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지방 답사기
오 봉 렬, 김 현 숙
창녕은 옛 가야시절 비화가야의 터전이며 일찌기 신라에 병합되었다. 대가야 · 소가야 등 대부분의 가야국들이 낙동강의 서남부에 위치한 것에 비해 비화가야는 낙동강의 동북쪽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라에 병합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고인돌 등의 선사유적이 아직 남아 있고 많은 옛 고분들이 여러 곳에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곳곳에 많은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어 제2의 경주라고도 불릴 만한 고장이다.
낙동강 유역에 발달한 충적평야는 농경 정착 생활을 위주로한 인류생활에 적합한 위치이다.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짓고 의식이 풍족하다보니 주변지역보다 큰 세력집단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고분시대로도 불리워지는 삼한시대로 접어들면 창녕지역은 불사국에서 비화가야로 발전한다. 교동 · 송현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이 가야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여 주고 있다.
억새로 유명한 화왕산은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자연경관과 아울러 목마산성과 화왕산성을 비롯한 많은 유적을 포함하고 있어 등산과 유적답사를 겸할 수 있다.
국내 최고의 수질과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부곡온천을 포함하고 있으며, 최근에 환경문제와 더불어 관심이 높아진 우포늪이 인근에 있어 자연학습에도 도움이 된다.
창녕박물관과 교동고분군
창녕박물관은 교동고분군과 인접하여 건립되었으며, 선사시대부터 가야시대의 창녕지방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창녕지방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맨 먼저 눈길을 끄는데 독립운동 등 이 고장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가지게 할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전시된 유물의 양은 많지 않으나 옛 가야의 역사를 밝히는데 가치가 큰,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채워져 있다.
출토된 유물들은 대체로 몇 종류로 대별할 수 있다. 가야 지역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집단들의 힘의 상징이랄 수 있는 무구류는 단순한 싸움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가야에서는 일찍부터 철을 이용하였음을 출토된 칼이나 철덩이로 알려준다. 또한 칼이 개인무기의 주를 이루는 가운데 전투용 말은 일당 백, 천을 압도하는 힘을 가졌을 것이다. 고분 무덤에 부장된 물품중에는 말을 위한 말갖춤용품이 많다. 고분 자체가 세력있는 사람의 무덤이다보니 그의 사후세계를 현실생활의 연장이라는 선에서 준비하다보면 그 당시 생활에서 가치있고 소중하다고 인정되는 물품들이 무덤 안에 같이 묻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이 그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운송수단을 넘어서 훌륭한 무기가 돼주었음을 알수 있다. 이런 말에게 제어용구와 안정용구를 부착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을테지만 장식용구가 여러가지 부착되었다는 것은 모든 자원이 부족하고 손질이 까다롭고 미숙한 그 시대에 말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였는가가 무게있게 느껴진다.
고분 안에는 여러모양의 토기가 들어 있다. 그 중에 이형토기는 그릇 몸통에 여러 동물이나 토우를 붙이거나 그릇 자체를 동물이나 배 · 신발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그런 모양내기에는 장식적인 요소도 있지만 주술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 죽은 사람이 저승 세상으로 무사히 건너가게 도와주기를 바램이라고 한다.
장신구는 중기 구석기 이후부터 조개무지에서도 발견되는데 장신구 역시 사회적 신분표상의 표시로 몸치레의 욕구충족과 더물어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창녕박물관 바로 옆에는 교동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는데 가야 · 신라시대 왕릉으로 일컫는 큰 봉분을 중심으로 옛 수장들의 무덤 수십기가 한 곳에 모여 있다. 고분군을 보자마자 경주에 있는 노동동 · 노서동 고분군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려움이나 경외감보다는 친근한 이웃이나 아이들의 놀이터 같은 느낌이었다.
