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의 사퇴를 요구함

道雨 2023. 3. 14. 10:23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의 사퇴를 요구함

 

 

 

*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구 시청광장 동편에서 열린 ‘강제동원 굴욕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2차 범국민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혜윤 기자

 

 

윤석열 정부의 ‘백기투항’으로 끝난 지난 4년간의 한-일 갈등을 복기하려 생각하니, 실로 여러 복잡한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실은 4년간 이어진 갈등의 전반부라 할 수 있는 문재인 정부 시기 한-일 갈등을 복기해, 2021년 7월 <신냉전 한일전>이란 책을 펴냈다.

그 책에서 당시 이 싸움은 양국 간의 단순한 역사 갈등이 아닌,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미래상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관의 충돌이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즉,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남북 관계를 개선해 동아시아의 냉전 질서를 타파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현상변경’ 전략과, 한국 정부의 이 같은 시도를 꺾고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해 북한과 중국을 억제하려는 일본의 ‘현상유지’ 전략이 정면에서 충돌해 커다란 파열음을 냈다는 것이다.

 

양국 간 갈등이 최고조에 올랐던 2019년 8월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토론회가 열렸다. 그때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당시는 원외)이 쏟아낸 발언이 가슴에 남는다.

“이 문제에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고, 국가의 명예를 걸고 이 문제를 잘 해결하느냐에 따라 정권의 명운이 걸려 있다.”

 

당시 같은 토론회 자리에서 이 말을 들으며 ‘과도한 발언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결국 사태의 본질을 꿰뚫은 발언이었음을 뒤늦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살벌한 투쟁에서 한국은 패했고(2019년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문재인 정부는 물러났다. 그렇기에 이후 등장한 윤석열 정권이 전임 정권의 유산을 전면 부정하며 한·미·일 3각 협력 강화에 ‘올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잔혹하지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 본다.

 

그럼에도 새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에 일말의 기대를 버리진 못했다. 나의 소견에 세계는 이미 신냉전 초입에 들어서 있고, 북핵 위협이 현실화된 마당에 한·미·일 3각 협력 자체를 부정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두 나라가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 합리적 타협안을 도출해 내기를 기원하고 기원했다. 하지만 결론은 원고들의 두 요구 사항인 일본의 ‘사과’와 ‘배상 참여’ 가운데 하나도 얻어내지 못한 백기투항이 되고 말았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알 만한 사람은 누군지 다 아는데도, 실명 공개는 불가하다 한다)의 6일 브리핑문을 읽으며, 모든 분석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어쨌든 국제법적으로, 그리고 65년도 한·일 양국 정부의 약속에 비추어 보면,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은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합의를 어긴 것이다’라는 결론이 된 것입니다.”

 

그동안 일본을 포함해 수많은 외국 정부 당국자들의 회견을 지켜봤지만, 공개 석상에서 자국 대법원 판결을 폄훼하고, 상대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꼴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전쟁은 왜 발생할까.

이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통찰을 가토 요코 도쿄대 교수의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라는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쟁을 “상대국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근본 원리가 되는 헌법을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대한민국이 지금의 우리일 수 있는 두 전제는 헌법 속에 담겨 있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는 민주공화국이다.

 

이 고위 당국자가 일본 입장을 옹호하며 ‘돌려 깐’ 2012년 5월 대법원 판결(파기환송)과 그에 이은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핵심은 이렇다.

 

원고 패소를 결정한 일본의 앞선 판결들은 지난 식민지배가 합법임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이는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 즉 헌법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원고들이 요구하는 위자료는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것이어서,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라면 이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때론 타협도 필요하지만, 정부 당국자에겐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가 스스로를 욕보이는데, 세계의 어느 국가가 우리를 존중할 것인가.

이전에도 여러 논란을 일으킨 고위 당국자께선 그만 내려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있는 대학교수로 복귀하기 바란다.

 

 

 

길윤형 |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