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비핵화의 단계론과 병행론

道雨 2024. 3. 18. 10:06

비핵화의 단계론과 병행론

 

 

* 미라 랩후퍼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선임보좌관(오른쪽)이 지난 4일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수석부소장과의 대담에서, 북한과 비핵화 중간 단계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누리집 갈무리

 

 

조 바이든 정부의 북한 비핵화 단계론을 환영한다.

비핵화라는 최종목표에 앞서 중간 조치의 검토는 외교의 시간이 다가옴을 의미한다. 너무 멀어져서 이제는 잊어버렸던 협상의 말을 들으니 반갑고, 군사적 긴장으로 사라졌던 외교의 말이 들려 다행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미국 내부적으로 비핵화 단계론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 수준으로 외교의 시간을 열기는 턱도 없다.

 

단계를 부정하고 한번에 비핵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무력이지 협상은 아니다. 협상은 주고받는 것이다. 주지 않고 상대의 양보를 얻어낼 방법은 없다.

2월 뮌헨 안보회의에서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말한 ‘당사국의 합리적 안보 우려’를 생각하지 않고 협상하기는 어렵다. 당연히 비핵화의 상응 조치를 제시해야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 비핵화 협상은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고, 관계란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30년 동안 비핵화 협상의 실패에서 쌓인 불신도 크다. 당연히 신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비핵화 협상의 초기 단계는 동결이고, 중간 단계는 군축이다.

협상의 장점은 그 시간 동안 북한의 핵 능력 고도화를 멈출 수 있다는 점이다. 협상 기간에도 북한은 핵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지만, 협상 중단 기간 북한의 핵 개발 속도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동결이란 후진 기어를 전진 기어로 바꾸기 전에 거쳐야 하는 단계다.

중간 단계는 핵무기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다.

 

당연히 위협 감소는 상호주의로 이뤄져야 한다. 핵 군축을 한다고 비핵화라는 최종목표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군축과 비핵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단계론은 협상의 상식으로, 하나 마나 한 말이다. 바이든 정부가 외교를 하려면, 즉 협상을 시작하려면 단계론이 아니라 병행론을 말해야 한다. 단계적인 비핵화를 위한 단계적인 상응 조치를 제시해야 한다.

바이든 정부가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두개의 전쟁을 치르면서, 한반도의 긴장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위협을 해소할 의지가 없으면 당연히 위협을 관리하기 어렵다. 현상 유지는 노력해야 얻을 수 있지 방치의 결과는 아니다.

 

미국이 협상 의지가 있다면 중국도 움직일 수 있다. 중국은 과거와 다르게 더는 북·미 양국의 중재자가 아니다. 군사 분야에서 미-중 전략 경쟁의 무대가 한반도에서 펼쳐지면, 중국은 당연히 북한의 비핵화보다 미국과의 전략 경쟁을 더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다. 다만 미·중 모두 전략 경쟁의 속도를 조절하고자 한다.

동북아시아 질서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미·중의 공감대도 아직은 유효하다. 비핵화 협상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인 지금이, 어쩌면 북한 비핵화를 위한 미-중 협력의 마지막 기회다.

 

일본도 움직이고 있다. 양국에서 흘러나오는 북-일 정상회담의 가능성에 관한 발언을 보면, 물밑에서 조율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20년 동안 북-일 관계를 후퇴시킨 납치 문제의 출구를 물 위에서 찾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물밑에서 조율해도 물 위의 과제, 즉 북한에 대한 혐오와 불신이라는 여론의 늪에서 과연 빠져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외교가 움직이고, 북한이 호응하고 있음은 새로운 현상이다. 미국 대선 이후 상황이 달라지면 일본도 중재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남북 관계 없이 비핵화 협상이 가능할까?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비핵화의 상응 조치 중 핵심은 평화 체제고, 그중의 핵심이 군사적 신뢰 구축인데, 당사자가 남북한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과제다. 남북 관계가 현재 상태라면 평화 체제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고, 당연히 비핵화의 단계도 전진할 수 없다. 비핵화 협상은 북-미 양자 관계에서 할 수 없다. 북-미 제네바 합의가 있었던 1994년과 비교해서 군사적 신뢰 구축의 당사자인 한국군의 위상과 역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주변국 모두에서 외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외교의 목적은 위협 감소가 아니라 위협 관리의 차원이다. 아직은 협상의 의지를 확인하기는 어렵고, 이 정도로 국면을 전환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외교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의 힘이 있다.

 

한국의 외교는 어디에 있는가?

이념을 추구하고 정세 관리의 책임감이 없으면, 결국 외교의 시간이 오면 고립되고 비핵화 협상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2000년대 초반 6자 회담 국면에서, 납치 문제의 늪에 빠져 외교를 포기했던 일본의 수모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