한 곳이다. 윤석열 대통령처럼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이너서클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면서 책임을 하부에 떠넘기면, 관료들은 충성도 하지 않을 뿐더러 복지부동에 빠진다. 혹시나 불똥이 튀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자기 보신에만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관련해서도 대통령이 먼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들께 공식 사과를 한 뒤에, 공직자들을 엄중히 꾸짖었어야 했다.

 

두번째는 관료집단의 문제다. 과거 개발연대에는 관료가 유능한 집단으로 인정받았으나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미 지배계급화 되어 있어 서민층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국민과의 공감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한덕수 국무총리, 김대기 비서실장, 이상민 장관 등 엘리트 관료 출신들의 행태에서 잘 드러난다.

 

윤 대통령이 그 동안의 국정운영 방식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환골탈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면적인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지나치게 검찰과 관료 엘리트들에 의존하면 이런 위기 상황은 반복해서 발생할 것이다. 진보·보수를 떠나 역량있고 경험이 풍부한 인재들을 요직에 등용해 정부의 컨트롤타워 기능을 복원해야 한다. 그래야 관료 조직이 움직이고 국정 안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현 ㅣ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