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 강릉 지역 답사기
* 답사일자 : 2003. 5. 4 - 5. 5 오 봉 렬
오래 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두 곳(선림원터와 진전사터)을 이번 연휴에 다녀오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월요일(어린이날 공휴)까지 해서 2박3일의 여정이다. 계획을 세울 시에는 토요일 날 오후에 출발하여 강릉까지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진료를 마치고 두 군데 문상을 마치고 나서 김해에서 출발할 때 시간은 이미 저녁 7시가 넘어 있었다. 고속도로가 밀리다 보니 첫날에 강릉까지 가질 못하고 안동에서 숙박하게 되었다.
다음날 오리모양의 배가 떠 있는 강변 유원지의 물가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중앙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전에 조탑동 5층전탑을 돌아보았다. 예전에 왔을 때는 밭 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지금은 주변을 정리하고 차량이 탑 바로 옆에까지 갈 수 있도록 잘 정비되어 있어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 좋았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동화작가인 권정생 선생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그가 쓴 책이 ‘느낌표!’에 선정되는 것을 거부하여, 더욱 감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선림원터
원주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장평 나들목에서 나와 국도를 타고 가는데, 이승복 반공기념관을 지나 운두령고개를 넘는다. 집사람은 ‘이승복 노래’에 ‘운두령고개’가 나온다며 흥얼거리는데 나는 도무지 그 노래 배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명산 오대산을 오른쪽으로 두고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국도를 따라 강원도의 깊은 속살같은 곳을 찾아가노라니, 미천골 자연휴양림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선림원터는 바로 이 미천골 자연휴양림 안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양양군에 속하며, 오대산의 북쪽 계곡이라고 볼 수 있겠다. 휴양림이 위치하고 있는 만큼 계곡물이 시원하고 기암괴석이 많다.
선림원터와 진전사터는 신라 왕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던 교종에 반기를 들고 새로이 등장한 선종 세력이 멀리 뛰기 위해 한 걸음 움츠리며 힘을 키우던 근거지로, 비록 지금은 폐사터이지만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휴양림 입구매표소에서 차를 세우고, 약 10여분 정도 계곡을 따라 걸어가니 선림원터가 나온다. 선림원(선림원)이라는 이름도 그러려니와 이 깊디깊은 산속에 자리한 것으로 보아 중생들을 위한 기도처라기 보다 스님들의 수도를 위한 곳이었던 듯 하다.
선림원은 804년에 순응법사가 세웠는데, 그는 화엄종의 승려로서 802년에 해인사를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림원은 화엄종에서 지은 절이 선종사찰로 전향했다고 여겨진다. 이는 절터에 남아 있는 부도비의 주인인 홍각선사가 선종의 승려인 것으로 증명된다.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부도, 석등, 부도비 등 여러 개의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이 선림원터에서 조성 내력과 연대가 새겨져 있던 통일신라의 동종이 출토되었는데, 월정사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월정사와 함께 불타버렸다. 이 종은 상원사종,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통일신라의 대표적 유물이었다.
선림원터의 석조 유물 4가지가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3층석탑과 석등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나, 부도와 부도비는 온전치 못하다. 부도는 기단부만 남아 있고 그 위의 몸돌과 상륜부는 없어졌으며, 부도비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고 비신은 파편 일부만이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데, 상층기단에 팔부중상을 조각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간주석이 장구모양이며, 지붕돌의 귀꽃이 많이 떨어져나갔다. 전체적인 비례가 잘 조화되어 있는 석등이다.
홍각선사 부도비는 비록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지만, 조각 솜씨가 매우 우수하여, 긴장감과 생동감이 넘친다.
석조부도는 기단부만 남아 있으나 곁에 있는 부도비와 관련하여 홍각선사의 것으로 추정된다. 중대석에 운룡문이 나타나는 최초의 양식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진전사터
작년에 홍수가 나서 이 일대가 큰 피해를 당하였는데 아직까지 복구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눈에 많이 띈다. 공사 중인 곳도 많지만, 피해의 흔적이 곳곳에 역력하였다.
