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역지사지(易地思之)

道雨 2024. 3. 27. 11:10

역지사지(易地思之)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3월 19일)

 

 

                                                      *  우리 동네 현강 박홍준 작품이다. 구글에서 캡처

 

 

인근 마을에 사는 두 여성이 매서운 겨울 밤에 각자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한 명은 임신한  딸을 병원에 데려가야 했고, 다른 한 명은 아프신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급히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 했다. 두 사람은 반대 방향에서 눈폭풍을 뚫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멈춰 서야만 했다.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도로를 가로막은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이다.

답은 나무 반대편에 서서 서로의 절박한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이, 차 열쇠를 교환한 후 서로 상대방의 차에 올라타고 목적지로 향하는 데 불과 몇 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힘에서 나온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 줄어든 말로, 입장을 바꿔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한다는 뜻이다.

 

우(禹)는 하(夏)나라 시조로 물을 잘 관리한 것으로 전해지며, 후직(后稷)은 신농(神農)과 더불어 중국에서 농업의 신으로 숭배되며 순(舜)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 농업을 관장한 것으로 전해온다.

 

맹자는 치수에 성공한 우, 농업의 신인 후직,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서로의 처지가 바뀌었더라도 모두 같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했다.

“안회도 태평성대에 살았다면 우 임금이나 후직처럼 행동했을 것이며, 우 임금과 후직도 난세에 살았다면 안회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처지가 바뀌면 모두 그러했을 것이다(易地則皆然).”

 

안회는 공자가 “화를 남에게 옮기지 않는다(不遷怒)”며, 그의 덕을 칭찬한 인물이다. 맹자는 이들의 시대적 상황이 바뀌었다면 서로의 처지를 헤아려 거기에 합당한 처신을 했을 거라고 말한 것이다.

 

‘역지사지’는 공자의 ‘서(恕)’와 뜻이 닿는다. 자공이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죽을 때까지 행해야 할 덕목이 있습니까?”

공자가 지체 없이 답했다.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행하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

‘서(恕)’는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이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구절과도 뜻이 이어진다.

 

‘아전인수(我田引水)’는 의미가 반대다.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만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의 주장이나 조건에 맞도록 한다는 ‘견강부회(牽强附會, 전혀 가당치도 않은 말이나 주장을 억지로 끌어 다 붙여 조건이나 이치에 맞추려고 하는 것)’도 ‘아전인수’와 뜻이 같다.

 

전우용 교수는 ‘아전인수’라는 사자성어 대신 “아지인도”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아전인수’는 농경시대에 나온 사자성어이고, 현대사회에서는 농경지보다 부동산으로 대지가 더 중요하다는 거다. “내 땅에 고속도로 끌어대기”를 비꼰 것이다.

 

 

‘역지사지’의 유래를 <<맹자>>의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찾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한자 좀 안다는 사람이 맹자의 권위에 견강부회한 것이다. ‘역지즉개연’은 ‘처지나 경우를 바꾸어도 하는 행동은 서로 같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지사지’와는 조금 다른 내용이다.

굳이 ‘역지사지’란 말과 비슷한 성어를 찾는다면, 공자의 ‘추기급인(推己及人)’이나 주자의 ‘장심비심(將心比心)’ 또는 청나라 임칙서(林則徐)의 ‘설신처지(設身處地)’라고나 할까? 이 모두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라는 속뜻을 품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역지사지’의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황희 정승이다.

어느 날 황희 정승의 아내와 딸이 그의 관복을 짓다가 입씨름을 했다. 이게 맞느니 저게 맞느니 티격태격하다, 결국에 황희를 찾아와 판단을 해달라고 하자, 황희는 아내 말도 맞고, 딸 말도 맞다고 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황희가 글을 읽고 있는데 하녀 셋이 씩씩대며 찾아왔다. 까마귀가 우리집 감나무에 흰 똥을 쌌는데, 우리집 감을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집 감을 먹고 와서 그런지 판단을 해달란다.

“갑순이 말도 옳고, 을순이 말도 옳고, 병순이 말도 맞다!” 황희는 이도 저도 모두 옳다고 대답했다. 아내의 말도 딸의 말도 갑순이 을순이 병순이의 말도 모두 옳다고 대답했으니 제일 뛰어난 ‘역지사지’가 아닐 수 없다.

