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기소한 윤 대통령의 자가당착
“제3자 변제라는 해법은 내가 정치를 하기 전 법률가(검사)로 활동할 때에도 (강제동원 문제 해결책으로)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16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했다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검사 윤석열’의 행동은 이 말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2019년 서울중앙지검장 때 박근혜 정권의 제3자 변제 해법 마련을 사법적으로 뒷받침하려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사법농단’으로 기소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일본 기업들의 강제징용 배상 책임을 인정한 ‘김능환 판결’(2012년)이 아버지(박정희)의 ‘업적’(한-일 청구권협정)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승태 대법원이 재상고된 김능환 판결을 뒤집거나, 최소한 외교적 해법을 마련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주기를 바랐다.
양승태는 대통령의 민원을 들어주면서도 재판의 독립성 침해 논란을 피하기 위해 잔기술을 부렸다.
윤석열 검찰은 이를 ‘재판 거래’로 규정해 전직 대법원장을 구속해버렸다.
‘검사 윤석열’이 정말로 제3자 변제 해법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면 강제동원 재판 건은 양승태의 혐의에서 빼야 하지 않았을까. 양승태는 대법 판결이 한-일 관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서울중앙지검장 윤석열’과 ‘3차장 한동훈’은 이를 가장 죄질이 나쁜 혐의로 봤다. 강제동원 재판 개입을 공소장에 제일 많은 분량을 할애해 첫번째 ‘범죄사실’로 기재했다. 그뿐만 아니다. 법원이 양승태의 구속영장을 발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여론몰이에도 힘썼다. 앞서 양승태 참모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한동훈은 기자들 앞에서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라고 맹비난했다.
‘서울중앙지검장 윤석열’은 2018년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영장기각이) 많이 실망스럽다. 양승태 수사 없이 사법농단 수사 종결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으름장을 놨다.
양승태 수사는 김능환 판결이 정당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지금 ‘대통령 윤석열’은 이 판결을 외교적 현실과 국제법을 무시한 잘못된 판결로 보는 것 같다. 정말 그렇다면, 심각한 인지부조화다.
대통령의 의중을 간파한 듯 측근들은 김능환 판결을 깎아내리기 바쁘다. 대통령실 고위 당국자는 김능환 판결을 재확인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일본이 합의를 어겼다고 우기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대통령의 대학 친구 석동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은 “대법관 한명이 얼치기 독립운동하듯 판결”했다고 막말을 했다.
김능환 판결은 이런 ‘천대’를 받을 판결이 결코 아니다.
“이번 한국 대법원 판결에 관여한 대법관들이 시야가 넓은 우수한 법률 실무가인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청구권협정에서 포기한 것은 외교보호권이고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이 판결의 논리를 지지하는 논조도 우리나라 지식인 중 일부에서 나타나고 있고, 원래 일본 정부도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유지해온 터다.
국가 간 조약이나 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일방적으로 소멸시키고 재판상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인지, 기본으로 돌아가 생각해볼 일이다.”
2019년 일본 월간 <세카이> 2월호에 실린 니무라 마사토 전 도쿄고등재판소 판사의 기고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니무라 전 판사는 2000년 12월 ‘하나오카 사건’ 재판장을 맡아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와 일본 전범기업의 화해를 이끌었다. 그의 말대로, 2018년 대법원 전합 판결 직후 일본 변호사 200여명이 이 판결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강제동원 소송은 앞서 일본 법원에서 진행된 소송을 맡았던 일본 변호사들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킨 ‘법률 제144호’를 근거로 패소 판결을 내리자, 이 법이 없는 한국에서 재판을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법률 제144호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맺은 직후 일본 국회가 만든 것이다. 굳이 이 법을 만들었다는 것은, 한-일 청구권협정이 개인청구권까지 소멸시킨 게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일본 정부도 1991년 외무성 간부가 야당 의원의 질의에 “(한-일 청구권협정이)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켰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 바 있다.
이 정권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나 떠드는 걸까.
이춘재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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