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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폭력’에 너무 관대한 나라

道雨 2025. 1. 21. 09:04

‘보수의 폭력’에 너무 관대한 나라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주 서울 한남동 관저에서 체포되기 직전 “나라가 종북 좌파들로 가득 차 있는데, 2년 반을 더 해서 무엇 하겠나”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의 내란죄 특검법을 “종북과 이적, 위헌과 매국, 독재를 버무려서 만든 괴물”이라고 비난했다.

어느 보수 언론은 “윤 대통령이 종북 세력을 너무 몰랐다”고 한탄했다. 방식은 적절하지 못했지만 대통령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는 뉘앙스다.

 

한국 보수의 머릿속엔 ‘좌파를 척결해야 나라가 산다’는 굳건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빨갱이’란 단어가 ‘종북’으로 바뀌었을 뿐, 세상을 보는 시각은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보수에 비교적 폭넓게 퍼져 있는 이런 인식이 윤 대통령의 어이없는 계엄령 발동과 법치 부정, 극우 시위대의 법원 습격 사태를 불러온 근본 요인이 아닐까 싶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뉴욕타임스의 표현)인 대한민국을, ‘바나나 공화국’으로 추락시킨 건, 종북 좌파가 아닌 극우 파시스트 세력이다.

또한 이들을 은근히 감싸는 국민의힘과 보수 언론, 일부 기독교 집단의 책임이 크다.

윤 대통령의 선동과 이에 호응한 시위대의 무법 행동은, 대한민국에서 위험한 ‘반국가 세력’이 진정 누구인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우리 사회가 나갈 방향과 방식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격렬히 논쟁하고, 때론 충돌할 수 있다.

그래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에 대한 동의와 믿음은 정파를 떠나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갈등을 최종 판정하는 기관이 사법부라는 건 모두가 인정한다고 믿었다.

 

극우 시위대의 난동은 민주주의에 관한 컨센서스(합의)와 공동체를 우선하는 공화적 가치의 존중을 무너뜨렸다. 적어도 대통령은 누구보다 국가 통합과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헌신하리라는 믿음을 윤석열은 여지없이 깨뜨렸다.

법원 습격 소식을 전해 들었다는 대통령의 메시지가 “억울하고 분노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의사를 표현해달라”라니, 이건 오히려 폭동을 부추기는 것 아닌가.

 

이번 사태의 핵심은 ‘과격한 일부 군중의 일탈’이 아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가 분열과 내전을 선동하고, 집권당 국회의원들은 ‘지난 총선은 부정선거였다’며 유언비어를 공공연하게 퍼뜨리는데도, 이를 묵인하고 방조하는 보수의 비겁함이다. 이들에겐 ‘좌파의 폭력은 국가 전복이지만, 우파의 폭력은 통제되지 않은 소수의 과잉 행동일 뿐’이란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윤 대통령은 반국가 세력으로 실체도 모호한 ‘종북 좌파’를 지목했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를 보면, 내란을 시도한 건 언제나 보수 세력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와 1972년의 10월 유신, 1980년 5·17 쿠데타에 이어 이번엔 12·3 비상계엄과 1·19 법원 습격으로 내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좌파의 내란 시도로 규정됐던 사건들,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이나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나중에 모두 조작임이 밝혀졌다.

2013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내란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됐지만, 2심에서 내란음모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이 의원은 ‘한반도 전쟁을 대비해 다양한 물질기술적 준비 방안을 마련하자는 취지의 추상적인 강연을 했다’는 이유로,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8년 넘게 복역했다.

직간접으로 거리의 시위대를 부추기는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의원들의 행동은, 오직 발언만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이 의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실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의 발목을 잡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고 편협한 퇴행이라는 게 더 큰 문제다.

대통령 생일에 경호처 요원들이 윤석열·김건희 부부를 위해 불렀다는 축하곡을 보면, 21세기에 이런 노래가 권력의 중심부에서 버젓이 불리는 데 아연할 따름이다.

‘84만5280분 귀한 시간들 오로지 국민만 생각한 당신’ ‘새로운 대한민국 위해서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대통령’이란 가사에서, 세습 체제를 찬양하는 북한의 선전 가요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반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점에서, 윤 대통령과 그를 감싸는 보수 진영은 시대를 거꾸로 거스르고 있다.

 

 

지금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건, 파시즘으로 치닫는 극우 세력의 폭주와, 야당 집권이 두려워서 이를 방치하는 보수 세력의 나약함이다.

보수가 윤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일부 정치세력과 단호하게 선을 긋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극심한 혼란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박찬수 : 대기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