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은 가도 파시즘은 남는다
김수영의 시 ‘절망’은 난해한 텍스트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첫 줄에서부터 독자는 난감해진다.
너무나 자명한 듯하지만, 그 태연자약한 자명함이 오히려 읽는 이에게 당혹과 혼돈을 안겨주는 탓이다.
대체 풍경이란 시각 이미지와 곰팡 같은 하등 균류에게서 어떻게 고도의 정신작용인 ‘반성’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수사학적 개연성에선 차라리 ‘윤석열이 윤석열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이 시절과 세태에 더 들어맞아 보인다.
최후까지 ‘거대 야당’ 탓이었다.
25일 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정에 선 윤석열의 최후진술은 세간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12·12 대국민 담화부터 헌재 변론까지 이어진, 거짓과 궤변, 망상이 어김없이 반복된 것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면 즉시 개헌과 정치개혁에 착수하겠다’며, 헌재에 선처를 호소한 것 정도다.
헌법질서와 정치 자체를 파괴하려 했던 내란죄 피고인이, 스스로 헌법 개정과 정치개혁의 주체가 되겠다고 선언했으니,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몰염치와 무도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머지는 익숙하고 진부한 윤석열식 상투어의 향연이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계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소중한 국민 여러분께 혼란과 불편을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사과의 말부터가 12·12 담화의 자기표절이었다.
그 밖에 “거대 야당” “간첩” “반국가 세력” “국민을 위한 계엄” “입법 폭주” “의회 독재” “예산 폭거” “내란 공작” 같은 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오염된 언어 회로 안에서 내란에 대한 비판은 ‘공작’이 되고, 계엄은 ‘대국민 호소’, 무장군인을 동원한 시설 봉쇄와 요인 체포는 ‘보호와 질서유지’라는 새로운 기표를 획득했는데, 이는 나치 도살자들의 언어 체계에서 ‘제거’ ‘박멸’ ‘학살’이란 파괴적 일반명사가 ‘최종 해결책’ ‘소개’ ‘특별 취급’ 같은 순화된 기표를 할당받은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윤석열의 언어가 드러낸 것은, 발화자의 ‘무사유’(생각 없음)였다. 계엄의 명분에 대한 숱한 비판과 반박의 증거들이 쌓여 있는데도, 윤석열의 말이 여전히 반정치적인 반공 극우파의 상투어에 긴박되어 있다는 건, 그가 어떤 동요나 회의 없이 전도된 클리셰의 세계관으로 현실을 재단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의 본령이 ‘말과 행위의 교환을 통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다고 믿었던 해나 아렌트는, 이런 윤석열식 상투어의 남용이 세계에 대한 인식과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동어반복의 쳇바퀴에 인간을 가둔다고 했다. 이때의 말은 발화자의 독단을 관철하고, 타인과 바깥 세계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만 활용될 뿐이다.
단언컨대 헌재는 윤석열을 파면할 것이다.
문제는 윤석열이 가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윤석열과 내란 세력이 봉인을 풀어버린 ‘파시즘’의 기운 때문이다. 파면 뒤 이어질 형사재판에서 윤석열이 내란 우두머리 죄의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아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한번 풀려난 극우 파쇼라는 ‘악의 기운’은, 사회 곳곳을 배회하며, 증오와 절멸의 언어로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이 창궐하는 데는 열정적 추종자도 환호하는 구경꾼도 필요 없다. 방관과 무관심이면 된다.
그래도 희망을 갖는 건, 12·3 내란 국면에 군과 정부기관 안팎에서 목격한 소수의 용기 있는 행동 덕분이다.
최근 보도된, 내란 당일 국회 진입 명령을 거부하다 작전에서 배제된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단 하급 간부의 사례는, 우리의 관료사회가 ‘제2의 내란’이나 ‘극우화’의 공격을 이겨낼 면역체계(반성적 사유 능력)도 함께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계엄 당시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사령관 지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재고를 요청하고, 후속 부대에는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고 지시한 수방사 제1경비단장의 경우는 또 어떤가.
그러니 악은 전능하지 않다.
지레 포기하고 절망의 늪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에 저항하고 공화국을 지켜낼 수 있다.
앞에 인용한 ‘절망’의 후반부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바도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이세영 |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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