신라 진흥왕 척경비 : 국보 33호
순수비로 통칭되는 진흥왕 척경비는 커다란 자연석의 한쪽면을 다듬어 글씨를 새긴 것이다. 진흥왕이 세운 기념비로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을 비문에 열거했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창녕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반드시 거쳐야할 교통상의 중요지역으로 555년(진흥왕)에 신라에 합병되고 561년에 진흥왕은 척경비를 세웠는데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비슷하다. 기존의 3개의 비(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보다는 수년 앞서서 건립되었다.
이 진흥왕척경비는 화왕산 기슭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소풍갔던 한 초등학생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그 후 학술조사를 거쳐 가치를 인정받고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보존에 대하여 다시금 일깨워주게 하는 대목이다.
현재 척경비가 있는 곳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창녕객사와 퇴천리3층석탑, 전적비 등이 함께 들어서 있다.
창녕 석빙고 : 보물 310호
영조 18년(1742)에 현감 신후서가 조성하여 관가와 세력가들에게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었을 얼음제조창고이자 보관창고이다. 청도의 석빙고가 돌을 쌓고 그위에 덮어 쌓은 흙과 떼가 다 벗겨져 석빙고 안의 돌방과 돌천장 홍예가 그대로 드러난데 비해 창녕 석빙고는 보존이 잘되어 있는 편이다.
그런데 석빙고 둘레와 입구에 철책을 쳐놓고 자물쇠를 채워 접근을 금지하고 있다. 그냥 고분마냥 흙무더기만 둥그레한 덩치를 보고 석빙고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조상들의 얼음 창고를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문화유적의 보존과 문화 유산에 대한 인식의 대중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는 쉽게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문화유산의 보존과 유지의 차원에서 관심과 자금의 지원이 따라야 하고 대중화를 위해서는 먼저 문화유산에 대한 기본 예절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끼는 마음이다. 우리의 문화유산이 소중하다는 인식이 들어야 비로소 아끼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끼는 마음이 생기면 저절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잘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아끼는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하고 또 친숙해져야 한다. 철책을 쳐놓고 접근을 못하게 하면 친숙함이 생길 수가 없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자물쇠를 채웠겠지만 중요한 것은 보호시설이 아니고 마음인 것이다.
부산에서 창녕까지 석빙고를 찾아 왔는데 안의 구조를 들여다 보기는커녕 석빙고 옆에 가보지도 못한 채 고분같은 모양만 보고 돌아서야 한다는 것에 화가 났다. 이래서야 어떻게 친숙함이 생기고 아끼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관광창녕을 강조하며 안내도 등을 잘 만들어 나누어주면서 정작 이런 문제는 아직도 개선이 되지 않고 있다. 나중에 부산에 돌아가서 해당 부서에 전화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술정리 동3층석탑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술정리 동 · 서 삼층석탑 : 국보34호, 보물 52호
술정리 동 · 서 삼층석탑은 한 절마당 양쪽에 자리한 탑이 아니라 술정리 동네의 동쪽과 서쪽에 뚝 떨어져 있어서 동 · 서로 구분되게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창녕관광안내도에는 동탑만 표시되어 있는데 동탑은 통일신라 흥성기(8세기 중엽)에 세워져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교될 정도로 인정받는 우수한 석탑이다. 동탑 안내표지판의 소개서를 인용하자면 ‘탑이 크고 짜임새가 장중하며 훤칠해 기품있게 보인다’고 하였다. 동네 한가운데에 있어서 아이들의 놀이터나 쉼터로 보이며 사람들에게 더욱 친근감을 준다. 기단 부분은 사람들이 늘 앉거나 매만진 탓에 먼지하나 없이 깨끗하며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동네 한 가운데 있지만 이렇게 완전하게 보존된 것을 보면 이 동네 사람들이 이 탑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우리가 답사갔을 때도 몇몇의 아이들이 놀고 있었는데 이 탑에 대한 애착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기단 갑석의 한쪽에 테니스공 반쪽 크기만하게 파여져 있는 것(性穴?)도 더 이상 훼손만 되지 않는다면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 같아 괜찮게 보였다.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 이 탑을 훼손시키지 말고 잘 보살피며 놀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예, 걱정마세요”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들을 뒤로하며 마음 뿌듯하게 자리를 떴다.