진전사터가 있는 곳의 지명이 둔전리인데, 아마도 군대가 주둔하면서 둔전을 경영하였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전사터에는 멋진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과 도의선사의 부도로 추정되는 투박한 형식의 부도가 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당시 교종 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에 선종을 소개한 인물이다. ‘중국에는 달마가 있었고, 신라에는 도의가 있었다’고 비유된다. 당시로선 진보적 사상을 부르짖고 다녔던 도의선사가 기존의 승려들에게 심한 배척을 받은 후 뜻을 품고 은신한 곳이 바로 진전사였다.
도의선사의 선종 사상은 그의 제자 염거화상에게 전해지고, 다시 보조선사에게 이어져 맥을 잇게 된다. 보조선사는 구산선문 중 맨앞에 나오는 전남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짓고 선종을 펼친 분이다.
진전사터 3층석탑은 국보로 지정(제122호)되어 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 형식을 갖췄으며, 1층 기단에는 비천상을 조각했고, 2층 기단에는 팔부중상을 각 면에 2구씩 새겨 놓았다. 그리고 1층 몸돌 각 면에는 여래를 한 분씩 돋을새김해 탑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검은 빛을 띈 화강암이라 탑이 대체로 까무잡잡해 보인다.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길 양 옆에 겹꽃의 벚꽃이 떨어지는 광경도 인상적이었는데, 카메라를 빠뜨린 것이 아쉬웠다.
진전사터 부도는 우리나라 부도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아주 오래된 부도이다. 석탑의 이중기단부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이는 부도의 모습이 아직 구체화되기 이전의 형태, 곧 부도의 초기모습으로 파악되며, 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도의선사의 부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라 말 고려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모습은, 도의선사 이후 그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부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허균 생가터
계획을 세울 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답사를 하고 있다. 애초에는 강릉부터 돌아보려 했지만 양양 쪽에서 내려오다 보니 경포대 쪽을 먼저 돌아보게 되었다.
교산 허균(1569-1618)은 「홍길동전」의 저자로서, 이상주의자이며 자유주의자였다. 광해군 때 혁명을 도모하였다가 발각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의 역적은 모두 구명이 되었으나 허균만은 이중역적이라는 이름으로 거론조차 되지 못하였다. 인목대비의 폐모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허균보다 다섯 살 위인 누이 초희(허난설헌)도 문학적 소질을 타고 났으나, 순탄하지 못한결혼생활을 하였으며, 27세로 아깝게도 가벼이 세상을 떠났지만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다. 난설헌의 시는 현재 200여 수가 전한다.
허난설헌의 시는 동생 교산에 의해 중국과 일본에도 알려져 절찬을 받았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은 난설헌의 시를 소개받고 중국에서 「난설헌집」을 냈는데 당시 낙양의 종잇값을 올려놓았다고 할 만큼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교산(蛟山 :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교산이라 불려왔다) 아래에 허균의 외가이자 생가인 ‘애일당’(愛日堂)이 있었는데, 지금은 애일당의 흔적은전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언덕 위에 허균을 기념하는 ‘교산시비’(교산시비)가 있을 뿐이다. 고향을 사랑한 허균은 자신의 호마저 고향산천의 지명을 따라 ‘교산’이라 지었다. 언덕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야트막한 산이지만 앞의 사천해수욕장과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은 시원하게 탁 트여 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바로 허균의 운명을 나타내는 듯 하다.
다시 바닷길을 따라가니 경포호를 만난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경포호를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건너편의 불빛과 호숫가의 벤치 등이 데이트하기에 매우 적당한 듯 하다. 경포대 인근의 숙박업소는 관광지인데다 휴일이라 그런지 숙박료가 턱없이 비쌌고, 방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경포호 일대를 내일 아침에 다시 돌아보리라 하고는 강릉시내로 들어가 여관에 묵었다.
