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보수의 품격’ 짓밟는 최재해와 유병호

道雨 2023. 6. 21. 09:45

‘보수의 품격’ 짓밟는 최재해와 유병호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감사원장에 발탁된 이회창 전 총리는, 감사원을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기관으로 확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감찰 무풍지대였던 국방부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물론,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까지 감사를 했다.

군 전력증강 사업인 ‘율곡사업’과 안기부의 대국민 사기극이었던 ‘평화의 댐’에 대한 감사는,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감사원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무엇보다 그는 헌법이 부여한 감사원의 독립성 확보에 힘썼다.

 

대통령 주재 각종 회의 참석과 신년 업무보고 관행을 폐지하고, 청와대가 주도하는 ‘기획 사정’도 거부했다. 청와대와 충돌도 불사했다. 청와대가 감사원의 금융기관에 대한 감사를 막기 위해 감사원을 포함한 ‘사정기관 책임자 회의’를 소집하자, 이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감사원장과 대통령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감사원장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지만, 일단 임명된 후에는 직무상 대통령과 독립된 위치에서 감사원을 이끌어가야 하며, 직무에 관해 어떠한 지시, 감독도 받지 않도록 돼 있다. 즉 직무에 관한 한 대통령의 지시, 감독을 받는 부하가 아니다.”

 

그가 9개월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가장 신뢰받는 감사원장으로 기억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정치 역정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감사원장으로서의 업적은 그를 ‘보수의 품격’이라 부르는 데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이 전 총리가 쌓아놓은 감사원의 신뢰는 지금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감사원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지원하는 기관”이라고 버젓이 말하는 최재해 감사원장과, 그의 비호를 받는 유병호 사무총장 탓이다.

최근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에 대한 감사에서 유 총장이 보여준 행태는 범죄에 가깝다.

 

그는 지난해 8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내용의 제보를 받았다”며, 전 위원장에 대한 특별감사를 주도했지만, 최근(6월1일) 감사원 최고 의결기구인 감사위원회의 결과 대부분 ‘불문’ 결정이 내려졌다. 전 위원장이 권익위 간부를 위한 ‘집단 탄원서’에 서명한 것만 ‘기관주의’ 처분이 의결됐을 뿐이다.

애초 전 위원장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만한 비위가 아니었음에도, 유 총장은 지난해 10월 감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전 위원장에 대해 검찰 수사를 요청했다.

 

대법원 판례(2022도3413)에 따르면, ‘형사처분이나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신고한 사실이 객관적 진실에 반하는 허위사실인 경우’에 무고죄로 처벌받는데, 신고 내용은 ‘반드시 확정적 고의일 필요가 없고, 진실하다는 확신이 없는 사실을 신고하는 경우’에도 무고 혐의가 인정된다.

 

또 감사원 사무처는 이 사건 주심인 조은석 감사위원을 ‘패싱’한 채 감사결과보고서를 공개해놓고, 마치 조 위원이 이를 승인한 것처럼 전자결재시스템을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감사원의 독립성을 위해 감사위원의 신분을 법(감사원법)으로 보장한 취지를 대놓고 무시한 것이다.

그런데도 최 원장은 지난 19일 오히려 조 위원을 비롯한 감사위원들에 대한 ‘감찰’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사태에 대한 경위 조사라는 이유를 댔으나, 조 위원을 모욕 주려는 의도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최 원장과 유 총장이 이처럼 무리수를 두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전 위원장에 대한 감사가 전 정권 인사를 찍어내기 위한 표적 감사라는 비판을 ‘물타기’ 하려는 것이다.

‘불문’ 결정에다 ‘기관주의’ 처분에 그쳤는데도, 감사결과보고서는 마치 전 위원장이 비위 행위를 저지른 것처럼 기재돼 있다.

 

전 위원장은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과 함께 대통령실의 집요한 사퇴 압박에 시달렸다. 최 원장의 행태는 대통령실의 이런 기류를 반영한 것이다.

 

“내가 감사원장에 취임하면서 유독 대통령으로부터의 직무상 독립을 강조하는 등, 김 대통령으로서는 마음속이 불편했을 테지만 내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중략) 법에 정한 감사원의 독립성을 내세우는 데 심기가 상해도, 그대로 두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소신껏 일할 수 있었다.”(이회창 회고록)

 

감사원의 신뢰는 이 전 총리 혼자서 만든 게 아니었다. ‘정치’를 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떨까.

 

 

 

이춘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