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120돌, 을사년에 되짚는 ‘식민지근대화론’
2025년 을사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있었던 해로부터 120주년, 1945년 해방이 있었던 해로부터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은 일제의 침탈과 강점, 그리고 식민 지배로 인하여 커다란 피해를 보았다. 이 때문에 이 시기의 역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의 역사적 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20세기 초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근대로의 이행기였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한국은 일제의 지배를 받아, 근대로의 이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회와 문화의 발전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과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시켜주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한다.
당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하여 근대적인 행정이나 법제를 일부 들여왔고, 또 경제적 침략을 위해 자본주의적인 경제 제도를 들여왔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의 일이었고, 따라서 그들이 한국에 이식한 근대는 왜곡된 근대, 식민지 근대에 불과했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특히 식민지 시대의 경제성장률이 약 3%로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통계의 오류를 고려할 때, 성장률은 기껏해야 1%대에 그쳤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설사 약간의 경제성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과실은 조선인이 아니라 주로 재조선 일본인들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실은 성장률이 아니라, 당시 식민지 조선이 처해 있던 경제적 현실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조선’은, 경제적 측면에서 일본 자본주의의 식량과 원료 공급지, 상품시장, 자본 투자처, 천연자원 약탈처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자.
첫째, 식량 공급지로서의 조선이다.
20세기 초 매년 50만~70만명씩 인구가 늘어나고 있던 일본은 식량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10년대 일본은 식량 부족을 메우기 위해 외부에서 450만석의 쌀을 들여와야만 했고, 이 가운데 조선에서 약 113만석, 대만에서 약 83만석을 실어 왔다.
일본은 더 많은 쌀을 들여오기 위해 1920년 조선에서 농지 개량, 품종 개량 등을 통한 ‘산미증식계획’을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쌀 생산이 증가하였고, 일본으로의 쌀 이출도 증가했다. 1920년대 후반 일본으로 실려 간 쌀은 약 500만석, 1930년대 전반에는 약 800만석에 달하여, 조선을 식량 생산기지로 만든다는 구상은 성공하였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일본으로의 쌀 이출이 늘어난 것이 조선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쌀 이출의 증가로 부를 축적한 것은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들이었다. 이들은 더 많은 미곡 판매를 위해, 가난한 농민들로부터 농지를 마구 사들여, 자작농은 줄어들고 소작농이 많이 늘어났다. 또 지주들은 소작료를 전보다 더 많이 받아 소작농민들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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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원료 공급지로서의 조선이다.
20세기 초 일본 경제의 주력 산업은 면직물 공업이었고, 수출 주력 품목은 생사였다. 따라서 면직 공업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원료가 되는 면화가 더 필요했고, 또 생사의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누에고치가 더 필요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남부에서 육지면이라는 면화 재배를 사실상 강제하고 있었고, 또 양잠을 늘리기 위해 뽕나무도 사실상 강제로 구매시키고 있었다.
조선에서 생산된 면화와 누에고치는, 수매를 독점한 일본인 회사들에 의해 일본 자본의 면업회사와 제사회사로 넘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 농민들은 충분한 수매 가격을 받지 못했다.
셋째, 상품시장으로서의 조선이다.
일본이 한국을 굳이 식민지로 만든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을 일본 상품의 독점적 시장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1910년 조선의 일본으로부터의 이입액과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액 비율은 64:36이었는데, 1941년에는 90:10이 될 정도로 일본 상품은 조선 시장을 거의 독점하였다.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상품 가운데서는 면직물과 일용품 등 소비 제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결과 조선인의 관련 토착 산업은 거의 붕괴하였다.
넷째, 자본 투자처로서의 조선이다.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된 이후 일본 자본은 서서히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1930년대 후반 들어 노구치, 미쓰이, 미쓰비시 등 재벌 기업도 만주와 중국 본토로의 시장 확대를 위해 조선에 적극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들도 회사와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1938년 당시 조선에 본점을 둔 회사의 납입자본액을 민족별로 비교해 보면, 조선인 쪽 11%, 일본인 쪽 89%로, 조선인 회사의 자본은 일본인 회사의 자본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다섯째, 수산자원·산림자원·지하자원 등 천연자원 약탈처로서의 조선이다.
일본은 1890년대부터 한국의 남해안에 일본 어민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하였다. 1910년 이후에는 일본 어선과 어민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의 동해안과 남해안에 몰려와, 명태·정어리·멸치·삼치 등을 마구 잡아들였다. 그 결과 조선의 어장은 황폐화되어 갔다.
또 일제는 통감부 시기부터 영림창을 두어,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 그리고 평안북도와 함경남도의 깊은 산림의 원시림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압록강 연안에서 벌목된 나무들은 뗏목으로 신의주까지 운반되어 일본인 목재상들에게 넘겨졌고, 이 목재는 주로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건축자재로 쓰였다.
또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목탄의 수요가 많이 늘어나, 총독부는 농촌 마을에 벌목 할당량을 부과하여 할당량만큼 나무를 벌채하도록 강요했다.
또 일제는 1930년대 이후 금 증산을 위한 산금장려정책을 폈고, 공업화를 위해 철과 석탄을 본격 채굴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군수공업에 필요한 흑연·운모·마그네사이트·텅스텐 등을 마구 채굴하여 실어 갔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은 일본 자본주의에 포획되어, 식량·원료 생산지, 상품시장, 자본 투자처, 천연자원 약탈처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 경제의 대일 종속’은 갈수록 심화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은 당시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노예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헛소리’와 같은 것이다.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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