경포호 주변 (강문동 진또배기, 경포대, 선교장, 오죽헌)
아침에 일어나 여관 주인이 소개해준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강문동 진또배기다. 경포호와 동해가 연결되는 물길이 있는 곳이 강문동이다. 우리나라 여러솟대 중 가장 아름답고 조형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강문마을에서는 솟대를 진또배기라 부르는데, 나무로 만든 기둥 위에 새를조각하여 올려 놓았다. 여러 곳에 만들어져 있고, 한 솟대에 새 여러 마리가 함께 올라 앉아 있다. 주민의 말에 의하면 작년의 홍수로 이곳의 진또배기도 피해를 입어 새로 만들어 세웠다고 하였다. 솟대 위에 새를 올려 놓는 이유는, 새가 하늘과 땅과 물 모두에서 사는 짐승이며, 인간의 소원을 하늘과 땅과 물에 전하는 전령사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경포호 주변에는 경포대를 비롯하여 모두 열두 개의 누정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보수공사 중인 곳이 여럿이었다. 아마 여기도 작년에 홍수 피해를 입은 듯 하였다.
경포대에 올라갔다. 내가 10년 전에 오토바이 타고 왔을 때 경포대는 모르고 지나쳤었다. 길에서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흔히 관동팔경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는 경포대를 모르고 그냥 지나쳐 아쉬웠었다. 그런데 이번에 와 보니 경포대 주변을 정비해 놓아 주차장도 있고 기념품 등의 판매소도 보인다. 누각에 오르니 마침 나이지긋한 문화유산해설사(자원봉사자)가 나와서 경포대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여러 가지를 자세히 설명해주어 도움이 되었는데, 해설을 들어줄 사람들 인적사항을 적게하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적이라는생각이 들었다.
경포대에서 호수를 내려다 보는 전망은 정말로 좋았다. 경포호라는 이름은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호수의 둘레가 12km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토사가 많이 퇴적되어 약 4km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호수 둘레를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호수에 오리 보트 같은 게 있으면 더욱 운치있을 것 같은생각이 들었다. 오염을 최대한 방지할 대책은 세워야 하겠지.
경포대 누각에는 숙종 임금의 어제시와 이율곡을 비롯한 많은 시인 묵객들의 각종 현판들이 걸려 있다. 그 중의 하나를 문화유산해설사께서 설명해 주셨다. 답사 다닐 �� 마다 느끼는 것인데, 한자와 한문 실력이 부족해서 현판에 써 있는 이름이나 싯귀 등을 읽거나 해석할 수 없어서 아쉬운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특히 초서로 써 있으면 읽을 수 조차 없어 난감하였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이 지었다고 하는데, 강원도내의 개인주택으로서는 가장 넓은집이라고 한다. 사랑채 · 안채에 별당까지 있고, 집안에 넓은 연못과 정자까지 갖추었으며, 행랑채는 민속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대문 한쪽에 내외벽을 설치하여 안팎의 시선을 차단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내외벽에 대하여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사랑채에는 우리식(한옥)과는 다른, 동(銅)으로 만든 차양이 설치되어 있는데, 한 때 선교장에 묵으며 신세를 진 러시아 공사가 그 답례로 만들어 설치해준 것이라고 한다.
