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반성과 사죄 없는 해법은 또다른 가해에 불과하다

道雨 2023. 3. 17. 08:52

반성과 사죄 없는 해법은 또다른 가해에 불과하다

 

 

 

 

 

지난 3월6일 윤석열 대통령은, 일제하 강제징용노동 피해자들에게 해당 일본 기업들이 배상해야 한다는 2018년 대법원 최종판결을 무시하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혜택을 받은 한국 기업들에 의한 이른바 ‘제3자 변제’로 대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를 이웃 일본과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맺어나가기 위해 지지율 1%를 각오하면서 내린 어려운 결단이라고 자평했다고 한다.

 

이 난데없는 선언은 나를 포함한 많은 국민을 당혹과 분노에 빠뜨렸다. 피해 당사자들이 이런 해결책에 동의했는가, 사법부의 최종판결을 행정부가 뒤집을 수 있는가, 이 사건의 본질이 과연 배상금 몇푼을 받아내는 데에 있는가, 이 문제가 대통령이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 할 정도로 촌각을 다투는 문제인가…. 잠깐만 생각해봐도 상식적인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윤 대통령은 16일 일본을 방문해 한-일 정상회담을 열었고, 4월 말에는 미국을 국빈방문해 한-미 정상회담을 열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이 황당한 해결책은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한 한·미·일 동맹 강화라는 현 정권의 외교정책을 관철하는 나름의 승부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상식적인 의문이 뒤따른다. 이 강제징용과 관련한 한-일 갈등이 한·미·일 동맹 강화로 가는 행로에 그 정도로 결정적인 장애물이었는가, 그리고 과연 한·미·일 동맹 강화라는 목표가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국민 여론을 등지면서까지 서둘러 이행해야 할 만큼 그렇게 시급한 것인가 같은 의문들이다.

 

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이 ‘결단’을 두고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른 것이라 자화자찬하고 있다지만, 나로서는 한-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조급하게 저지른 무책임하고 경솔한 외교적 투기이자, 미국과 일본 두 나라에 바치는 굴욕적 진상품으로만 느껴진다.

 

아무리 대통령이라지만 이런 초헌법적 권한까지 위임받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직권남용이며, 탄핵받아 마땅한 범죄행위에 가깝다.

게다가 그는 다른 날도 아닌 3·1절에 우리가 잘못해서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언설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2차 가해를 저지른 사람이다. 용서할 수 없다.

 

국민국가 간의 평화와 선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세계 사회에 미치는 미증유의 악영향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특히 작은 갈등도 언제든 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물리적 거리 안에 있는 이웃 국가 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일 관계도 마찬가지다. 비록 식민지 침략-피지배라는 고통스러운 과거가 가로놓여 있기는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교류를 통해, 애증 속에서도 서로 떼기 힘든 두터운 관계를 맺어왔으며, 두 나라의 국력 규모로 볼 때, 서로 어떤 성격과 수준의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동북아는 물론 세계 전체의 미래를 능히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일본에 익숙하고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다. 학술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또는 관광 목적으로 10여차례 일본을 다녀왔고, 어설픈 수준이나마 일본어를 독해할 수 있으며 간단한 생존회화도 가능하다. 일본의 문학과 사상이 내 독서와 생각의 총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으며, 뜻을 같이하는 일본인 친구도 여럿이다.

 

2011년에 일어난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 나는 남다른 고통과 연민으로 가슴 아팠으며, 진심으로 일본과 일본인을 위해 기도했다. 지금도 주위 누구든 일본과 일본인에게 단세포적인 적의와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면 서슴없이 반박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 그리고 그것을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 현재의 일본 주류 지배세력의 행태에는 어떤 용서도 타협도 해줄 생각이 없다.

 

한 민족의 다른 민족에 대한 식민지배는, 약한 대상에 대한 폭력이 죄가 아니라 약한 것이 죄라는 전도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폭력이나 학교폭력 등과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폭력들에는 그것이 행사되는 순간 우선 피해자는 열등하다는 인격적 차별이 고착되며, 사후에는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자책과 트라우마를 일으키며, 이는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죄 없이는 절대 해소되지 않은 채 유·무형의 2차, 3차 가해를 불러온다는 구조적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피해자의 고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가해자 역시 평생 양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그 잘못된 가해의 기억을 지우기 위한 정신의 왜곡으로 일그러진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면서 조선인은 열등하기 때문에 지배받아 마땅하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우리는 대내외의 격렬한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학과 열등의식의 고착과 내면화를 피할 수 없었으며, 우리가 부족하고 잘못해서 식민지배를 받아 마땅했다는 자발적 2차 가해를 저지르면서 깊은 트라우마에 갇힌 채 살아왔다.

 

이런 집단적 심상체험이 우리 개개인의 영혼을 얼마나 피폐하게 했는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실패한 친일 청산과 가해자 일본의 거듭된 과거 부정은 이렇게 아물지 않은 상처를 끝없이 다시 덧나게 했다.

 

피해자의 상처받은 영혼은 가해자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죄를 접하기 전에는 결코 해방될 수 없다. 그것이 우리가 과거에 얽매여 산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이유이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그에 상응하는 피해 보상은 가해자가 감수해야 하는 무한책임이다. 그 책임의 경감이나 해소는 오로지 피해자의 용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말뿐인 사죄도, 사죄 없는 물질적 보상도 피해자를 해방시킬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가해자 자신도 진정으로 용서받거나 이 가해-피해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이 과거사의 징그러운 업보로부터 어서 빨리 해방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이 반복되는 저주로부터 해방돼야만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 세계의 정상적 구성원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전제하지 않은 한-일 관계에 관한 어떠한 해법도 또 다른 가해에 불과하다.

 

대통령의 결단?

개에게는 미안하지만, 개도 웃을 일이다.

 

 

 

김명인 |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