술정리 서삼층석탑은 동탑이 있는 곳에서 큰길 아랫동네의 밭 옆에 서있다. 우리는 술정리 동3층석탑을 찾다가 모르고 이 서3층석탑을 먼저 찾아가게 되었는데 서탑은 동탑에 비해 훼손이 심하였다. 신라식 일반형 석탑양식이 그대로 살아 있음으로 보물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푸대접 받고 있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던 탑이다. 여기에서도 문화재에 대한 인식과 관심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서탑이 있는 곳은 차량이 돌아나오기 어려우므로 탑에 200m 정도 못가서 있는 아파트 주변에 주차함이 좋을 듯 하다.
우포늪
창녕 나들목에서 7 k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일반 도로교통지도에는 우포늪이 표기되어 있지 않고 도로에 우포늪을 안내하는 표지판도 없어서 우리는 멀리 돌아가서 상당히 늦은 시간에 우포늪에 도착하니 겨울철새들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철새들이 날아가며 내는 소리가 꾸룩꾸룩 상당히 크게 들리니 진짜 자연 속에 동화된 듯하다. 우리가 길을 몰라 멀리 돌아왔다고 하니 환경운동연합에서 나와 안내를 하고 엽서도 파는 분이 친절하게도 지도를 보고 설명해주며 ‘관광창녕’이라는 팜플렛을 주셨다. 박물관에서 받은 것 보다 훨씬 다양하고 지도도 상세하여 다음 길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매우 고마웠다.
우포늪은 그냥 관광지가 아니고 자연학습장이다.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이 늦은 시간에도 수고를 하고 계셨다. 앞으로 이곳은 자연사박물관이나 자연사학습장으로 조성되어야하며 일반 관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 오염이 가속화되고 철새들도 떠나버리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소개책자의 글을 빌자면 ‘1억 4천만년전의 원시적 저층늪이 그대로 간직된 60만여평에 이르는 천연늪으로, 350여종의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고, 1996년에 람사협약에 가입되어 세계적인 자연환경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땅의 진화 과정중에서 진화의 대열에서 뒤쳐져 오히려 영광을 얻게된 경우이다.
이러한 열등이, 불행이 행운으로 뒤바뀐 경우를 자연 생태계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답사 후기
창녕은 읍 단위에 쉽지 않은 박물관이 있는 고장이다. 부곡하와이로 알려져 있고 화왕산 억새, 또한 자연사박물관 우포늪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으되, 역사적인 옛 도시이자 많은 유적과 유물이 그 자리에서 또는 박물관에 자리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창녕은 관광과 휴양, 문화유적답사와 등산, 민속문화와 자연학습 등 다양한 소재들을 지니고 있는 고장이며, 부산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당일 여행으로도 가능한 곳이다. 물론 하루만에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지만.
한겨레21이 안내한 우포늪을 주요 목적지로 하여 문화유적지 몇 군데를 소개받아 떠난 여행이 주객이 전도되었다. 오늘 돌아본 곳과 영산 지역 등 미처 돌아보지 못한 여러 곳을 다음에 다시 와서 찾아보기로 기약하고 돌아올 만큼 매력적인 고장이었다.
* 실제로 위의 답사기를 쓴 다음주에 한 번 더 답사를 다녀왔다.
관음사, 영산 만년교, 영산 석빙고, 구계리 석조여래좌상, 창녕 지석묘,
계성 고분군, 관룡사, 우포늪
* 화왕산(火旺山)의 유래 :
범람이 잦았던 낙동강 하류의 물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불기운이 왕성해야 한다는 풍수지리적인 뜻이 담긴 이름.
* 우포늪 :
지도상으로 본 늪지의 모양이 소와 같다고 하여 우포늪이라고 이름 붙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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