선교장에는 문화유산해설사(자원봉사자)가 두 사람 나와서 시간대별로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한 분은 경찰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임한 후 많이 힘들었는데, 문화유산해설사 공부를 하고 자원봉사를 하면서부터 노년생활의 활기를 찾았다고 하셨다. 특히 작년에 자신이 살던 집도 침수피해를 당하여 막막했는데,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수재의연금을 내어 도와준 덕분에 새로이 집을 짓고 살 수 있게 되었다며, 관람객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여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직접 도와준 것도 아니고, 수재의연금을 낸 사람 안낸 사람섞여 있을텐데 이렇게 모두에게 고맙게 생각하니, 더욱 같은 민족이고 국민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고맙게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더욱 우리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오죽헌은 율곡이이가 태어난 집으로, 색이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 주거 건축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라고 하며, 주심포 양식에서 익공 양식으로 변해가는 주택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오죽헌은 요란하지 않은 그윽한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사당(文成祠)에 기념관에 강릉시립박물관까지 들어와 너무 덩치가 크게 되어버렸다. 한편 입장료가 부담이 되어 박물관 관람에도 제한을 받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천원짜리 지폐에 그려져 있는 벼루그림의 유래가 된,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가 진열되어 있다.
강릉 시내 (강릉 향교, 대창리 · 수문리 당간지주, 칠사당, 객사문)
강릉 향교는 명륜고등학교 안에 있다. 학교에 들어서니 왼편에 황영조 기념체육관이 눈에 띈다.
강릉 향교는 나주, 장수의 것과 더불어 3대 향교를 이룬다고 할 만큼 완벽한 규모와 기능을 갖추었다. 경사지형을 이용하여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고, 명륜당과 대성전 건물이 여느 향교에 비해 매우 큰 규모이다. 향교로서는 드물게 대성전 건물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구조인데, 측면 3칸 중에서 앞툇간은 모두 개방된 형태인 것이 특징이다.
학교 안에 향교가 있어 학생들의 정서함양이나 교육, 향교건물의 이용 및 관리에 있어 모두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창리 · 수문리 당간지주는 시내 복잡한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지도를 잘 보고 찾아가야만 한다. 둘 다 장식이 없이 단순한 형태이지만 규모가 크고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장쾌한 느낌을 준다.
강릉 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치러지는 향토 축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제전이라고 한다. 천여 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지니며,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고 즐기는 성격의 제전이다.
국사서낭신과 여서낭신이 관련된 설화가 있다.
강릉에 정씨가 살았는데, 나이 찬 딸이 있었다. 하루는 꿈에 국사서낭신이 장가를 오겠다고 하였으나 서낭신에게 딸을 줄 수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마루에 앉아 있는 정씨의 딸을 호랑이가 업고 달아나는 일이 생겼다. 딸을 잃은 정씨가 딸을 찾아보니 이미 죽어서 혼은 없고 몸만 대관령 서낭당에 비석처럼 서 있었다. 국사서낭신이 호랑이를 시켜 정씨 딸을 데려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 날이 바로 4월 15일, 그래서 지금도 4월 15일에 두 신을 함께 모셔 제사를 지낸다.
칠사당(七事堂)은 조선 시대 관공서 건물로서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 등 일곱 가지 정사를 베풀었다 하여 칠사당이라고 한다. 이름만 얼핏 듣기에는 일곱 사람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생각하기 쉽다. 평소에는 정문이 항상 잠겨있다고 했는데, 아마 단오제 준비 때문인지 문이 열려 있고, 시민들로부터 쌀을 찬조받은 듯 많은 작은 쌀포대들이 마루에 놓여 있었다. 나무 그늘이 시원한데, 강릉 시장이 관사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객사문을 찾아가다 보니 그 일대가 한참 공사중이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 시청이 있었는데 지금은 외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 일대를 발굴작업하고 있었다. 발굴작업 관계로 객사문도 해체되어 제 자리에 없었다. 경비를 서고 있는 아저씨말에 의하면, 옆에 있는 우체국 건물과 한국통신 건물까지도 헐릴 것이라 한다. 사실이라면 참 대단한 도시다. 그리고 대단한 시민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 복원을 위하여 시청을 옮기고 다른 큰 건물까지 모두 헐어낸다고 하니 문화재에 대한 긍지와 사랑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의 시행까지 아울러 대단하다고 여겨져 감탄했다.