‘언언시시(言言是是) 정승’이라고 불릴 정도로, 황희는시(是)를 말하되 비(非)를 말하기를 삼갔고, 소절(小節)에 구애되기보다 대절(大節)을 지키는 재상이었다. ‘디테일에 머물지 말고 본질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이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그 장점을 이야기 하도록 노력하라’는 말로 삶의 지혜이다. 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이 새긴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음 속에 “언언시시”를 두고 잊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가 세계를 보고 듣는 모습은 모두 일부분이다. 자기 인식이 부분적이라는 진리, 즉 각자의 당파성을 인정해야 한다. 부분적 지식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성찰적 지식의 부족이다. 지식의 구성은 정치적 투쟁의 산물로 경합의 과정이다. 자기 위치성을 인식한 사람만이 당파성과 보편성이 반대말이라는 사실을 안다. 논쟁에서 이기는 첩경은, 자기 포지션과 상대방의 포지션을 모두 잘 파악할 때이다.

 

만물은 결국 나라는 렌즈를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나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社會惡)이 된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이 여론을 주도하거나 지도자가 될 때 공동체는 위험해 진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별, 계급, 인종, 지역 등 사회적 모순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기득권자나 사회적 약자 모두 자기 정체성을 아는 과정은 쉽지 않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혼란, 안 보이던 세상이 드러나는 놀라움과 두려움, 지적 호기심, 자기를 아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미로를 헤매는 일이기 때문이다.

위치성은 놓여진 현실임과 동시에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이동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사회, 인간관계,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숙고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잘 읽어야 이해가 된다.

 

자신의 자리(地)가 포지션이라면, 이를 인식하거나 이동하는 과정이 역지(易地) 포지셔닝이다. ‘역지사지’는 공감을 넘어서는 권력과 자원의 문제다. 기득권자는 자신이 손해보는 ‘역지사지’가 싫고, 피 억압 세력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상태 자체가 고달프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자신의 위성(GPS)이 앎의 본질이라는 것을 소환하고 싶다.

자신의 포지션에서, “너 자신이 되지 말고, 바로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백영옥) 이 문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거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허미니아 아이바라 박사는 진정성 대신 성실성에 집중하라고 했다. 그녀에 의하면, 진정한 자아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내면의 목소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외면을 찾으라고 말한다. 먼저 외면의 자아를 만들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새로운 사고 방식’을 얻는 것이다. 힘들어도 웃다 보면 즐거워지는 것처럼 행동은 뇌를 변화시킨다. 박사는 “리더처럼 행동해야 리더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성실함은 관찰과 행동을 전제한다. 되고 싶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오늘도 네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하루를 보내고 싶다.

 

 

언론은 4월 10일에 있을 총선으로 시끄럽다.

용산의 황상무(시민사회수석)가  MBC 기자에게 36년 전 ‘정보사 오홍근 기자 회칼 테러’ 사건을 들먹였단다. 그 말 하나로 공분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동안 대통령 전용기 가려 태우고, 방송 검열이 일상화 되고, 비판언론을 ‘대통령 명예 훼손’으로 압수수색한 첫 정권의 자업자득이다.

 

그 뿐인가? 

이태원·오송·잼버리·엑스포 참사가 아리고, 지워진 홍범도의 애국 혼이 뭉클하다. ‘금 사과’ 못 먹는 날이 길어지고, 건설 현장엔 찬바람이 분다. 세상의 긴축과 궁핍은 약자부터 덮친다.

포털에 이종섭·황상무·사과를 치면 정권심판이 뜬다고 한다. 대통령이 국민을 이기려 한다는 거다.

 

4·10 총선이 ‘대통령 임기 후반’ 국회의 권력을 가를 것이다. 여당은 서울·부산시장-대선-지방선거를 잇는 4연승을 꿈꾼다. 야권은 이태원-도이치(디올백)-채 상병 특검을 할 힘을 달란다. 지지층 투표 열기 높고, 한 뼘 더 중도 확장한 쪽이 이긴다. 표 앞에 장사 없고, 끝까지 모르고, 고개 들면 진다는 정설도 그대로다.

 

어느덧 3년차, 아니 적어도 강서에서 혼난 지 6개월, 카툰 속 윤석열차는 잘 가고 있습니까? 그 속도를 높일까요 줄일까요. 다들 먹고살 만하십니까?

 

이 세 질문의 답이 2주 앞, 오늘 공유하는 시의 제목처럼 “강이 풀리면”, 투표함에서 나온다.

경향신문 이기수 논설위원의 질문이다.

 

 

 

강이 풀리면 / 김동환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면은 임도 탔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임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박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