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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권위주의, 외로운 이들을 사로잡는 지배전략

道雨 2023. 3. 8. 09:35

신권위주의, 외로운 이들을 사로잡는 지배전략

 

 

 

우크라이나 침공을 포함해 최근 러시아의 상황을 지켜보는 외부자들이 놀라는 한가지 사실이 있다.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힘든 푸틴의 높은 지지율이 그것이다.

 

러시아인 평균 가용 소득은 2012년 이후 침체해 거의 늘지 않고 있다. 근로자 평균임금은 과거 저임금 국가였던 중국에도 추월당했다. 게다가 푸틴 정권이 일년 넘게 자행해온 우크라이나 침공도 ‘성공’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러시아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는 전체의 16%에 불과하며, 그 점령지를 지키는 일조차 러시아군에는 버거운 과제다.

이렇듯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성과가 없는데도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다수 주민이 상대적 가난 속에서 허덕이고, 정권이 벌인 침략전쟁이 고전을 면치 못해도, 23년 동안 초장기 집권을 이어온 푸틴의 지지율은 무려 83%다.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독재가 이처럼 민심을 ‘꽉’ 잡은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그 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틴 독재의 성격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많은 관찰자는 푸틴을 옛 소련 시스템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려 한다. 하지만, 푸틴 독재는 유일당인 공산당의 통치방식과 전혀 다르다. 푸틴에게는 보수적 집권정당 통합러시아당이 있지만, 그 당은 중국 공산당이나 북한 노동당과 달리 대중동원의 장치나 관료를 위한 등용문으로 그다지 기능하지 않는다.

 

푸틴의 국가는 소련·중국·북한식 당국가가 아니라 신권위주의 독재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헝가리 오르반 정권과 튀르키예(터키) 에르도안 정권, 인도 모디 정권이 신권위주의의 많은 특징들을 공유한다.

실질적인 양당제 국가인 한국에서는 특정 정치세력의 장기 집권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이지만, 강경보수 세력이 일부 신권위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당국가 체제 나라들은 보통 일체의 정보 흐름을 면밀히 관리하면서, 집권당 공식이념을 거스르는 정보의 유통은 철저하게 차단한다. 이와 같은 면밀한 관리가 불가능한 인터넷시대의 신권위주의 정권들은, 대신에 유권자 다수를 정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담론을 온·오프라인으로 구축·유포해 다수의 자발적 추종을 끌어낸다. 재야세력의 주장에 접근이 가능해도 정권의 담론을 스스로 선택하고 지지하게끔, 유권자들의 고정관념과 공포, 집단 콤플렉스와 편견을 십분 이용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그 공포와 편견에 부합하는 가짜 ‘팩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는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뒤 침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해외파 러시아 고학력자들과 여러 차례 격론을 벌였다. 해외에 거주하며 외국어에 능통한 그들은 침공을 비판하는 해외 언론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러시아를 늘 노리는 흉악한 서방”과 “서방에 부화뇌동해 러시아를 공격하려는 우크라이나 나치”, 옛 소련 영토 “회복” 필요성,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초강력 중앙집권”의 중요성에 관한 친푸틴 언론의 이야기를 반복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미국의 생화학무기 실험실 운영” 등 친푸틴 언론들이 만들어낸 가짜뉴스까지 인용하면서 말이다.

 

결국 러시아의 어용 정보관리자들은 많은 러시아인이 가지고 있는 구미권에 대한 열등감·원한·공포라는 ‘서방 콤플렉스’와 소련 몰락에 대한 ‘설욕’ 의지, 주변 국가들의 민족주의 발흥에 대한 반감 등을 교묘하게 이용해, 다수에게 먹힐 만한 “흉악한 서방과 착한 러시아의 대결”이라는 거대 서사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유포한 셈이다.

 

이 서사를 믿는 다수 러시아인은, 상대적인 빈곤 속에서 자국 군대가 전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신권위주의 정권이 벌이는 침략행위를 지지한다.

 

전통적으로 당국가들은 피치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때 ‘소련 모델’을 따랐던 북한도 1950년대 후반 인민들에게 무상교육·무상의료를 제공했다. 제3세계 나라들 가운데 최초였다.

 

이와 달리 신권위주의 국가들의 복지정책은 소극적이다.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지출 비중은 약 12%로, 산업화한 국가 중에서 ‘복지후진국’에 속하는 한국과 비슷하다.

신권위주의 국가들은 대신 노동자 등 피치자 사이 연대를 파괴해, 원자화된 개인이 각자도생식으로 생존을 위해 분투하도록 하고, 어용 언론의 매혹적인 메시지에 홀로 노출되도록 한다.

 

계속되는 노조 파괴, 활동가 투옥 등 정권의 극심한 탄압 속에, 러시아 전체 노동자의 3.5%만이 국가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민주노조에 속해 있다.

민주노총에 전체 노동자들의 6% 정도가 소속돼 있는 한국보다 노동운동 방해와 탄압이 더 심한 셈이다.

아울러 비정규직 등 불안정고용에 시달리는 노동자 비율 역시 약 46%로 한국(37.5%)보다 높다.

 

한마디로, 저복지와 불안정노동, 개인의 원자화 속에서 무력해진 개인들이 호소력 높은 민족주의적 메시지에 포획된 게 신권위주의 사회다.

 

다행히도 정치권력 교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국에서는 제도로서의 신권위주의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현재 강경 보수정권이 벌이는 정책이나 그 정책을 옹호하는 우파 언론들의 논지를 보면, 러시아의 비참한 현실이나 별반 차이가 없기도 하다. 노조에 대한 지속적 공격이나 불안정고용을 줄이는 것에 무관심한 정권의 태도는 푸틴 정권의 정책과 별 차이가 없다. 푸틴의 거대 서사 중심에 ‘영원한 적’ 서방과 미국이 있다면, 한국 극우들의 혐오장사 중심에는 노조 때리기나 관제 간첩조작, 반북 선동 등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푸틴의 서사에서 ‘중앙집권적 권력’이 차지하는 위치를, 한국 극우담론에서는 ‘시장’과 ‘능력’이 점하고 있다.

 

결국 가난한 러시아 젊은이들 다수가 복지비용이 아닌 군비 증액과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듯, 많은 가난한 한국 청년들도 사실상 대물림되는 집안 자원에 좌우되는 ‘능력’에 따른 격차를 긍정한다.

 

러시아인 못지않게 많은 한국인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정반대되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자본주의 위기 시대의 디스토피아인 신권위주의의 위험으로부터 한국 또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