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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계정 정지’…노동법·ILO협약 위반한 범법행위다

道雨 2024. 3. 5. 09:33

‘블랙리스트’ ‘계정 정지’…노동법·ILO협약 위반한 범법행위다

 

 

*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 관계자들이 지난 19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노동자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운영한 것으로 보이는 쿠팡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고용노동부에 신청하고, 근로기준법 위반 등 혐의로 고발장을 낸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쿠팡 블랙리스트’ 관련 언론보도를 접하고 누군가 이런 말을 건넸다.

“이거 플랫폼 노동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지 않아요? 계정 정지!”

정말 오랜만에 어두침침한 뇌 속에 반짝 형광등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맞아, 그거랑 똑같아.

배달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라이더를 비롯해 플랫폼 노동자라면 누구나 이런 두려움을 안고 일한다.

“이번 콜(일감)을 거절하면 혹시 다음 콜을 안 주는 거 아니야? 플랫폼이 계정 정지(배차 제한, 일감 배정 중단) 걸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배달이 조금만 늦어도 감점, 고객 별점 평가가 안 좋아도 감점, 콜센터 연락에 응답이 늦어도 감점, 배달 중 위치가 5분 이상 제자리여도 감점…. 인간이 짜놓은 코드로 동작하는 알고리즘의 실시간 평가로 언제든 계정 정지가 떨어진다.

앱에 로그인한 순간부터 로그아웃 전까지 그들이 정해놓은 규칙과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일감을 받지 못하게 되니, 플랫폼 노동자 입장에서는 해고와 동시에 재취업 금지, 즉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는 셈이다.

쿠팡에서는 중간 관리자들이 블랙리스트 여부를 판단하지만, 앱(플랫폼)에선 알고리즘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근로기준법 제40조(취업방해 금지) 관련 사건은 매우 희귀한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노동행정 및 사법당국이 제대로 조사·수사하지 않아서다.

노동법이 자본가를 위해서만 작동할 뿐, 노동자를 위한 일에는 멈추는 일이 흔히 벌어지지 않던가.

 

둘째, 취업과 실업 또는 해고와 재취업이 단기적으로 반복되는 사업에서 자주 벌어지는데, 그런 곳은 일용직, 단기직, 심지어 분초 단위로 일감배정이 이뤄지는 긱(gig, 임시 고용) 노동자들이 많아서, 노동조합의 힘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쿠팡의 반론이 참으로 신박하다.

“다른 기업들도 같은 방법을 쓰고 있는데 이게 왜 문제냐”는 것이다.

컬리, 배달의민족, 카카오모빌리티 등 다른 플랫폼 기업들의 사정이 다르지 않은 건 분명한 사실이니, 빨강 신호등일 때 혼자 지나가면 불법이지만 모두가 건너면 신호 위반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지만 블랙리스트는 단순히 근로기준법 40조만이 아니라, 균등한 처우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6조,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고용상 차별을 금지한 수많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모두 위반하는 범법행위다.

 

플랫폼 공룡들의 이런 폐단은 한국만 아니라 전 세계 공통 현상이고, 한국보다 앞서 플랫폼 사업이 번창한 유럽과 북미에선 이런 악행을 규제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미 스페인은 라이더법을 통해 플랫폼 기업이 일감 배정, 계정 정지, 등급(평점) 관련 알고리즘과 매개변수 정보를 노동조합에 알려줄 것을 의무화했다.

우버의 유럽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 법원은 자동 해고 관련 알고리즘 작동 방식을 영업 기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은 우버의 행위를 불법으로 판단하고, 벌금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2022년 10월 이탈리아에서 26살의 노동자가 배달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그가 일했던 플랫폼 ‘글로보’는 24시간 뒤 고인의 전자우편 계정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유감스럽지만 계약 조건을 이행하지 않아 귀하의 계정은 정지됐음을 통보합니다.”

사고로 죽어 배달 1건 이행 안 했다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셈이다.

이 사건은 유럽 전역의 분노를 불러왔고, 유럽연합 차원의 ‘플랫폼 노동 입법지침’ 논의에서 ‘자동 해고와 계정 정지 금지’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유럽·북미에서 블랙리스트와 계정 정지, 자동 해고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우버는 더 신박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노조를 아예 상대하지 않던 전략을 수정해, 어용노조와 비밀 단체협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블랙리스트와 계정 정지라는 폐단은 그대로 유지한 채, 어용노조에 가입하면 계정을 다시 활성화하는 것이다. 블랙리스트와 계정 정지의 권한이 중간 관리자와 알고리즘에서 어용노조로, 즉 완장의 주인만 바뀐 셈이다. 이로써 우버는 계정 정지 관련해 노사 협의를 충실히 거쳤다는 항변 논리를 얻게 됐다.

 

사용자 주도 어용노조 활용은 한국이 원조라 할 수 있으니,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로 대표되는 플랫폼 기업들도 곧 사용할지 모른다. 굳이 그때를 기다려서 문제를 해결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쿠팡 블랙리스트’가 쟁점화된 지금이야말로, 수많은 노동관계법과 국제노동기구 협약을 위반하는 폐단들을 바로잡기 위한 골든타임이다.

 

 

 

오민규│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