객사문은 고려 주심포 건축의 정수로서 정연하고 아름다운 비례와 구조를 지니고 있어 한국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등이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남아 있지만, 절집이 아닌 목조건축물로는 이 객사문이 가장 오래되었다.
강릉 지방의 건축물로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객사문의 실물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시청까지 헐어내고 발굴작업 중인 현장을 보면서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준 강릉시의 그 정책을 생각하면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릉의 자부심을 보는 것 같았다.
신복사터
한송사터를 생략하고 신복사터로 향하였다. 한송사터 석불좌상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흰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강릉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복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복사터에서는 강릉 · 명주 지역(오대산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함, 곧 탑을 향해 공양하는 석불좌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월정사와 한송사터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신복사터는 야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중후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초의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석탑 앞에는 탑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의 석불좌상이 있다. 특이하게도 머리 위의 원통형 관 위에 다시 팔각지붕돌을 이고 있다.
굴산사터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신라 말 문성왕 9년(847)에 창건하였으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폐사터이지만 당시는 강릉 일대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한다. 범일국사는 대관령의 서낭신으로 강릉 일대에서는 신격화된 존재이다. 강릉 단오제 때 ‘대관령국사서낭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바로 범일에게 지내는 제사라고 한다.
굴산사터의 주요 문화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와 화려한 범일국사의 부도가 있다. 그 밖에 여러 개의 불상이 여기저기 흩어져 남아 있다.
부도가 있는 곳에 가려면 개울을 지나야 하는데, 작년의 홍수로 다리가 끊어지고 많이 무너져 있다. 이곳에는 복구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책의 사진에는 없던 접시모양의 받침을 하대석 밑에 보완하여 놓았다.
봉평 일대 (봉산서재, 이효석생가터, 팔석정, 판관대)
굴산사터에서 나와 보현사를 목표로 출발하였는데, 고속도로로 들어와 보현사 가는 길을 찾지 못하여 장평까지 오게 되었다. 인근에 율곡 이이와 관련된 유적이있고, 또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이효석의 생가터가 멀지 않은지라 찾아보기로 하였다.
봉평 가는 길 길가에 판관대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은 율곡 이이가 잉태된 곳으로 집터만 남아 있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수운판관을 지냈기에 그리 불리운 듯 하다. 율곡이 이곳에서 잉태되고 오죽헌(신사임당의 친정)에서 출생한 것이다.
봉산서재는 이 고을 유생들이 봉산(이 마을 뒷산)에서 율곡이 잉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지었다고 한다.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이효석 생가터는 주차장을 크게 만드는 등 한창 정비사업을 하고 있었다. 생가터에 이르기 전, ‘이효석 문학의 터’임을 알리는 기념비와 물레방앗간이 만들어져 있다. 이외에도 봉평의 곳곳에 이효석과 관련된 시설물들이 세워져 있다.
봉평에서 나오는 길에 팔석정이란 곳을 찾았다. 조선 전기에 시와 글씨로 유명했던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부임할 당시, 이곳의 수려한 경치에 반해 8일 동안 노닐다 갔다고 한다. 그 후에도 매년 찾아와 선비들과 시상을 즐기며 놀았는데, 그가 바위 여덟 군데에 봉래, 방장, 영주, ...등등의 글씨를 새겨놓았다 하기에 잠시 찾아 보았는데 2개밖에 찾지 못하였다. 시간과 여건상 다음 기회로 찾는 것을 미루고 귀가 길에 올랐다.
이번 답사는 오랫동안 미뤄왔던 선림원터와 진전사터에 대한 답사로 부족한 것을 채운 듯한 느낌이 들고, 강릉지방의 많은 문화재들을 살펴보게 되어 한결 풍성해졌으며, 계획에 없었던 봉평지역까지 더듬어 보았기에 대체로 만족스런 여행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릉지방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과 관심, 그리고 저력을 알 수 있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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