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불행하게도 권위적인 지도자가 정권을 잡은…”

道雨 2023. 6. 14. 11:22

“불행하게도 권위적인 지도자가 정권을 잡은…” 

 

 

 

        *  프랑스 공영 교육방송의 청소년용 애니메이션 화면 갈무리.

 

 

2001년 6월부터 2004년 2월까지 <한겨레21>에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다. <하종강의 휴먼 포엠>이라는 어색한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도중에 <하종강의 진짜 노동자>로 제목을 바꿨다.

 

2003년 12월 통신회사 노동자 조태욱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통신공룡’이라는 말을 듣던 회사가 직원들을 상대로 불법적인 휴대폰 판매를 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 금액의 과징금 처분을 받도록 했다.

컴퓨터에서 자료를 내려받을 때 그이는 자신의 접속 기록이 남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회사가 자신이 한 일을 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한 일이었다. 그 뒤 20년 동안 조씨는 해고와 복직투쟁을 반복하는 삶을 감내하고 있다.

 

 

인터뷰 내용 중 한토막만 소개한다.

 

“중학교 3학년 가을 경북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지만 나는 돈이 없어 못 갔어요. 여행을 못 간 학생들은 1, 2학년 소풍에 함께 따라가게 했는데, 어머니가 아침에 선생님 드리라고 4홉짜리 소주 한병을 주시는 거예요. 다른 아이들은 모두 맥주나 양주를 선물하더라고요. 저는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나무 숲에 들어가서 그 소주를 다 마셔버렸어요. 경주를 아직 못 가봤어요.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으니, 대를 이어서야 경주 수학여행 꿈을 이룬 셈이죠.”

 

그 말을 하며 조씨는 껄껄 웃었다.

 

그 딸이 며칠 전 결혼했다. 고등학교 교사인 신부를 위해 제자 수십명이 무대에 올라가 축가를 불렀다. 조씨 부인에게 “따님이 잘 컸네요. 알아서 혼자 컸거나 부인께서 키우신 거죠. 그동안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라고 짧은 인사말을 건넸는데,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히는 듯 보였다.

주례 없이 신부 아버지 조씨가 덕담했다.

“아빠가 그동안 노동운동을 하느라….”

그 대목에서 듣고 있던 많은 이들의 목이 메었다.

 

기념사진을 찍으며 신부 아버지 친구들은 카메라 셔터가 눌릴 때마다 몇번이나 보란 듯 팔뚝질을 하며 “투쟁!”이라고 구호를 외쳤다.

“결혼식장까지 와서 이러는 건 좀…”이라며 서로 마주 보며 웃었지만, 실내였으니 망정이지 만일 야외 결혼식이었다면 요즘 사회 분위기로는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행위이다.

 

야외에서 진행하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은 분명히 ‘옥외집회’에 해당하는데도 사전 신고 없이 진행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문, 예술, 체육, 종교, 의식, 친목, 오락, 관혼상제 및 국경행사에 관한 집회에는” 집시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예외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제나 기자회견은 사전 신고 없이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구호를 외치면 집회로 간주돼 진압당하거나 형사처벌받을 수 있다. 쉽게 말해 “구호를 외치면 순수한 문화제나 기자회견이 아니라 집회에 해당한다”는 것이 집시법을 엄격하게 적용할 때 정부가 펴는 논리이다.

 

집회를 사전에 신고하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불온한 집회일지 모르고 그러한 집회는 규제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민주사회에서 집회의 내용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집회가 교통장애 등을 유발할 수 있어서 경찰이 미리 알고 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입법 취지다.

구호 몇번 외친다고 교통장애가 더 많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다만 소음이 발생해 주변에 피해를 줄 수 있으나, 그 소음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해 형사처벌의 대상이 돼야 할 만큼 요란한 경우는 많지 않다.

 

프랑스 교육방송의 아동 애니메이션 교육자료 중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10살 어린이가 묻는다.

“시위가 뭔가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진다.

“시위란 여러 사람이 거리로 나가서 자신의 신념이나 불만을 표현하는 것을 말해요.”

어린이가 다시 묻는다.

“그런데 왜 굳이 거리로 나가나요?”

어른이 답한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기 때문이에요. 신문에도 나오죠.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이 일에 대해서 알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정리해볼 수 있어요. 시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권리도 있고, 그 문제를 이해하고 동조할 권리도 있어요. 불행하게도 권위적인 지도자가 정권을 잡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없어요.”

 

마지막 문장이 뼈를 때린다.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